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제 01계-챕터 01: 에볼루션 시스템
띠링!!
‘우왓?!’
공선자가 떠올리기 무섭게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또 다른 반투명한 창. 그것은 방금 전에 공선자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보았던 예의 퀘스트 비슷한 것이 적혀 있는 창이었다.
‘……굳이 말로 할 필요 없이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뜨는 거구나? 어, 어디 보자……. 이 창은 퀘스트 창……이 아니라 스트림 창인가. 그리고 지금 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전원이 받은 게 메인 스트림. 요컨대 메인 퀘스트랑 같은 거라는 거네?’
스트림. 흐름. 게임에 따라서는 메인 퀘스트를 메인 스트림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도 에볼루션 시스템에서는 퀘스트가 아니라 스트림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 같았기에 그 부분은 그냥 납득하고 넘어가는 공선자.
지금은 그것보다 그 스트림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공선자가 파악했던 대로 확실히 이 메인 스트림의 보상 부분에는 공선자가 스테이터스 창에서 확인했던 진명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내 진명은……, 공선자. 즉, 진명은 내 이름이 맞다. 그렇다면 이 메인 스트림에서 보상으로 주는 진명이라는 건 당사자의 이름을 알려준다는 이야기인가?’
그러고 보니 아까의 소녀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을 못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은 확실히 보상이라고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이미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공선자에게 있어서 이는 결코 보상이 된다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공선자가 그 사실을 뇌리에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띠링!
‘……새, 새로운 퀘스트? 아니, 스트림인가? 어쨌든 새로운 게 떠올랐어? 나만 그런 건가?’
갑작스럽게 공선자가 살펴보고 있던 스트림 창에 새로운 무엇인가가 갱신되는 것이었다. 그 사실에 놀란 공선자가 조금 초조함이 담긴 시선으로 슬쩍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자기뿐 아니라 다른 이들 중에서도 스트림 창이 새롭게 갱신된 이가 있나 반응을 살펴보려던 것.
하지만 주변을 살펴보아도 전원이 그저 어떻게든 동굴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열심히 걷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도 공선자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어색하기 그지없는 반응을 보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당한 인원수였기에 공선자가 서 있는 맨 후미에서 전원을 살피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였지만 적어도 이렇게 새로운 요소가 발생했음에도 사람들이 시끄러워지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공선자의 인식 너머에 있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다시 말해서 이건 나한테만 발생한 현상이라는 건데, 어째서? 왜? 이, 일단은 내용을 확인하고…….’
왜 자신에게만 갑자기 새로운 무엇인가가 발생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추측을 하자면 아마도 기억에 관련된 것 같은데 이것도 섣부른 추측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일단 갱신된 내용을 읽으려고 했던 공선자. 하지만 그는 직후 들려온 외침에 곧바로 시선을 앞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바, 밖이다! 밖으로 나왔어! 좋았어! 제대로 입구가 있는 장소였다고 여기는!”
“와아아! 하늘이다! 거기에 제대로 된 평원! 다행이다! 어디 마경 같은 장소에 존재하던 동굴 같은 건 아니었구나!”
“거기에 봐봐! 저기! 아슬아슬하게 시야에 닿는 곳에 제대로 정비된 길로 보이는 게 존재한다고!”
단체로 걷던 일행들 중 맨 앞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것은 다름 아닌 고대하던 동굴에서의 탈출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든 공선자는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일단은 계속해서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이내 눈이 빛에 익숙해지고 동굴에서 거의 마지막에 가깝다고는 해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빠져나오는 게 가능했던 공선자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다름 아닌 동굴에 나오는 순간 그의 눈에 펼쳐진 광경 때문이었다. 그것은 과거 임무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던 공선자조차 처음 보는 광경.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초록빛의 잡초들이 물결치고 있는 평원. 그리고 시야 한구석에서 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는 숲들. 마지막으로 공선자의 바로 등 뒤에 존재하는 넘치는 생명력이 느껴지는 산.
그야말로 대자연의 한가운데에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광경이었다. 오히려 자신이라는 존재가 자연에 억지로 끼어든 것 같은 압박감마저 느껴질 정도.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것은 역시나 하늘이었다. ……공선자의 기억에 있는 하늘과 확실하게 달랐다.
도대체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다면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굳이 설명하자면 청정함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21세기 지구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청아함이 느껴지는 하늘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 그 무엇에도 더러워지지 않는 푸른색의 비단을 펼쳐놓은 것 같은 느낌의 하늘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그가 기억하는 하늘보다 더욱 높고 넓어 보이는 하늘. 그 하늘에 공선자는 무심코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호흡할 때마다 느껴지는 이 느낌……. 뭔지는 몰라도 확실히 달라. 그래, 여기는 정말로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무심코 잊고 있었던 호흡을 되찾는 순간 공선자는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 세계는 자신이 살던 세계와 확실하게 다른 세계라는 사실을. 공기가 무거웠다. 그 사실을 호흡하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하게 그에게 실감을 주었다. 지금 자신은 자기가 알고 있던 세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말이다.
“뭔가 달라. ……뭐가 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많이 다른 것 같아.”
“흠? 딱히 다른 건 없어 보이는데? 지극히 평범한 평야가 아니냐? 그것보다는 일단 저기 보이는 길로 이동해서 길을 따라 걷도록 해보자. 길이 있다는 건 그 길 끝에 마을이나 도시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은 공선자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기억에는 없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 자체에 괴리감을 느낀다.
그 원인을 기억이 있는 공선자만이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 저 사람들은 공선자와 마찬가지로 21세기 지구와 비슷한 수준으로 문명이 발전했던 세계에서 온 이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맑다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자연을 생전 처음 앞에 두고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
공선자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 광경은 자신이 살던 지구에 존재하던 그 어떤 자연들보다 맑기 그지없는 광경이라고.
21세기의 지구는 아무리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오지라고 해도 결국에는 사람들의 손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애초에 지구 그 자체가 지구 온난화라는 거대한 휩쓸려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 터.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런 인간의 간섭을 일절 받지 않는 그야말로 중세 시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생한 자연환경이었다.
“길이 있는 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방향을 모르는 이상 함부로 움직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저기를 봐! 길가에 표지판이 있잖아? 그러니까 일단은 저 표지판이 있는 장소까지 이동하는 게 어때?”
공선자가 그런 감상을 보이고 있을 때 간신히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한숨 돌린 사람들이 다음 행동을 결정하고 있었다.
눈이 상당히 좋은 것인지 멀리 떨어져 있는 길에 존재하는 표지판을 잘도 눈치채고 그것을 지목하는 것이었다.
그에 다른 사람들 역시 뭐가 되었던지 문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빠르게 그 표지판을 향해 몰려가는 것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자연경관에 압도되어 있던 공선자 역시 다른 이들이 우르르 표지판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하자 얼떨결에 정신을 되찾고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공선자는 한 가지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표지판. 요컨대 나무판과 같은 것에 글을 써 길에 세워두는 것으로 통행하는 이들이 자신의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건.
공선자가 살았던 세계에서는 나무가 아니라 철판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거야 문명의 발전도에 따라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국 표지판이라는 것은 길을 다니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 만들어진 ‘글자’를 통해서 행선지를 알려주는 시설이라는 점이었다.
그래, 글자인 것이다. 여태까지 정신없이 움직이고 지금 자신이 가진 정보를 통해서 여러 가지 추측을 늘어놓느라 신경 쓰지 못한 요소 중 하나.
글자란 무엇인가? 사람이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필수적인 개념 중 하나. 글자가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인류는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인류의 문명의 가장 큰 주춧돌 중 하나. 하지만 그 특징상 문명의 차이에 따라서 당연히 글자 역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이상하다는 이야기였다. 글자, 아니, 글자뿐 아니라 언어 역시 문화권에 따라서 당연히 차이가 났다.
문화에 따라서, 나라에 따라서, 그리고 문명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것이 글자와 언어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사람들은 조금만 떨어진 장소에서 살다가 만나면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경우도 수두룩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전원이 말이 통하고 있는 거지? 공선자가 추측하길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전원이 각자가 다른 세계, 다른 나라에서 끌려온 사람들일 터.
나라가 다르기만 해도 언어가 달라졌다. 그런데 하물며 다른 세계?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은 서로 간의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거기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전원이 기억을 잃고 있는 기억상실자들.
그렇기에 당연히 떠올렸어야 할 의문 중 하나였음에도 그 누구도 그와 같은 의문을 꺼내지 않았다.
기억을 지니고 있는 공선자마저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의문을 표하지 않으니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말이다.
“오! 봐봐! 여기에 그 이상한 창에 쓰여 있었던 소나타라는 도시가 적혀 있어! 어디 보자……, 여기서 2km 정도만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다는 모양인데!”
“흠. 그러면 이 이상한 창에 적혀 있는 내용은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건가? 아직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지시에 따른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군.”
그렇게 의식하고 있지 못했던 문제가 누군가가 발견한 표지판에 다가가 그 표지판의 글자를 읽는 순간 공선자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럴 것이 표지판에 적혀 있던 글자는 공선자가 ‘알고 있는 문자 체계’가 아니었다. 직업이 직업이었던 만큼 공선자는 과거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많은 문자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던 증오스러운 고향인 한국어는 물론, 영어,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 러시아어 등등.
언어학자 수준은 아니라고 해도 각 나라에서 바디랭귀지를 섞으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는 익히고 있었다는 소리.
그런 공선자조차 표지판의 글자는 처음 접해보는 글자였다. 하고 싶은 말을 요약하자면 요컨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글자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해가 되었다. 눈앞의 글자가 무슨 뜻인지 신기하게도 공선자는 읽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사실에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확인한 스테이터스 창, 스트림 창과는 달랐다.
두 창은 공선자가 확실히 알고 있는, 그가 제일 익숙하게 생각하는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증오하는 공선자조차 ‘확실히 세종대왕은 대단하네!’ 라고 탄성을 할 정도로 높은 체계를 자랑하는 한국어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홀로그램 창의 글자를 봤을 때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표지판의 글자는 달랐다.
저건 공선자가 모르는 언어였다. ……그럼에도 이해가 되었다. 그 사실에 어찌 경악을 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거기에 뒤늦게 눈치 챈 것인데 주변에서 상황은 이해할 수 없지만 드디어 일단은 안전한 장소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토해내는 언어들.
……그 언어들이 전부 제각기 다른 언어라는 사실 역시 공선자는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