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제 01계-챕터 01: 에볼루션 시스템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조차 떠올리기 매우 힘든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절대적인 신뢰를 주는 것도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의심만 해서든 그 무엇도 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소리.
어떤 일이든지 적정 수준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공선자는 일단 당장은 스테이터스 창의 내용을 믿기로 한 것.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감정이 남아있었다면 어쩌면 끝까지 불안감에 스테이터스 창의 내용을 믿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킬의 영향으로 감정이 억제되고 있는 공선자는 오로지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현재 자신을 위해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고 그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선택지를 취한다. 이상적인 선택.
허나, 많은 사람들이 감정에서 비롯된 충돌에 의해서 그것이 이상적임을 알고 있음에도 실행할 수 없는 선택들.
그러나 지금의 공선자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의 그는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을 명확하게 판단한 뒤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역시 스킬에 의한 감정제어는 현재의 공선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요소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다음에 살펴볼 건 스킬 창인가. 아니, 그전에 일단 살펴보기 시작한 스테이터스 창을 전부 살펴본 뒤에.’
자신의 현재 상태가 모종의 스킬에 의한 현상이라고 한다면 그 부분은 보다 상세하게 살피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었다.
일단 현재는 좋은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무려 정신에 간섭하는 스킬인 것이다. 훗날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알 수가 없는 것.
그런 만큼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빠르게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스킬이 어떤 스킬인지 확인하고 혹시라도 존재할지 모르는 부작용을 파악하고 대비할 필요성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허나, 공선자는 일단 스테이터스 창을 확인하기 시작한 만큼 일단은 스테이터스 창을 보다 확실하게 파악한 뒤에 넘어가기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불안감이 존재하지 않는 지금의 그는 이성적으로 지금 살펴보고 있는 스테이터스 창을 넘기고 스킬 창을 먼저 살펴본다고 해도 무엇인가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
길어봤자 몇 십 분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안에 갑작스럽게 부작용이 터질 확률은 낮을 것이라 판단한 것.
본래의 그라면 그 낮은 가능성에도 쫄아서 제일 먼저 스킬을 확인하려고 했겠지만 지금의 그에게 그런 공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단은 조사하던 것을 마저 끝낸다는 판단을 내렸다. 지금 조사를 중지하고 다음 시스템 창을 조사하러 가봤자 결국에는 나중에 다시금 스테이터스 창을 살펴보러 올 수밖에 없는 것.
때문에 차라리 한창 살펴보고 있는 스테이터스 창에 대해서 그대로 살펴보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그는 판단하는 것이었다.
흐름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사고의 연쇄라고 해야 할까? 연쇄적으로 같은 분야를 조사하면 얻게 된 지식이 연쇄반응을 일으켜서보다 뒤쪽의 내용을 쉽게 이해시켜주고 앞쪽의 내용 역시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선자의 주관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보의 습득이라는 과정 자체가 주관으로 이루어진 정신적인 활동인 만큼 이런 주관적인 생각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사람마다 맞는 공부법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공선자는 일단 스테이터스 창 다음으로 스킬 창을 살펴보는 것을 결정했을지언정 현재 조사하고 있는 스테이터스 창을 그대로 닫지는 않았다.
‘여기서 도움말 창을 열면……. 좋아. 각각의 항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출현하는군. 이 도움말 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정보가 스테이터스 창에 대한 객관적인 지표라고 할 수 있겠지.’
도움말 창을 스테이터스 창과 함께 여는 것으로 연동되어 각각의 스테이터스 창의 항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줄줄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스테이터스 항목은 각각 진명, 나이, 레벨, 직업, 칭호, 성향, 신체상태, 오라, 체력, 피로도, 스텟, 추가 스텟과 마지막으로 스텟 포인트가 존재했다.
그리고 도움말 창을 여는 순간 각각의 항목에 대한 설명이 스테이터스 창 위로 자세하게 표시되기 시작하는 것.
공선자의 진명은 공선자였다. 진명이란 말 그대로 진짜 이름. 해당 존재를 의미하는 진정한 이름이라는 소리.
설명을 보아하니 이 진명이라는 것은 꽤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모양. 진명을 알려주는 것으로 상대에게 복종해야 한다, 라는 식의 어마어마한 중요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진명은 그 개체의 가장 명확한 ‘구분 요소’에 해당하기에 진명이 알려지면 진명을 통해서 이능적인 영향을 크게 받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 첨부되어 있었다.
요컨대 진명이라는 것은 공선자라는 과격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알려주는 좌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것.
공선자라는 진명이 공선자라는 존재의 좌표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진명은 되도록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다는 모양.
물론 이것도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것 같았다. 진명이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하는 것은 계약과 관련된 이능에서인데, 이때 대부분 계약분야의 이능은 상호동의를 기본전제로 잡는다.
그럴 것이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이능에 대한 저항력의 영향을 받아 애초에 계약 자체를 맺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기 때문이라는 모양.
무엇보다 한쪽의 의사만으로 강제적으로 맺는 계약은 이미 계약이 아니었다. 단순한 기아스(제약), 혹은 커스(저주)라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그런 분야는 정말로 드문 경우가 아니라면 진명을 알고 있나, 모르고 있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 같았다.
솔직히 여기까지 설명을 읽어도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능에 대한 지식이 크게 존재하지 않는 공선자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능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은 잘해봐야 초능력에 한정되어 있었으니깐 말이다.
허나, 현재 그가 살아가야 할 세계는 보아하니 마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세계 같았다. 그렇다면 이 마법이 다름 아닌 이능의 영역에 존재하는 요소겠지.
그렇기에 공선자는 이능이라는 부분에 마법을 대입해서 해당 설명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마법적인 계약 같은 것을 맺을 때 서로가 진명을 사용하면 보다 계약의 강제성이 강화된다, 와 비슷한 이야기 아닌가?
거기에 마법 중에서도 진명을 통해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저주 같은 것도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고 말이다.
‘즉, 할 수 있으면 최대한 진명을 숨기는 게 좋다는 거네. 뭐, 보니까 진명이라는 건 대부분이 태어날 때 부모님에게 받는 이름으로 결정되는 모양이니까 대놓고 드러내고 다닌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큰 패널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
진명이 진정으로 큰 강제력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전제조건으로 ‘당사자의 의사’가 중요하게 작용된다는 것 같았다.
그럴 것이 아무리 진명을 통해서 이능의 효력을 강화시켜도 당사자의 이능에 대한 ‘저항력’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 저항력이라는 것은 내성 스텟과 영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공선자였다. 당장 자신도 10의 기본적인 내성을 가지고 있으니 평범한 사람들도 어느 정도 내성을 가지고 있을 터.
무엇보다 공선자는 스스로의 정신세계에 여러 번 진입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개인이 같은 ‘정신방벽’에 대해서 그 존재 유무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진명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충 진명을 어느 용도로 사용해야 할지도 말이다.
‘서로에게 신뢰를 보여줘야 할 중요한 계약 같은 것에 주로 쓰게 되겠군. 진명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다 확실하게 마법적인 계약의 강제력에 영향을 받게 될 테니 그 사실만으로 상대에게 신뢰를 줄 수 있어. 거기에 할 수 있다면 수고는 들겠지만 진명을 숨기는 쪽이 만약을 대비할 수도 있겠고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증명패에 가명을 적은 건 정답이었나.’
그때는 진명에 이런 요소가 숨어있을 줄은 몰랐지만 역시 함부로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히고 다니지 않는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절대적인 요소로서 작용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순간에 영향을 끼칠지 모를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애초에 그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그 외에도 진명의 기준, 진명의 변화, 진명에 대해 당사자가 모르거나 진명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들에 대한 설명도 존재하지만……, 당장은 중요한 점은 아니니까 대충 살펴보는 것으로 넘어가고…….’
요약을 하자면 진명의 기준은 해당 존재가 태어났을 때 타인이 주든지, 자신이 짓든지 가장 먼저 그 존재가 갖게 되는 고유명사이며 바꿀 수 없다.
거기에 당사자가 모를 경우도 존재하며 진명을 가지지 않은 자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소리. 예를 들자면 기억을 잃는다든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존재들이라던가 말이다.
‘진명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살펴보고 다음은……. 나이.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한다고 한다면 만 나이를 사용한다는 뜻이고……, 신체의 나이를 기준으로 잡는다고?’
애초에 나이라는 게 원래 신체의 나이를 기준으로 잡는 것 아닌가? 당연한 이야기를 다시금 설명해주는 도움말 란에 공선자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것은 마치 신체의 나이를 제외한 다른 나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았기 때문.
‘신체 나이를 제외한 다른 나이라고 한다며……, 정신적인 나이, 그런 것도 존재한다는 건가?’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한정된 이야기였기에 확실하게 말하기는 힘든 요소였다. 그저 그런 것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단은 머릿속에 넣어두는 것.
나이에 대해서는 대충 그 정도만 파악했다. 애초에 나이라는 개념은 딱히 더 설명할 것도 없는 상당히 단순한 개념이었으니깐 말이다.
신체 나이가 기준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의 복선이라는 느낌이 있었지만 그 외의 설명은 더 이상 적혀 있지 않으니 일단 넘어가는 것.
그렇다면 그다음으로 볼 것은 레벨에 해당했다. ……레벨. 스테이터스 창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고 확신에 가깝게 예측하고는 있었지만 설마 진짜로 레벨이라는 개념이 튀어나올 줄은 예상을 못 했다.
아니, 예측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했으니 예상을 못 했다는 말은 올바르지 않겠지. 요컨대 그런 것이다.
게임하면 필수불가결의 요소인 레벨인 만큼 분명히 있겠지! 라고 기대하는 이성, 그리고 아니, 현실적으로 그저 올리기만 해도 강해지는 요소인 레벨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잖아? 라고 생각하는 이성.
이 두 가지 이성 모두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는 소리. 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반신반의였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반신반의의 예측 중 정답으로 들어맞은 것은 믿는 쪽의 생각이었다. 스테이터스 창에는 확실하게 레벨이 존재했다. 그리고 현재 공선자의 레벨은…….
‘1, 이게 초기 레벨인 거겠지. 이 에볼루션 시스템을 각인 받은 뒤 단 한 번도 레벨이 올라갈 법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초기 레벨이 좀 더 높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을 터. 그럴 것이 현재의 공선자는 까놓고 말해서 어마어마한 ‘살업’을 축적해왔다.
에이전트로서 활동할 때 그의 손에 죽었던 이들의 숫자만 수백 단위가 될 터였다. 아니, 자칫하면 수천 단위가 될지도 모른다.
간접적으로는 더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최후에 세계의 멸망을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그때까지 죽었던 이들보다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죽였을 것이다.
그야 당시에는 세계 그 자체가 적이었다. 하루에 사람들의 목숨을 수십 명씩 빼앗는 것이 기본 단위였을 정도이니 할 말 다한 것 아닌가?
그렇기에 공선자는 그전의 자신의 저지른 살업이 흔히 말하는 레벨을 올리기 위한 ‘경험치’로 적립될 가능성을 고려해보았던 것.
하지만 레벨이 1인 것은 보아하니 에볼루션 시스템을 각인 받기 전에 쌓았던 살업을 경험치로 변화되거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본래의 공선자였다면 이런 사고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결코 할 수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감정이 완전히 억제되고 있는 지금의 공선자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의 공선자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요소’뿐.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살업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양분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완전히 감정이 배제된,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무를 행하는 기계와 같은 상태의 공선자인 것이었다.
‘하긴, 애초에 레벨을 올리는 수단이 무엇인가를 죽인다는 행위라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야. 거기에 레벨이라는 개념 자체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고도 확신할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