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제 01계-챕터 02: 의도치 않은 인연
흔히 약해 보이는 사람은 무시받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런 무시는 나중에 가서 ‘방심’으로 이어지기 마련.
과거 암살자이기도 한 공선자에게 있어서 상대방의 ‘방심’은 그 무엇보다 이용하기 쉬운 암살 요소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약자를 연기한다. 상대에게 자신이 약하다는 착각을 심어주어 방심을 이끌어낸 뒤 그 방심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가장 좋은 견본이 다름 아닌 감정을 제어하지 않을 때의 공선자라는 이야기. 누구나가 무시하고 얕볼 수 있는 사람.
스스로한테 그런 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게 조금 서글펐지만 사실이었다. 공선자의 반신이라면 모를까 공선자의 근본은 단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는 온실 속 화초와 다름없었으니까.
……아니, 그가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할 때 받았던 고통을 생각하면 온실 속 화초보다는 한 번도 실험 케이지에서 나와 본 적이 없는 실험용 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어느 쪽이 되었던지 결국 나약한 것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연기한다. 본래의 나약한 자신을.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는 것도 웃겼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더욱더 힘들 수도 있었다.
그야 여태까지 자연스럽게 하던 것은 이제는 의식해서 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말했다시피 감정이 제어되어 자신이 가진 경험 아닌 경험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공선자에게는 그 경험 아닌 경험이 존재했으니 말이다.
“다, 다른 분들은 없나요……?”
“그래, 굳이 물어볼 것도 없이 주의를 둘러보면 되잖아? 이 시간에 회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나뿐이야. 길드장이라면 맨 꼭대기 층에 있지만……, 네 녀석이 어지간히 중요한 손님이 아니면 내려올 일은 없을 테니깐 말이지.”
여하튼 그런 이유로 공선자는 본래의 자신을 연기했다. ……그러나 본래라면 굳이 지금 눈앞의 상대에게 자신을 얕보일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얕보이는 것은 상대의 방심을 이끌어낸다는 ‘장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세상은 등가교환이다. 장점이 있으면 당연히 단점도 있는 법. 그리고 장점은 어디까지나 상대를 ‘암살’해야 할 때만 소용이 있고 단점은 평소에 적용된다는 걸 생각한다면……, 눈앞의 상대를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굳이 얕보이기 위해서 연기를 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선자는 나약한 자신을 연기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애초에 앞에서 언급한 나약함의 ‘장점’인 ‘방심’은 상대가 진짜로 자신을 ‘나약하다고 생각했을 경우’에만 발생하는 장점인 것.
그런 만큼 평소에도 스스로가 나약해 보일 필요성이 존재했다. 그야 평소에는 강철도 씹어 먹을 녀석이 싸울 때만 약해지면 어디 방심을 하겠는가? 오히려 저 녀석 뭔가 숨기는 게 있다고 경계를 하지.
그리고 지금의 공선자는 철저하기 그지없는 타입이었다. 그런 만큼 철저하게 연기했다. 혹시라도 훗날 자신의 정보를 접하게 될 누군가와 싸우게 되더라도 상대가 ‘방심’할 수 있도록.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인 만큼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이렇게까지 공선자가 조심하는 이유는 현재 그의 상황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정보도 없고, 무력도 없다. 그런 만큼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 그렇기에 공선자는 일단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현재 길드 회관에서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내 인상이 험악해서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다고 해도 나하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거지.”
즉, 아무리 자기랑 이야기하기 싫어도 자기와 대화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
공선자가 스스로를 연기하여 겁을 잔뜩 먹은 표정을 한 상태로 다른 사람을 찾으니 자기하고 이야기하기 싫어한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조금 아니꼽다는 말투로 싫어도 길드에 용건이 있으면 지금은 자기하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고 반쯤 직설적으로 그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그, 그…….”
“하아, 그렇게 나랑 말하기 힘들면 그냥 돌아갔다가 아침에 오던가. 아침에는 상냥한 누님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훨씬 말하기 편할 거 아니야?”
그러나 공선자는 일단 다시 한 번 겁을 먹어 제대로 말하기 힘들어하는 연기를 했다. 그야 지금의 자신이 아닌 감정이 제어되지 않은 자신이었다면 그런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그러자 길드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카운터에 앉아 있던 남자는 그런 공선자의 연기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인지 공선자가 정말로 자신과 이야기하기 힘들어한다고 받아들인 모양.
그렇기에 일단 은근슬쩍 나중에 다시 올 것을 권하는 그였다. 그 역시도 자신을 무서워하는 공선자와 같은 사람과 대화해야 한다는 게 썩 달갑지는 않은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아, 아뇨……. 아, 아침까지 기다리기에는 조금 급해서…….”
“그런 그렇게 우물쭈물 거리지 말고 남자답게 그냥 빨리 용건이나 꺼내라고. 무슨 용건으로 이런 늦은 시간에 모험가 길드의 회관을 찾아온 거지? 역시 의뢰냐? 아무리 그래도 모험가로서 달성보고를 하러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계속해서 말을 더듬으며 우물쭈물하는 공선자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조금 목에 힘을 주어 묻는 상대의 말에 공선자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힘겹게, 정확히는 그렇게 연기하며 자신의 용건을 이야기했다.
“……그, 모, 모험가로서 알고 싶은 게 있다면 여기 와서 물어보라고 하잠이라는 사람이 이야기해서 이것저것 좀 무, 물어보려고 찾아왔는데요.”
“하잠? 길드장님? 뭐야? 너 길드장님이랑 아는 사이냐? 아니, 하지만 생긴 걸 보면 딱히 그렇지는 않아 보이는데……. 기다려 봐. 거기에 이 늦은 시각에 모험가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길드에 찾아왔다고? 무슨 이런 황당한 녀석이 다 있……. 아, 너 그 오늘 아침에 길드장님이 직접 스카우트해서 왔다는 그 녀석들 중 하나냐?”
공선자가 뭘 이야기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던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
하지만 이내 뭔가 떠오른 것이 있는지 공선자의 옷차림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더니 집히는 게 있다는 어조로 말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듣기는 했지. 우리 길드의 간판 아가씨한테 길드장님이 보너스 줄 테니까 어떤 녀석들을 얼마 동안 전적으로 지원하라고 명령했다던 이야기를 말이야. 너, 그 녀석들 중 하나구나? 어쩐지 입고 있는 차림새가 조금 특이하다 했다.”
“트, 특이한가요?”
“적어도 의뢰를 하러 오거나, 아니면 의뢰 달성을 보고하러 온 모험가들이 할 만한 차림은 아니지. 이런 밤중에 찾아온 사람이라면 더욱더 말이지. 하지만 살짝 낯이 익다 싶었더니 교대하면서 얼핏 들었던 대로의 차림새여서 그랬구만.”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남자가 또다시 무엇인가 떠올랐다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길드장님이 직접 스카우트 해왔다는 녀석들 중 한 명이 왜 이 시간에 길드를 찾아온 거냐?”
“어……, 저, 저기……. 방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모험가에 대해서 이것저것 여쭈고 싶어서 찾아왔는데요.”
공선자의 그와 같은 대답에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혀를 차더니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살짝 짜증스러운 어조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하씨……. 미안하지만 아침에 다시 와라. 간판 아가씨는 몰라도 나는 딱히 길드장한테 보너스 같은 거 받은 적 없거든? 같은 간판이기는 하지만 이쪽은 간판 아저씨라고. 야간에 야간 업무 처리 겸 회관 경비를 하는 간판 아저씨. 그러니까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주는 건 내 역할이 아니야.”
‘……간판 아가씨랑 간판 아저씨. 한 글자만 다른데 완전히 차원이 다른 차이를 보이는구먼.’
공선자가 자기 역할이 아니기에 귀찮은 일을 맡을 생각이 없다고 그를 향해 돌아가라고 손을 내젓는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며 내심 혀를 찼다.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기대하고 있던 눈앞의 남자는 딱히 공선자를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공선자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역시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이 시간에 모험가 길드에서 정보를 얻는 건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넉넉하게는 보너스를 줄 수는 없지만 이번에는 어느 정도 챙겨줄 테니까 설명해주는 게 어떠냐?”
“……길드장님?”
길드 회관 1층의 안에 존재하는 계단. 그 계단을 통해서 한 사람이 내려오며 사내에게 말을 건 것은 말이다.
방금 전 대화를 통해서 공선자는 예측대로 자신이 잠이든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공선자는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오늘 오전에 영문도 모른 채 이 도시에 도착한 자신을 이끌고 모험가 등록을 하게 해주었던 하잠의 얼굴을.
“무슨 일로 내려오셨냐고 묻고 싶습니다만……. 이 시각이라면 아마도 즐기려고 가시려던 모양이신 것 같군요?”
“그 외에 내가 이 시간에 내려올 이유가 어디 있겠나? 그러다가 우연히 보게 된 건데……. 확실히 그들 중에 이런 늦은 밤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군. 내 불찰이야. 그러니 그에 맞춰 너한테도 보너스를 줄 테니 내 체면을 생각해서 시간 좀 내주지?”
그리고 그렇게 떠올린 하잠의 얼굴과 지금 사내에게 공선자에게 설명을 해주라는 중년인의 얼굴을 똑같았다.
즉, 오전에 그를, 정확히는 챌린저들을 도와줬던 사람이 또다시 공선자를 도와주고 있는 것. 물론 그 이유는 오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신의 신탁이니 하는 것이 이유일 터였다.
허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공선자에게는 매우 감사한 도움이었다. 그렇기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하잠을 향해 고개를 숙였는데 그런 공선자의 감사인사에도 하잠은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상당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공선자를 살펴보고 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의 시선에 공선자가 안절부절못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야 어째서 그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겉과 다르게 냉정하기 그지없는 내심 역시 하잠의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
‘……그 엄청나던 살기가 전부 어디로 간 거지?’
그리고 하잠이 뚫어져라 공선자를 쳐다보는 이유는 다름 아닌, 오전까지만 해도 어마어마한 살기를 두르고 있던 공선자에게서 지금은 그 어떤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려 익스퍼트 최상급의 무력을 지닌 하잠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공선자가 아침의 그 살기를 완전히 갈무리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공선자가 두르고 있던 그 살기는 전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과연 신께서 내려보내신 자라는 건가. 내 이해를 완전히 벗어났군. 딱히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정말로 신기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신탁을 받은 하잠은 굳이 깊게 파고들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가 받았던 신탁이 너무나도 강력했다. 괜히 간섭했다가 신벌이라도 떨어질까 내심 두려웠기에 흥미는 어디까지나 흥미 수준으로 그치는 하잠.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기에는 역시나 흥미롭기 그지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엄청나던 살기도 그렇지만 당장 그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말이다.
하잠도, 당사자인 공선자도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공선자가 두르고 있던 살기는 그가 칭호를 통해서 멸업이라는 스킬을 얻는 순간 사라진 것이었다.
그럴 것이 멸업은 공선자가 자신이 살던 세계를 멸망시킨 ‘업’을 대가로서 습득한 스킬. 그러니 그 업의 증거였던 압도적인 살기 역시 사라지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하잠으로서는 깊게 파고들지는 못하지만 공선자에게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흥미가 우연히 길드의 간판 아저씨와 공선자가 대화하는 것을 보고 공선자를 도와주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길드장님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야……. 거기에 보너스까지 주신다면 저도 불만은 없죠.”
“그래, 그녀한테 주는 것보다는 적지만 앞으로 한동안 밤에 찾아오는 그들한테 전적으로 모험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조건하에 적절한 보너스를 주도록 하지.”
그와 같은 하자의 이야기에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그러면 불만은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서는 공선자에게 시선을 주고서 일단 자기한테 오라고 손짓을 해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