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제 01계-챕터 01: 에볼루션 시스템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는 언어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되는 언어들.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상에 공선자는 패닉에 빠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 누가 내 머리를 건드렸나?!’
언어영역은 정신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간섭을 한다는 것은 요컨대 자신의 뇌를 누군가가 만지작거린 것일 수 있는 것 아닌가?
과거 끔찍한 생체실험을 당한 이력이 있는 공선자에게 누군가가 자신의 뇌를 만졌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가볍게 패닉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억지로 이성을 되찾았다. 다른 이들이 저마다 안도와 기쁨을 표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 혼자만 패닉에 빠진다고?
의심을 사기 딱 좋은 반응이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는 것이었다.
동굴과 다르게 이곳은 탁 트인 평원. 그렇기에 밝은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공선자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한다고 하고 있지만 전신에서 노골적으로 흐르는 식은땀, 그리고 오히려 다른 이들은 기뻐하는데 자기 혼자서 정색을 하고 있는 모습.
역으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억지로 주장하는 저 모습이 수상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저마다 기뻐하는 것에 바빠서 공선자의 상태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심하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은 이동하도록 하지. 그 소나타라는 도시에 도착하면 우리들이 상황에 대해서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당장은 해가 중천에 떠있기는 하지만 언제 어두워질지 알 수도 없고 말이지. 여기 누구 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 있나?”
드디어 안전한 문명의 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사람들이 안도를 하고 있을 때 여기까지 그들을 이끌었던 마초남이 입을 열었다.
그의 지적에 사람들은 수긍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시계가 있느냐고 묻는 마초남의 질문에 그 누구도 긍정을 표하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복장하고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소지품은……. 아무것도 없나. 복장은 입는 느낌이 거칠기는 하지만 그래도 못 입을 수준은 아닌 옷 한 벌뿐. 그, 그나마 속옷이 있어서 다행인가.’
공선자 역시 마초남의 외침에 간신히 의식을 다른 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정보를 모아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으면서 정작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해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공선자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지만 말이다. 밝은 장소로 나온 뒤에야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색을 확인하기 시작하기도 했고 말이다.
“시계는커녕 뭐하나 들고 있지 않은 완전한 빈털터리잖아, 이거? 거기에 이 옷……, 센스 한 번 구리네.”
“센스를 따지기 이전에 옷감 자체가 글러 먹었잖아? 당장은 입을 게 없으니까 입겠는데…….”
자신이 시계를 가지고 있나 확인을 하려던 사람들은 덤으로 자신의 행색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몇몇 이들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 질색을 하는 것이었다. 의외인 것은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왜 몇몇 이들이 질색을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반응을 보여줬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무난한 수준의 옷 아닌가?”
“우리들이 무슨 귀족도 아니고 말이지. 이 정도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거적때기가 아닌 게 어디야?”
“……너는 어디 거지였던 거야? 노숙자도 옷감만 따진다면 이것보다는 나은 옷을 입겠구먼.”
……저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역시 끌려온 세계의 문명 차이 때문일 터. 공선자는 그렇게 추측하는 것이었다.
문명이 발전하여 좋은 옷감이 대량생산되어 보급되었던 21세기 지구에서 살았던 그 역시 인식하기 시작하자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적응되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도 지금은 옷보다는 어째서 내가 모르는 언어랑 글자 체계를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그리고 새롭게 나타난 이 서브 스트림이라는 것에 대해 파악을 하는 게 우선이야.’
생존에 필요한 대표적인 요소인 의식주. 그중에서도 의를 담당하는 옷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은 급하지 않았다. 입고 있을 수 있는 옷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공선자는 이 정도 수준의 옷이 무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 공선자가 느끼기에 지금 자신이 있는 세계는 문명이 발전된 세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이 청정한 자연환경은 설명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 세계에서는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입던 옷조차 엄청난 사치품으로 취급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치품을 입고 있는 단체가, 그것도 기억을 잃은 단체가 우르르 몰려다닌다? 치안이 어지간히 좋지 않은 이상은 그대로 무법자의 표적이 되기 딱 좋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적절할지도 모른다고 공선자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일단은 옷에 대한 고민을 접어두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눈앞에 닥친 상황부터 이해하는 것에 뇌세포를 총동원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깐 말이다.
“그럼 빠르게 이동하지. 혹시라도 해가 지면 일이 어떻게 흐를지 모른다. 그러니 해가 지기 전에 도시나 마을에 도착하고 싶어.”
“하지만 마을이라면 몰라도 도시에 도착하면 신분을 확인하게 될 텐데?”
“신분? 무슨 신분? 고작 여행 좀 한다고 신분 확인을 왜 해?”
또 다시 서로 알고 있는 상식이 다른 것으로 인한 의견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직 자신들이 서로 불려 온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간의 상식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
그렇기에 지금 자신들이 있는 세계가 자신들이 살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옳다고 티격태격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동굴에서 나와 제대로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으로 주변을 확인할 수 있게 된 사람.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대충 50~60명 정도 되는 인원수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 되는 인원수의 사람들이 서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말싸움을 하기 시작하자 당연히 소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 정도 소란이 일어나는데 근처에서 딱히 반응이 없어? 주변에 사람이 있거나 하지는 않는 건가.’
못해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소란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 안에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인기척을 없다.
그 사실을 파악한 공선자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적어도 우연이 주변을 지나가던 이쪽 세계의 원주민들에게 목격되어 수상한 집단 취급을 받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기에 공선자는 일단 소나타라는 이름의 도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렇게까지 큰 소동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 도시로 이동하는 시간 동안은 적어도 차분하게 다시금 자신만의 고찰에 빠질 시간이 생겼다는 이야기.
까놓고 말해서 지금 주변에서 일어나는 말싸움으로 인한 소란은 공선자에게 완전히 남의 일이었으니깐 말이다.
그들이 말싸움을 하는 화제는 도시에 도착한다고 해도 도시 내부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없을 것이다, 라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공선자처럼 적어도 현대 이상으로 문명이 발전된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나라에 입국하거나 출국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도시에 들어가는데 무슨 신분을 조사하느냐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즉, 도착하기만 하면 도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판타지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마도 중세시대 정도로 밖에 문명이 발전되지 않는 세계의 사람들은 도시에 들어가는데 신분을 조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는 것.
그리고 신분을 조사하는 만큼 단체로 기억상실이 걸린 자신들은 수상한 사람들 취급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공선자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 문명이 발전했다고 하기에는 자신이 살던 세계와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청정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즉, 하나의 행성을 뒤덮을 수준의 규모로 매연을 발생시킬 수준의 문명이 발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 가능성이 틀렸을 확률도 낮지는 않았다. 공선자가 지닌 상식만으로 생각하기에는 당장 그가 처한 상황 자체가 이미 그의 상식을 아득히 웃도는 미지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니까.
허나, 공선자의 추측이 틀렸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럴 것이 공선자는 도시에 도착하여 도시에 들어갈 수 있던지, 들어갈 수 없던지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시에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좋지만 도시에 들어갈 수 없어도 아마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을 거야. 그러면 그쪽으로 이동하며 돼. ……정 안 되면 며칠 정도의 노숙은 문제없어.’
공선자가 과거에 겪었던 경험과 비교하자면 노숙을 하는 것 정도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는 일단 서바이벌을 위한 지식도 상당히 풍부했으니까.
누군가를 암살하기 위해서 거지로 위장해서 몇 주 가까이를 길바닥에서 지내본 적도 있었다.
오히려 거지변장에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행동이 제약되었던 그때보다 사정이 낫다면 낫지 않을까?
뭐, 그것도 공선자가 직접 경험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약간의 어폐가 존재했다. 실제로 노숙을 해야 한다고 해도 생각했던 것처럼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고 말이다.
그렇지만 생각할 수 있는 나쁜 상황 중 하나에 대응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공선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집중해야 하는 곳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깐 말이다.
-경우의 수를 몇 번이고 읽고 최악의 경우를 수십 번은 상정해서 대비를 하는 것은 좋아.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그러니까 뭐든지 자신의 한계를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야. 아무리 예측 가능한 최악의 상황이 수십 개라고 해도 그 모든 최악의 상황에 대응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억지로 대응하려고 하지 마. 하나도 아니고 수십 개의 경우의 수를 상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 가지 대응할 수 없는 경우의 수에 시간을 소비하다가는 대응할 수 있는 다른 경우에 수에도 대응하지 못하게 돼.
……그러니까 수십 개의 경우의 수를 떠올리고 그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해당 경우에 수에 맞춰서 대응방법이 딱 떠오르는 경우만 대응책을 세워둬라.
설령 예측할 수 있다고 해도 곧바로 대응책이 안 떠오르는 경우의 수가 운이 나쁘게 들이닥친다면 그건 뭐, 임기응변으로 어떻게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공선자의 반신이 그를 대신해서 세계와 싸워줬을 때 해주었던 이야기였다. 무려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세계를 적으로 돌렸다.
당연히 공선자에게 아군은 없고 적군만 있는 상태. 거기에 경우의 수를 짜낼 머리도 적이 훨씬 많으니 상대는 그야말로 공선자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각종 수단으로 그를 막으려고 들었다.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공선자 역시 결국에는 스스로 떠올릴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한계까지 짜내어 수 싸움에 대응해야 했다.
그런 경험을 걸친 공선자의 반신이기에 할 수 있던 이야기. 상대의 수를 최대한 읽고 그에 맞춰서 대응책을 짜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법.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운이 좋게 상대가 써온 수단이 자신의 예측에 포함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었다. 또 그에 맞춰 자신이 대응책을 준비할 수 있었던 때도 분명히 존재했다.
허나, 노록치 않았던 현실은 그보다 더 많이 안 좋은 쪽으로 굴러갔다. 애초에 공선자가 상대의 수를 예측하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고, 예측했더라도 그에 대한 대응책을 도저히 준비할 수 없는 경우도 존재했다.
그나마 후자는 나았다. 예측이라고 했으니 허를 찔린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기민하게 대처하여 임기응변을 통해서 활로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전자는 그야말로 허를 찔린 것. 공선자의 악운이 워낙 강했기에 살아남아 목적을 이룬 것이지 본래라면 그대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어 스러졌을 위기상황이었다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