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제 01계-챕터 01: 에볼루션 시스템
그것이 현실이었다. 자신이 상정했던 최악.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었던 밑바닥이라 생각했는데 더 지하가, 지옥이, 심연이 존재했던 경우는 몇 번이고 발생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예측하지 못했던 경우도, 설령 예측했다고 해도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받아들여야 했다.
물론 그저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되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고도 최선을 다해 발버둥치기 위한 전제라는 의미였으니까.
요컨대 그거다.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때에 한다.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한다. 여유가 있다면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말이다.
물론 보통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없겠지만 말이다. 단, 그게 여유가 있음에도 할 수 없다고 그저 포기하라는 소리는 결코 아니라는 의미.
‘내, 내가 신도 아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어. 애초에 지금 내가 있는 세계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도 없고…….’
그런 의미에서 공선자가 이 자리에 있는 반 백 명에 가까운 다른 사람들처럼 이대로 도시로 가야 하네, 아니, 어차피 가도 못 들어가니까 우선은 더 정보를 모아야 하네, 고민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어느 쪽이 더 올바른 판단인지 제대로 판단할 정보가 없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공선자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거의 비등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최악의 경우는 비슷하고, 또 그에 대응할 수단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면 그쪽으로 고민하느라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낭비다.
오히려 고민하는 것으로 무엇인가 새로운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큰 쪽으로 머리를 쓰는 것이 시간을 유효하게 활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터.
‘……단지, 상상할 수 최악의 가능성에 내가 진짜로 생각했던 대로 대응할 수 있을까는 자신이 없지만.’
그러면 뭐 어쩌겠는가? 결국, 공선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제대로 판별도 못 했다는 것뿐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올바른 판단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그냥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판단하지도 못했던 바보라는 이야기일 뿐이니까.
‘그러니 지금은 이 사람들이랑 같이 탁상공론을 하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야. 그보다는……, 그래, 역시 나한테 새롭게 갱신된 이 스트림 창에 대해서 파악하는 게 우선이야. 뭔가 지금 상황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기에 공선자는 어떻게 해서든 주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에는 신경을 끄고 새롭게 갱신된 스트림 창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선자가 그렇게 자신만이 다른 이들과는 다른 요소에 집중하고 있을 때 잠깐 동안 지속되는 소란을 지켜보면, 이제는 거의 이 집단의 리더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는 마초남이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만! 그만……!”
마초남의 외침에 또다시 조용해지는 이들. 제대로 빛이 비치는 지상으로 나와 마초남의 행색을 보다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이들은 더욱 마초남에게 거스르기 힘들다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괜히 마초남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디자인에는 별 신경을 쓰지도 않은 것인지 상당히 펑퍼짐한, 이 자리에 있는 이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전신이 근육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마초남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구현한 것 같은 튼실한 근육이 전신에서 꿈틀거리는 그런 남자였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에 따라서는 좀 징그럽다고 느껴질 정도의 근육들. 안 그대로 확실하게 180cm는 넘어 보이는 키가 근육들 때문에 더욱 크게 보여 한 2미터는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식하다는 느낌을 주기 십상이었는데 저 마초남은 동굴 내부에서부터 사람들을 이끌어서인지 그다지 무식하다는 느낌도 없었고 말이다.
오히려 확실히 카리스마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 그렇게까지 강한 카리스마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 기억을 잃은 사람들의 대표로 방향성 정도는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카리스마는 가지고 있었다.
“뭐가 되었던지 나는 도시로 가서 도시의 존재 유무 정도는 확인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생각을 해봐라. 우리는 아직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자신들이 어떤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정보를 얻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도시에 도착해서 그 도시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애초에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이 기억상실이고 지니고 있는 상식도 다른 것 같으니까.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지 전혀 판단할 수 없지. 그러니 도시에 도착해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지닌 상식 중에서 뭐가 올바른 것인지, 적어도 그 정도 정보는 얻자는 이야기다.”
확실히 도시에 도착하는 것으로 어느 분류의 사람들이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다가 괜히 신분조차 증명할 수 없는 수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서 감옥 같은 곳에 갇히게 된다면?”
“도망친다. 적어도 그를 통해서 ‘신분을 증명할 수 없으면 도시에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라는 정도는 손에 넣을 수 있고, 또 그렇게 주장하던 사람들의 상식이 올바르다는 정보도 없을 수 있으니깐 말이지. 무엇보다 ‘도시가 실존한다,’ 라는 정보 역시 손에 넣을 수 있어.”
“하지만 도망치지 못한다면?! 신분증명을 못 할 경우 잘못하다가는 노예가 될 수도 있다고?!”
“에잇! 노예가 되던지, 감옥에 갇히든지 뭐가 되었든지 죽지는 않지 않을 거 아니냐?! 이대로 길바닥에 계속 있다가는 잘못하면 그대로 객사할 수도 있다고?! 거기에 밤이 되면 어떤 위협이 또 발생할지도 모른단 말이다!”
공선자로서는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최악의 경우는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초남은 일단 도시로 가는 쪽이 더 낫다고 판단한 모양.
그리고 다른 이들 역시 마초남의 의견에 편승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일행들은 일단은 표지판에 따라서 도시로 가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는 것이었다.
한편, 공선자의 경우에는 자신에게 새롭게 갱신되는 스트림 창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어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저 그것을 따라가기 바쁜 상태였다.
‘……에볼루션 시스템이라는 걸로 추정되는 이건 현재의 내 상태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으윽……! 도, 도대체 나한테 뭘 집어넣은 거야?’
공선자에게만 갱신된 새로운 스트림 창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갈래: 서브 스트림.
-내용: 당신은 다른 챌린저들과 다르게 기억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가지고 있는 정보랑도 많고 메인 스트림의 보상에 해당하는 진명 역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이기에 메인 스트림을 달성한다고 해도 다른 이들과 비교했을 때 얻는 보상이 적을 수밖에 없겠죠. 그러니 공평성을 위한 퀘스트입니다. 도시, 소나타에 도착하기 전에 에볼루션 시스템에 대해서 스스로 파악하세요. 달성 시 공평성에 맞춰 줄어든 메인 스트림의 보상, 그리고 스트림을 클리어 한만큼의 수고가 더해진 보상을 드립니다.
-달성 조건: 에볼루션 시스템에 대한 80% 이상의 이해.
-난이도: 하
-보상: 칭호(너희는 이런 거 모르지?)
-변동률
⤷초기 변동률: 0%
⤷시간 경과에 따른 변동률: 10분당 50%의 변동률
대충 요약을 하자면 그거다. 기억을 지니고 있는 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가지고 있는 정보도 많으니 스스로 에볼루션 시스템에 대해서 파악해라.
그렇게 하면 공선자에게 거의 의미가 없는 메인 스트림의 보상을 바꾸어주겠다. 어떻게 보면 꽤나 공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요소.
하지만 동시에 공선자는 모종의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에볼루션 시스템이라는 녀석은 공선자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공선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내 두려워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공선자는 스스로의 머리를 흔들었다.
애초에 이 모든 원인으로 추정되는 에볼루션 시스템을 공선자에게 각인시킨 상대는 사람의 기억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신적인 존재.
그런 자가 공선자에게 억지로 각인시킨 것이 에볼루션 시스템인 만큼 하나하나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두려워하다가는 끝이 없었다.
그렇기에 공선자는 어떻게 해서든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전부 쥐어 짜내서 자신의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그의 얄팍한 정신이 무너져내릴 것 같았으니까. 어떤 의미로는 현실도피라고도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지금의 공선자의 정신을 그 현실도피조차 스스로의 정신을 지켜주는 하나의 방파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자. 보상인 칭호…….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메인 스트림이라는 것을 통해서 주는 보상의 대신에 가까운 만큼 적어도 나한테 해가 되지는 않겠지.’
무엇보다 보상은 둘째 치고 공선자 역시 에볼루션 시스템이 무엇인지 상세히 파악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니 사실 이 서브 스트림이라는 것이 시키지 않았어도 공선자는 그렇게 했을 터. 뭐가 되었든지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판단은 어떻게 보면 공선자가 너무 일을 쉽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해를 끼칠 수 있었다면 진작 끼쳤을 터.
그렇지 않을 것을 보면 단순히 공선자가 지레짐작을 할 뿐인 것도 아니기는 했다. 지레짐작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지레짐작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공선자는 또다시 홀로 에볼루션 시스템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는 것이었다. 마초남에 의해서 어떻게든 의견이 하나로 모인 사람들은 일단 표지판을 통해 알 수 있었던 소나타라는 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공선자 역시 그 무리에 섞여서 그들과 함께 이동했다. 하지만 그들이 이동하면서도 주의 깊게 주변을 살피거나 혹은 바로 옆의 다른 이들과 서로 의견을 나누는 것과 다르게 공선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조용히 걷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공선자에게 눈길을 주는 이들은 없었다. 정신을 다른 곳에 팔려 있다고 해도 몸에 밴 습관은 자연스럽게 공선자를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으니까.
그것은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기척을 희미하게 만들어 같이 있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한다, 라는 의미로 녹아들었다는 것이다.
바로 옆에 있어도 의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척이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쪽이 부담스럽다.
혹시라도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옆으로 움직였는데 거기에 누가 있으면 놀라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옆에 사람이 있다는 수준의 기척을 흘렸다. 단지, 그것에 결코 흥미를 갖지 않도록 오로지 이상하지 않게 생각할 수준의 기척만을 흘린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옆에 누군가가 있지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신경 쓰지 않게 만드는 수법.
첩보 영역에 극에 달한 공선자의 신체는 그가 의식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무리에 섞여 있음에도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거기에 있고, 또 그 사실을 알지만 사실은 거기에 없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상황. 그는 그런 모순된 결과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끌어내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이동하고 있었다.
‘……저건 아까 그 남자애. 이렇게 밝은 곳에서 보니까 뭐지?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가 있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윽?! 서, 설마 나보다 연상이었나?! 말하는 게 영락없이 연하여서 연하인 줄 알았는데?!’
물론 그런 공선자의 잠행도 완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의식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스스로 그럴 의도를 가지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애초부터 공선자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으면 그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소리.
그리고 이 무리에서 공선자를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두운 동굴에서 공선자와 대화를 나누었던 소녀밖에 없었다.
어두운 동굴이었다고 해도 대충 공선자의 인상착의를 알고 있던 소녀는 이동하다가 우연이 공선자를 확인할 순간 한눈에 그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소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지, 동굴에서 대화를 나누었을 때 가지게 된 인상보다 훨씬 나이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지만 말이다.
겉모습만 보면 자신과 동갑 정도로밖에 안 보였다. 하지만 두르고 있는 분위기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