〈 35화 〉제 01계-챕터 01: 에볼루션 시스템
그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거대한 스케일.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실행했다는 그 사실에 죄책감을 가질 정도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이 무엇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인식은 있었다. 그렇기에 무서웠다. 혹시라도 자신의 과거가 알려질까 봐.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과거가 알려졌을 때 친하게 지내던 이들이 자신을 어떤 눈초리로 볼까 알 수가 없어 무서웠다.
그렇기에 공선자는 스스로 타인과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억을 보존한 이상 공선자는 결코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계열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었으니깐 말이다.
“……우갹?!”
“어어?!”
……공선자가 그렇게 지극히 시리어스한 사고에 빠져 있을 때였다. 충격을 받고 비틀거리며 이동하던 소녀.
……어쩐지 매우 위태롭게 걷는다 싶었던 그 소녀가 갑작스럽게 앞으로 자빠진 것이었다. 지금 그들이 걷고 있는 장소는 동굴.
어두웠다. 거기에 바닥 역시 도저히 포장되어 있다고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울퉁불퉁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저렇게 비틀거리며 걸으니 넘어지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일 터였다.
……단지, 넘어지는 광경이 아주 시원스러웠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보통 넘어진다면 하면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는 행동을 취하려는 법이다.
그리고 그 결과 넘어질 때 손을 뻗거나 해서 넘어질 때의 충격이 머리와 같은 급소에 다이렉트로 전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드는 게 사람의 본능.
하지만 소녀는 정말로 어지간히도 충격을 받았던 것인지 그런 행동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안면을 처박는 것처럼 넘어져 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반응을 보아하니 자신이 넘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이 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모양.
그대로 안면을 바닥에 처박은 직후에 통증에 작은 비명을 질렀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광경을 무심코 지켜보고 있던 공선자 역시 당연하게도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위태롭게 보인다고 해도 설마 저렇게 시원할 정도로 직방으로 바닥에 머리를 박아버릴 줄은 그도 상상도 못하고 있었으니깐 말이다!
‘어, 어쩌지?!’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선자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장 가서 소녀를 부축하려고 할 테지만 말했다시피 공선자가 어디 평범한 사람인가?
당장 스스로 나서서 소녀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공선자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으니깐 말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인간으로서 뭐가 좀 아닌 것 같아서 움직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
벌떡! 휙! 휙! 휙!
그런데 공선자가 그런 갈등을 하고 있을 때 넘어졌던 소녀가 곧바로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서는 잽싸게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소녀의 넘어질 때 그렇게 큰 소리가 난 것도 아니었다.
소녀가 무심코 내지른 비명도 그녀의 안면이 땅에 박혀 있어 입이 틀어 막힌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에 주변으로 퍼져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았던 공선자도 동굴 특유의 울림 덕분에 간신히 들었을 정도였으니까.
즉, 주변 사람들은 소녀가 넘어진 것은 눈치 채지 못했다. 당장 공선자와 소녀가 무리의 맨 뒤에 가까운 위치였다는 점, 그리고 주변이 어둡다는 점이 그를 가능케 하는 것에 한몫했을 터.
때문에 소녀는 자신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안 보였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뭔가를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
“……나, 날씨가 좋네요.”
그리고서 공선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공선자도 소녀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공선자는 자신이 소녀의 추태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소녀에게 들켰다. 소녀는 공선자가 자신의 추태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순간적으로 어색한 침묵이 흐를 수밖에 없었고 그 어색한 침묵에 공선자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며 또다시 되지도 않는 화제를 꺼내 드는 것이었고 말이다.
그 어색하기 그지없는 발언이 소녀가 시선으로 묻는 무언의 질문에 대한 긍정이라는 사실은 공선자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 걸 어떻게 하는가?!
“끄으응……!!”
그리고 그런 공선자의 ‘난 다 보고 있었다!’ 라는 주장이나 다름없는 반응에 소녀는 바닥에 부딪혔던 자신의 콧등을 누르며 재빨리 무리의 앞쪽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공선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소녀는 공선자가 자신의 추태를 본 것을 가지고 뭐라고 따질 생각은 없었던 모양.
그래도 그런 추태를 보았으니 뭐라고 한마디 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간 걸 보면 의외로 그렇게 창피해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공선자는 생각했다.
‘으아아아아아!!! 바보! 멍청이! 잘난 척하며 낙오하지 말라느니, 걱정한다느니 이야기한 주제에 거기서 철퍼덕 넘어지는 건 뭐하는 짓인데?! 그것도 그냥 넘어진 게 아니라 넘어질 때까지 넘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대로 안면을 바닥에 찍다니……, 넌 도장이냐?! 안면 도장인 거냐?!’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공선자가 보이게는 그렇다는 것이고 사실 소녀는 그냥 간 게 아니라 너무나도 창피했던 나머지 더 이상 공선자의 얼굴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도망쳤던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공선자는 그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을 뿐이었고 말이다.
‘그, 그건 그렇고 제대로 얼굴을 바닥에 찍은 것 같았는데 의외로 멀쩡하시네?’
오히려 공선자는 소녀가 얼마나 창피하든 말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소녀의 추태로 알아낼 수 있었던 또 한 가지 정보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바닥이 딱히 푹신푹신했던 건 아니야. 진흙 같은 게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저렇게 안면을 제대로 이런 딱딱한 바닥을 향해 돌진시켜 놓고서 멀쩡한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무슨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 공선자를 비롯한 이들이 걷고 있는 동굴 바닥은 평범한 동굴 바닥이었다.
즉, 단단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동굴이라는 소리. 그런데 그런 암반에 중력가속도가 그대로 적용된 상태로 얼굴을 들이박았는데 상처 하나 없다고?
운이 나쁘면 코뼈가 부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튼튼하면서도 의외로 연약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역으로 운이 좋아서 아무런 상처도 없이 일어나는 것도 꼭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통증은 있을 터.
하지만 공선자가 보기에는 소녀는 그렇게까지 큰 통증을 호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수치심에 통증마저 잊어버렸다는 게 정답일지도 몰랐지만.
‘푹신푹신한 매트에 방금 전처럼 안면을 던져도 통증에 몸부림칠 정도인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역시 이상해. 상처 하나 없는 거야 넘어지는 방식에 따라서 운이 좋으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당히 확률이 낮은 경우에 해당했다. 그렇기에 공선자는 또다시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여, 역시 이 스테이터스 창 하고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의 눈앞에 떠올라 있는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 방금 전에 자동적으로 떠올랐던 퀘스트 창 비슷한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인터페이스.
어떻게 생각해도 이 반투명한 창이 자신에게, 정확히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에게 모종의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자신이 보았던 퀘스트 창 비슷한 것을 다른 이들도 보았다고 하니 이 스테이터스 창도 다른 이들 역시 열어볼 수 있을 확률이 농후했다.
단지, 이 존재를 눈치 챈 것은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공선자 자신뿐일 확률 역시 높았다. 방금 전의 소녀는 아마도 공선자와 같은 분류의 세계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럼에도 게임에 대해서 몰랐다. 생존에 필요하지 않은 지식이라는 인식이 그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지 않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 그렇다면 공선자처럼 게임에 대입하여 스테이터스 창이 떠오를지 시험해본 이들은 아마도 없을 터.
‘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영향을 받지 않을 리가 없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전원이 공선자와 같이 에볼루션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무엇인가를 각인 받았다.
그리고 이 스테이터스 창도 그 에볼루션 시스템의 일종일 터. 그렇다면 당연히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스테이터스 창에 모종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터.
그 모종의 영향이라는 것이 신체 내구력의 향상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공선자의 추측도 과장일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게임에서 스테이터스 창하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플레이어 캐릭터의 강화.
즉, 이 스테이터스 창이라는 녀석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종의 강화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증거로서 공선자는 방금 전 소녀의 반응을 떠올리는 것이었고 말이다. 평범한 소녀라면 방금 전처럼 넘어졌다면 운 좋게 멀쩡하다고 해도 강한 통증을 호소했을 터.
허나, 이 스테이터스 창이라는 녀석이 포함과 에불루션 시스템의 모종의 영향으로 신체가 강화된 상태였다면?
그렇다면 충분히 방금 전의 소녀의 어디 만화에서나 볼법한 현실적이지 않은 반응도 이해할 수 있었다.
‘으윽!’
그리고 그런 자신의 추측을 증명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다름 아닌 스스로 자해를 해보는 것이었다.
본래의 공선자라면 겁을 먹고 제대로 자해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허나, 이 자리에 있는 공선자는 형의 인격이 융합된 공선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해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것이 ‘필요한 일’이라면 불가능하다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공선자는 이를 악물고 자신에 신체를 통해서 자신의 추측이 사실인지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충분히 겁쟁이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의 공선자가 갑자기 자신의 손가락을 꺾는다거나 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조차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완치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처를 자신에게 입히는 것은 하책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겁이 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최소한의 상처로 자신의 추측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지금의 공선자의 신체는 감각이 예민하기 그지없었다. 뭐라고 해도 에이전트로서 활동했던, 극한까지 단련된 신체니깐 말이다.
그러니 신체의 미세한 변화도 확실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굳이 억지로 큰 상처를 입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공선자가 선택한 행동은 이후 활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의 상처를 스스로에게 입히는 것. 그러면서도 신체의 변화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상처여야 했다.
‘단, 그와 동시에 최대한 외부에서의 감염이 일어나지 않을 만한 상처…….’
그 모든 것은 종합한 결과 공선자는 걸어가던 도중 슬쩍 동굴의 벽 쪽으로 향하더니 그대로 자신의 팔꿈치를 벽을 향해 내지르는 것이었다.
최대한 피부가 쓸리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팔꿈치 부분에는 확실하게 충격이 가해지게. 지금의 공선자의 신체를 통해 훈련을 받은 것은 형의 인격이었다.
그러나 그 인격은 현재 공선자에게 융합된 상태. 거기에 흔히들 몸은 기억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공선자는 무의식적으로 확실하게 자기가 이미지 했던 대로의 움직임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얻은 정보는 공선자의 예상대로의 결과였다.
‘……본래라면 팔꿈치를 몇 분 정도 못 쓸 정도의 충격일 텐데 곧바로 움직일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