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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화 〉제 01계-챕터 01: 에볼루션 시스템 (52/194)



〈 52화 〉제 01계-챕터 01: 에볼루션 시스템

그대로 끼어든 남자한테는 시선도 안 주고 옆에 있던 약도를 들도 길드를 나가버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 남자가 사라지자 끼어들었던 남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기억상실인 주제에 그야말로 별의별 인간군상이 다 있다고 한탄을 하며 그도 약도를 집어 들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싸움으로 판이 커질 것 같았던 소란은 다른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던 사이에 마무리가 되었다.

먼저 시비가 걸렸던 공선자가 틈이 보이는 순간 재빨리 필요한 물건을 손에 들고 스리슬쩍 그 자리에서 이탈에 해버리는 것으로 말이다.

‘휴우……. 빠, 빠져나온 건가? 그 사람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피할 수 있는 일은 기회가 있을 때 피하는 게 최선이야.’

자신이 운이 나쁜 타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어지간히도 악운이 따르는 타입 같았다.

설마 하니 그런 타입에게 시비가 걸릴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으니깐 말이다. 그래도 그나마 그 타이밍에 끼어들어 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덕분에 공선자가 이렇게 필요했던 약도를 슬쩍 들고 길드를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나 대신에 그 사람의 타겟이 된 사람한테는 미안한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지만 말이야.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려면. 잘못하다가는 그 사람한테 붙잡힌 상태로 쓰려져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말했다시피 현재 공선자의 정신상태는 그야말로 한계까지 몰려 있었다. 당장 뇌가 지끈거리는 것이 뇌세포 하나하나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공선자는 최대한 빠르게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나중 일은 적어도 어느 정도 정신을 회복하고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인 뒤에나 생각할 수 있다는 소리.

그렇기에 기회가 생긴 순간 잽싸게 도망친 것이었다. 시비를 걸던 남자와 끼어들었던 남자가 보기에는 뭐, 이런 쓰레기가 다 있어? 라는 느낌일지도 몰랐다.

확실히 공선자는 쓰레기였다. 그 사실은 공선자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복수를 위해서 자신과 함께 세계를 멸망시켰던 이가 쓰레기가 아니면 뭐겠는가?

그렇기에 공선자는 자기를 위한 일이라면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상황. 이미 스스로를 위해서 세계를 멸망시켰다.

이제 와서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고 자신이 해결할 수도 없는 일에 끼어드는 것은 단순한 오만이며 위선이었다.

그렇기에 시비를 걸었던 남자를 끼어든 사람에게 떠넘기듯이 도망쳐 버렸다는 사실에 미안해하면서도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전력을 다해서 할 뿐이었으니깐 말이다. 후회를 할 여유도 없었고, 여유가 있다고 해도 후회를 해서는 안 되었다.

‘……나, 진짜로 살아있구나. 그리고 이곳은 정말로 다른 세계구나.’

두 남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 약도를 가지고 길드를 빠져나온 공선자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고작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다. 아니, 공선자의 시점에서만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세계를 자신의 자살에 끌어들이는 것으로 복수를 달성하며 죽었다. 아니,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초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 시간이 지난 뒤 눈을 뜨니 천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천사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반항했다. 그로 인해서 자신은 죽을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그 뒤 자신의 반신을 자신의 지키기 위해서 희생했다.

여기까지 공선자의 입장에서는 1시간도 지나지 않는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후 정신이 무너진 공선자의 정신이 회복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실제로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만이 흘렀겠지만 공선자에게는 억겁과 같은 시간이었다. 단지, 공선자 본인도 그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정신을 되찾았을 때는 동굴이었다. 동굴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 역시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마치 며칠에 걸쳐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 같지만 실제로는 2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에 모든 것을 벌어진 것이었다.

그래, 고작해야 2시간. 그 시간 만에 공선자는 어느새 자신이 한평생을 살아왔던 인생과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었다.

세계가 달랐다. 당연히 환경도 달랐다. 무엇보다 공선자가 서 있는 입장도 달랐다. 그는 더 이상 첩보계의 전설이었던 코드네임 타임룰러도, 최악의 단일 테러리스트인 타임룰러도 아니었다.

그저 공선자로서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우두커니 존재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렇게 소원하던 자유를, 행복한 삶은 손에 넣은 것도 아니었다.

입장을 다르지만 아직도 누군가의 장기 말로서 존재했다. 그렇게 살아가야만 했다. 고작 몇 시간 만에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격변했다.

……솔직히 정말로 고작 몇 시간만 지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죽었다가 천사에게 소생되기 전에, 또 천사로 인해서 이쪽 세계로 넘어오기 전에 공선자는 정신을 잃었다.

요컨대 그가 정신을 잃은 시간 동안 현실의 절대적인 시간 기준이 얼마나 흘렀는지 공선자는 알 수 없었다.

거기에 공선자 자신의 상대적인 시간 역시 뒤죽박죽이었다. 붕괴된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정신세계에서 가속된 시간을 보냈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1분이 공선자에게는 몇 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현실에서는 무려 1년이 지났음에도 자신에게는 1초밖에 되지 않는 시간. 반대로 자신에게는 몇 년임에도 현실에서는 1초밖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시간이 공선자가 이쪽 세계에서 정신을 차리기 전에 몇 번이고 산재해 있었다는 이야기.

그렇기에 정확하게 얼마나의 시간이 지난 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무너졌던 정신을 이어붙인 지금의 공선자에게는 2시간 만에 자신과 자신을 주변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가 다시금 재구축 되었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정작 지금의 자신은 결국에는 누군가의 장기 말이었다. 근본은 다르다고 해도 누군가의 의도에 놀아나야 한다는 사실을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가야 해.”

그 사실이 홀로 모험가 길드를 나서는 순간 피부에 와 닿았다. 눈앞에서 펼쳐진, 도저히 자신이 살아가던 세계에서는 볼 수 없었을 터인 광경이 거대한 압박감이 되어 공선자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살아남아야 해. 무슨 수를 써서도 살아남아야 해. 난 절대로……, 절대로 죽어서는 안 돼.”

살고 싶어서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 죽고 싶지 않아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살아가야 한다는 의무감에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 의무감이 공선자를 억지로 움직이게 했다.

눈앞에 펼쳐진, 미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에 발을 들이밀게 만들었다. 구역질이 났지만, 당장에라도 엎드려서 위에 들어있는 것을 전부 비워내고 싶게 만들었지만 움직이게 만들었다.

“흠, 이번 사냥은 영 느낌이 좋지 않은데. 사냥 자체는 무난하게 끝났는데 어째 돈이 안 된다는 느낌이야.”

“그야 조금 있으면 넘쳐나는 시기잖아? 이 시기에는 자연적으로 몬스터 소재의 시가가 내려간다고. 물가에 변동이 없는 건 마정석 정도일 거라고?”

“젠장, 마정석은 던전에서만 구할 수 있는 거잖아? 우리처럼 던전에 입장할 수 없는 모험가들은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래도 용병들보다는 낫잖아? 그쪽은 몇 년째 큰 전쟁이 없어서 완전히 일감이 바닥을 친다는 모양이니깐 말이야.”

“하! 낫기는, 용병들이 전쟁 없을 때 놀고먹는 거 봤냐? 그 녀석들, 대충 절반 이상이 모험가랑 겸업하잖아? 평소에는 모험가로 돈을 벌고 전쟁이 날 때만 용병질 하는 녀석들이 태반이구만.”

“뭐, 그래도 그런 녀석들은 모험가로서 활동에 어느 정도 제약이 있잖아? 기본적으로 모험가는 사람을 상대로 칼 휘두르는 녀석들을 혐오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니깐 말이지. 모험가 나름의 긍지라는 거지.”

현대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복장을 한 상태로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 공선자는 걸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정보를 모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완전히 알 수 없는 세계에 홀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눈앞에 흐릿해질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참으며 걷고 걸었다.

길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만들어진 약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여관이 어디쯤에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을 수준으로 제작된 약도였다.

무엇보다 길드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장소에 있었다. 때문에 공선자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도 어떻게든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명이 오기 시작하니까 차례차례 찾아오는군. 복장을 보아하니 방금 전에 온 녀석들처럼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님이 스카우트를 해왔다던 촌놈 중 하나가 맞겠지? 자, 여기서 열쇠 가지고 가라. 오늘부터 일주일간 네가 사용하게 될 방의 열쇠다.”

여관……이라고 해도 다른 건물들과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겉모습만 보자면 여관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여러 사람이 숙박하는 것을 전제로 했기에 상당한 크기의 건물이기는 했지만 해당 여관이 있는 위치가 특이한 것인지 비슷한 크기의 건물들이 여럿 보였다.

그렇다고 건축 양식에서 차이가 나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간판이 존재했기에 간판에 적힌 이름을 통해서 공선자는 이 건물이 당분간 자신이 신세 지게 될 여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

……중세 시대의 건축 양식. 그러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중세시대와는 다르게 의외로 높은 건물이 여럿 보였다.

과학 기술만으로는 불가능한 높이. 어떻게 봐도 가장 튼튼해 보이는 자제가 벽돌을 상회하지 않는 지금의 문명으로 저 정도 높이를 쌓는 것은 불가능할 터.

그럼에도 그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는 것은 아마도 마법이라는 단어를 당연하다는 듯이 몇 번이고 언급했던 이 세계의 특징일 터.

공선자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역시 건축양식은 중세시대의 그것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현대였다면 어떻게 해도 위화감이 넘치는 모습을 하고 길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갑옷 차림에 각종 무기를 손에 들고 다닌다. 검에 활, 도끼에 메이스 등등. 설령 여기가 진짜 중세시대라고 해도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개인적으로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이들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화감이 없었다.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건물들의 건축 양식이, 도시에 흐르는 분위기가 그들은 전혀 위화감 없이 수용하고 있었다.

오히려 위화감이 넘치는 것은 공선자 한 명이었다. 그렇기에 공선자는 이 여관으로 걸어오며 더더욱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드는 것을 참아야 했다.

현대에 있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신만이 다른 이들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싫은 느낌.

하지만 이쪽 세계는 그것이 더욱더 심했다. 지구에서는 그나마 겉모습에서는 위화감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겉모습마저 위화감이 넘쳐났다. 중세 시대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 속의 중세 시대와는 꽤 차이가 있는 중세 시대.

차라리 진짜 중세 시대라면 조금이라도 나았을 터인데 그마저도 아니었다. 중세 시대에는 있을 수 없을 터인 높이의 건물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존재들.

……무엇보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은 강자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들 중에서는 이상하다는, 혹은 경계심이 깃든 시선을 공선자에게 힐끗힐끗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공선자는 여관에 도착한 그 순간에 더욱 더 피로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에라도 바닥에 쓰려질 것 같았다. 또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노인에게 피곤이 붙어나는 말투로 대답을 돌려주는 것이 한계였고 말이다.

“……열쇠는 아무거나 가져가도 되는 건가요?”

“그래, 어차피 방은 다 그게 그거니까 아무거나 가져가라고. 단, 추천하자면 높은 층의 방은 피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여관은 2층부터 방이 존재하고 한 층당 방이 20개씩, 총 5층으로 80개의 방이 존재해. 하지만 건물 프레임에 화재 방지를 위한 마법을 인챈트 하는 데에 내 전 재산을 전부 사용해서 엘리베이터가 없어.”

“……에, 엘리베이터?”

“호오? 엘리베이터를 모르는 걸 보니 어지간히 촌구석에서 살아왔나 보구먼? 엘리베이터라는 건 마법을 이용해서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게 해주는 아티팩트…….”

“아, 아니, 엘리베이터가 뭔지는 알아요. 그냥 그게 여기 있다는 게 신기해서…….”

‘정말로 마법이라는 게 존재하는 세계인 모양이네. 그것도 대중적으로 쓰일 수준으로 당연한 요소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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