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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화 〉제 01계-챕터 01: 에볼루션 시스템 (54/194)



〈 54화 〉제 01계-챕터 01: 에볼루션 시스템

허나, 어떤 세계는 그야말로 영겁의 세월을 걸쳐, 무한처럼 보이는 세월 끝에 끝을 맞이했다. 태어난 지 1초 만에 멸망한 세계, 시작된 지 수천억 년 만에 간신히 끝을 맞이한 세계.

또한 그 끝을 맞이하는 방식은 다양했다. 어떤 세계는 세계 그 자체가 자멸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돌변, 운이 나빴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떤 세계는 결코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단 1명의 존재에 의해서 멸망했다.

그리고 어떤 세계는 유토피아에 도달한 끝에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어 세계가 스스로 멸망을 선택했다.

그렇게 세계가 끝을 맞이하는 방식은 다양했다. 그 시기 역시 천차만별. 그러나 그렇게 끝을 맞이하는 세계 중에서 단연코 멸망을 맞이하는 것이 당연한 세계는 없으리라.

설령 그 세계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쌓여진 세계라고 해도 멸망이 정답이다, 라고는 결코 확신 담아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소리다.

누군가에게는 멸망하는 게 당연한 세계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누군가가 희생을 해서라도 이어져가는 것이 당연한 세계이기도 할 테니깐.

이것은 결코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세계도 결코 당연히 멸망해야만 했을 세계는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세계가 멸망하고, 또다시 시작되었다. 많은 세계가 비극을 낳고, 그렇게 낳아진 비극이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져 가는 길을 만들었다.

결코 멸망하는 게 당연했던 세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멸망하여 새로운 시작을 불러온다.

이것은 그저 세계를 구성하는 법칙에 불과했으며 그렇기에 멸망하는 게 당연한 세계가 아님에도 멸망해버린 세계는 단지 운이 나빴다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지금 또 하나의 세계가 ‘운이 나쁘게도’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결코 멸망하고는 결코 멸망할 요소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세계가 조용히 7개의 멸망의 불꽃에 감싸여 가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 있으면 윈터 대륙과 접선 되어 그 대륙과 연결되는 길이 열리는 시기였지?”

“그렇습니다, 로드시여. 그런데 그것을 어찌 물으시나이까? 혹여 제가 갑작스럽게 로드께 불린 것과 연관이 있으신지요?”

……그곳이 어느 장소인지는 정확하게 추측할 수 없었다. 그저 너무나도 사치스럽게 꾸며진 방이라는 묘사 외에는 그 어떤 묘사하고도 어울리지 않는 방이라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 사치라는 단어 그 자체를 구현해놓은 것 같은 장소에는 단 2명의 남녀만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큰 방이었다. 한 나라의 왕조차도 이렇게 넓은 공간을 독점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 방.

그 거대한 방이 구석구석 그야말로 하나하나가 초고가인 사치품들로 꾸며져 있는 것이었다. 애초에 방을 이루고 있는 벽의 재질과 벽을 꾸미기 위해서 사용된 벽화조차 결코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단순히 사치라는 것을 넘어서 각종 마법들이 인챈트 되어 있는 아티팩트들. 사치품들 역시 절반 이상이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각종 효능을 지키고 있는 아티팩트였다.

단언할 수 있었다. 이런 호사는 설령 하나라의 왕이라고 해도 누리기 어려웠다. 제국이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의 국가의 황제 정도가 누릴 수 있는 호사.

그리고 설령 황제라고 해도 신하들의 눈치가 보여서 이 정도 사치를 당당하게 저지를 수 없을 터였다.

대륙들 어딘가에는 확실히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존재를 알지 못하는 장소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치라는 개념을 그대로 옮겨놓은 방.

아마 이런 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세상 사람들은 세계 제일의 부호라는 호칭을 거리낌 없이 이 방의 주인에게 향할 것이 분명했다.

허나, 이 방의 주인인, 방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최고급의 소파에 몸을 누이고 있는 여인은 세계에 알려진 존재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제국의 황제조차 우습게 여길 정도로 호화롭기 그지없는 이 방은 분명히 존재함에도 세계 그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공간’이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굳이 질문의 의도를 너한테 설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뇨……. 그저 로드께서 생각하시는 바를 유추해 굳이 로드께서 그 존귀한 입을 움직이지 않아도 제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올린 질문이었습니다.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래, 심기가 불편했어. 분명히 전에도 이야기했을 텐데? 내 의도를 멋대로 떠보려고 하지 말라고. 난 누군가가 나한테 간섭하는 걸 매우 싫어하니깐 말이야.”

억지였다. 그저 자연스럽게 떠오른 의문에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눈앞의 여성은 자신에 대한 간섭이라고 단언하는 것이었다.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갑작스럽게 불려 온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거기에서 파생된 의문을 자연스럽게 입에 담았을 뿐인, 어떻게 보면 대화의 캐치볼을 이어가기 위해서 선택한 화제였다.

그러나 그것을 눈앞의 여인은 간섭이라 일축하며 조금이라도 말대답을 하면 결코 자신의 눈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남자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시선을 보내오는 것이었다.

무릎을 꿇고 깊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음에도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는 여자의 시선을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남자가 굳이 시각에 의지하지 않아도 주변의 상황을 살피는 게 어렵지 않을 정도의 경지에 도달한 전사였기 때문이며, 동시에 눈앞의 여성의 시선이 단순히 ‘시선’이라는 단어로 그치는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시선 자체에 힘이 담겨져 있었다. 매우 강렬한 의사가 시선을 매개로 자신에게 전해져오는 것을 중년 남자는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눈앞의 여성이, 자신의 주인이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것도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은.

중년인은 제대로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눈앞의 여성에게 있어서 얼마나 커다란 전력인지를, 허나, 그러면서도 눈앞의 여성이 누군가의 간섭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설령 거대한 전력이라고 해도 수틀리면 얼마든지 쳐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자신은 거대한 전력이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전력은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수준의 경지에 도달한 전사는 눈앞의 여성의 휘하에 10이 넘도록 존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눈앞의 여성이 하고자 한다면 전 대륙들을 뒤져서라도 어떻게든 자신을 대신할 새로운 전력을 찾아내 자신의 휘하로 둘 것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남자는 더 이상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설령 눈앞의 여자가 하는 이야기가 억지에 가깝다고 해도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자신은 그저 눈앞의 여성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남자의 반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여성이 혀를 차며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억지였네. 응, 억지였어. 오늘 아침부터 기분이 더러워서 나도 모르게 화풀이를 해버렸어. 하지만 늘 그랬듯이 사과하지는 않을 거야. 그냥 받아들여.”

“당연합니다. 저는 당신의 소유물. 로드께서 원하신다면 단순한 화풀이로 망가트려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아까운 짓은 안 해. 여유가 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여유가 없을 때에는 나도 할 수 있는 한 절약을 하는 타입이니깐 말이야.”

그러면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노골적인 살기를 담아 자신을 노려보았단 말인가? 라고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았던 딴죽을 중년인은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것이었다.

설령 눈앞의 여성이 원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수 있다고 해도 역시 개죽음은 사양하고 싶은 게 본능 아닌가?

그런 이유로 자신도 모르게 치솟은 딴죽은 남자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억누르고 있을 때 여성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부서질 거면 좀 더 의미 있게 사용되고서 부서져. 가장 좋은 건 부서지지 않고 계속해서 사용되는 거지만 말이야. 그러니 조심해줘. 아깝게 고작 화풀이 따위로 널 부수고 싶지는 않으니까. 계속해서 오래오래 사용하고 싶거든.”

“얼마든지……. 저는 그를 위해서 여기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저 담담하게 감정을 죽이고 도구로서 여성의 말을 따를 뿐. 그것이 지금 여성의 눈앞에 있는 남자의 존재 이유였으니 말이었다.

“좋아. 그러면 내가 널 부른 이유를 설명해줄게. 당연한 이야기지만 널 쓸 때가 생겨서 그래.”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을 불렀을 리가 없을 테니까. 밤 상대를 위해서 불렀다?

아직 대낮이었다. 물론 대낮이라고 해도 으챠으챠를 하지 말란 법은 없겠지만 남자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눈앞의 여성의 취향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애초에 눈앞의 여성은 성욕이 그렇게 강한 편도 아니었다.

아예 그런 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일에 힘을 쏟고 있기에 남자를 부르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하고 싶어지는 날에 취향이 아닌 자신을 부른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성은 남자에게 무장을 하고 오라고 했다.

때문에 남자는 자신이 그녀를 위해서 ‘무기’로서 사용되기 위해 불렸다는 확신이 존재했던 것.

단지, 어떤 식으로 사용될지는 몰랐다. 그저 ‘무기’로서 사용될 뿐, 그 무기가 누군가를 베기 위해서 사용될지는 예측할 수 없었던 것.

어쩌면 사람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베기 위해서 사용될 수도 있었고 말이다. 그저 조심스럽게 추측하자면 아마 여성의 기분이 매우 언짢아 보이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

“윈터 대륙. 윈터 대륙으로 넘어가서 사람 한 명을 죽이도록. ……네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자를 찾아서 죽여.”

“알겠습니다. 그자의 이름과 인상착의를 알려주십시오.”

역시 자신은 무기로써 쓰이기 위해서 불려 왔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남자는 지체 없이 여자에게, 자신의 주인에게 묻는 것이었다.

자신이 누구를 향해서 휘둘러지면 되는 것인지를. 그러나 곧바로 들려올 것이라 예상했던 대답과 다르게 여성은 잠깐 동안 침묵하는 것이었다.

“…….”

“……강한 자입니까?”

그런 여성의 침묵이 어떤 의미인지 조심스럽게 해석한 남자가 묻자 여자가 혀를 차며 소파에 눕혀놓았던 몸을 일으키며 말하는 것이었다.

“……몰라, 단지, 약하지는 않겠지.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는 약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로드시여……?”

남자는 자신의 주인이 무엇은 이야기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남자를 내려다보며 여성은 어딘가 분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과욕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봐.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한테만은 결코 과욕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어. 그야 나는 이미 예전부터 과욕이라는 개념조차 작아 보일 정도의 욕망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과욕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했나 봐.”

“로, 로드시여……?! 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설마 자신의 주인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주인이 자책에 가까운 말을 꺼낼 줄은 남자는 상상도 못했다.

항상 탐욕스러웠던 그녀였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고 해도 그녀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을 것 같았고, 그렇기에 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멈추지 않고 달려왔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저렇게 회한이 담긴 목소리를 낼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남자가 자신도 모르게 비명에 가깝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

평소였다면 자신의 허락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는 사실에 여성이 짜증을 내며 남자의 머리를 짓밟았을 것이다.

허나, 여성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눈앞의 남자를 부른 이유를 보다 명확하게 설명해줄 뿐이었다.

“얼굴은 몰라, 뭐하는 녀석인지도 몰라, 지금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아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이름뿐. 아니, 그게 이름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명확한 것은 두 가지야. 그자가 ‘피’라고 불리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존재가 윈터 대륙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뿐.”

“……도, 도대체 그 자가 누구이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 애초에 누구인지조차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자를 어찌하여?”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묻는 남자에게 여자는 그 고운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자신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를 어떻게든 찾아내 죽이려고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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