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제 01계-챕터 02: 의도치 않은 인연
처음 겪어보는 몬스터의 살기에 안색이 창백해지면서도, 사지가 떨리면서도, 호흡이 가빠지면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이들이 없었다.
자신들에게 쏘아지는 절대적인 죽이겠다는 의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합리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의지와 의지를 담은 미지의 기운.
그 기운이 흉기가 되어 그들의 정신을 좀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공선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하지 않았다.
쿠루미조차도 휘청거렸을지언정 어떻게든 균형을 되찾고 꿋꿋하게 그 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는 것.
“……비, 빌어먹을! 뭐야, 이거?! 모, 몸이 멋대로 떨리잖아?!”
심지어 고그의 경우에는 허세에 가깝다고 해도 쌈닭의 살기를 정면에서 맞으면서도 입을 움직일 수 있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그의 그 목소리에 신경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으로 간신히 쌈닭의 살기에 정신이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던 공선자는 뒤늦게 자신을 제외한 다른 파티원들이 전원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무리 소심하고 겁이 많다고 해도 공선자에게는 자신의 반신이 남겨준 경험이 존재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홀로 걸어온 궤적이 존재했다. 딱히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자부심을 부릴 생각인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공선자에게 그 경험을 자부심이 아닌, 악몽이나 다름없는 경험. 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싶은 최악의 과거.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최악의 과거로 인하여 쌓인 경험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공선자의 경험이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공선자조차 몬스터의 살기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풀려버린다.
그야 지구에서는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아니, 정확히는 ‘지금’의 공선자가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불합리한 살의가 담긴 기운이었으니깐 말이다.
공선자의 반신이라면 겪어본 적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겪어봤겠지. 초능력자들과 목숨을 걸고 싸웠을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아왔다는 경험이 있었으니까.
허나, 그것을 겪은 것은 어디까지나 공선자의 반신, 지금의 공선자는 그저 간접적으로 겪어봤던 기억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에는 그저 자신의 정신세계에서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을 뿐이었던 기억에 불과했다.
그러니 그런 기운을 몸을 직접 움직이기 시작하며 간접적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겪게 되어 극복하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지금의 공선자에게 이런 정신적인 공격을 이겨내면 경험을 없었으니까. 정신 방벽이 아무리 두꺼워도 피부를 통해서 느껴지는 감각은, 자신의 급소에 흉기가 들이 밀어진 것 같은 감각만큼은 막아 내주지 않았다.
살기란 분명히 존재하는 기운으로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현상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정신 방벽에 정신을 자극하는 현상을 막힌다고 해도 그 감각을 자극하는 현상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감각을 자극하는 현상에 의해서 초래된 공포는 타인에 의해서 초래된 공포가 아닌, 스스로가 만들어낸 공포. 그러니 정신 방벽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것.
스스로 만들어낸 공포는 스스로의 의지로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선자는 그것이 가능했던 ‘경험’이 없었다.
스스로 만들어낸 공포만큼은 공선자의 반신이었던 존재조차도 대신해줄 수 없었던 요소였으니까.
때문에 공선자는 극복할 수 없었다. 그저 겁에 질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두 번째이기에 첫 번째처럼 울고 불며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사람이라는 종족은 적응의 종족이라는 것일까? 이런 식이라면 어쩌면 공선자가 억지로 극복하려고 하지 않아도 나중에 가서는 그저 익숙해질지도 몰랐다.
허나, 적어도 그것이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고작 2번의 경험으로 익숙해질 만큼 공선자는 담이 큰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공선자와 다르게 분명히 몬스터의 살기에 마주하는 것이 첫 번째일 터인 쿠루미들이 버텨내고 있었다.
공선자처럼 바닥에 주저앉지 않고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물론 그들도 당장은 그게 한계였다.
고그가 이야기한 것처럼 살기에 의한 압박감에 신체는 물론 정신이 마비되어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깐 말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 있는 것이었다. 살기가 초래하는 스스로가 불러온 공포에 완전히 잠식당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제정신을 지키며 서 있는 것이었다.
……공선자는 어째서 그게 가능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불가능했던 것이, 처음 쌈닭과 마주쳤을 때 살기에 초래한 스스로의 공포에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렸던 그였다.
그렇기에 이 살기를 처음 마주했으면서도 공포에 떨면서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째서……?’
그렇기에 공선자는 순간적으로 살기에 의한 공포마저 잊고 그저 멍하니 자신의 파티원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겪는 살기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꾸역꾸역 움직이려고 시도하고 있는 파티원들을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생각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공선자는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니, 그것은 공선자가 찾아냈다기보다는 그의 ‘무의식의 영역’이 감각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답을 도출해냈다, 라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마치 ‘이게 정답일 것 같은데?’ 라는 느낌에 그것을 선택했더니 선택하는 족족 정답이었던 것처럼.
공선자의 무의식에 쌓여 있는 경험을 토대로 무의식이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공선자도 모르는 사이에 도출해내는 것이었다.
‘……생존 본능? 그게 나와 저 사람들의 차이?’
죽고 싶지 않다. 죽을 수 없다, 살고 싶다, 죽는 게 무섭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어찌 되었던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수렴되는 생존의 의지.
그래, 생존 본능. 그들은 그 생존 본능을 통해서 살기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살기는 그와 같은 감각을 그들에게 짙게, 그러면서도 가깝게 느끼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죽고 싶지 않았다. 아니,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넘어 강렬하게 생존을 갈망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야 그들은 챌린저들이었으니까. 무수히 많은 차원들 사이에서도 강렬하기 그지없게 생존을 갈망하던 이들을 모아둔 50명의 일원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이 가진 생존 본능, 아니, 생존에 대한 열망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욕망은 평범한 이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렬했다.
살아남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위대한 존재라고 불리던 이에게 선택받은 이들. 그런 그들이 가진 생존 본능이 살기라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떠오르게 만드는 현상에 반발 작용을 일으켜 거세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저항할 수 있었다. 본래라면 평범한 사람을 처음 노출되는 순간 자기 자신을 잃고 그저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말게 만드는 살기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를 잃지 않았다.
여기서 공포에 제정신을 잃게 된다면 죽는다, 라는 감각이 결코 죽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불러일으켜 어떻게든 제정신만은 유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죽음을 거부하는 본능이 살기에 저항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 그렇기에 그들은 바로 직전까지 공포에 자기 자신을 잃을 것 같은 기분에 주저앉아 버린 공선자와 다르게 꼿꼿이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선자는 공선자에게는 생존 본능이 없다는 것일까? 그럴 리가. 공선자 역시 챌린저였다.
그 역시 강렬한 생존 본능을, 생존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 허나, 그렇다면 어째서 공선자는 살기에 저항하지 못했던 것일까?
‘……지금의 나에게 생존은 열망이 아니야. 의무지.’
그래, 그런 것이었다. 공선자 역시 확실히 생존 열망을 가지고 있다. 아니, 가지고 있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럴 것이 공선자가 가지고 있던 생존 열망의 근원은 지금의 공선자가 아니라 ‘그의 반신’이었으니까.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공선자는 생존 열망 이상으로 ‘죽음에 대한 열망’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야 지옥 같은 인생을 살아온 것이었다. 그런 인생을 살아왔으니 이제는 죽어도 편해지고 싶다는 마음 또한 클 수밖에 없는 것.
생존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에 비례할 정도로 거대한 죽음에 대한 열망. 전자는 희망의 증표, 후자는 절망의 증표.
전자는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 후자는 살아있어도 계속해서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질 것이라는 절망.
공선자는 우습게도 모순되는 두 가지의 감정을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오히려 모순되기에 두 가지 감정은 하나가 커지면 다른 하나 역시 강해지기 마련이었다.
절망하면 절망할수록 희망을 갈구했다. 이것은 근본 인격은 물론 반신 인격 역시 마찬가지였던 이야기.
단지, 두 인격에 차이점이 있었다면 반신 인격은 희망을 직시했다는 점, 근본 인격은 절망을 직시했다는 점이었다.
두 인격 모두 같은 수준의 희망과 절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반신 인격은 희망을, 근본 인격을 절망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위대한 존재라는 녀석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반신 인격의 희망이었다. 살아가고 싶다고, 살아가서 자신의 ‘동생(근본 인격)’에게 살아서 좋았다는 말을 하게 만들고 싶었다는 희망.
그것이 바로 공선자라는 존재가 챌린저가 될 수 있었던 근본. 그리고 그렇기에 자신의 근본 인격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반신 인격이 천사의 질문에 ‘죽음’을 선택하기로 했던 것이기도 했다.
강렬한 생존 열망을 가지고 있기에 챌린저로서 선택된 이들은 99%가 기억을 잃는다고 해도 천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허나, 스스로가 희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최우선적으로 자신의 근본 인격을 따르는 반신 인격을 근본 인격의 ‘절망’을 이루어주기로 했던 것.
……그러나 결과적으로 반신 인격의 판단 미스로 그것은 실패해버렸고, 더불어 희망의 표면화던 반신 인격을 결국 근본 인격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소멸해버렸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설령 절망에 비례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표면화시키는 것이 절망인 근본 인격, 즉, 지금의 공선자뿐이라는 것이었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공선자가 프로아들과 함께 활동하기로 결정한 것만 보아도 이것은 공선자가 품고 있는, 자신도 사람답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의 편린’이었으니까.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공선자는 희망이 아닌 절망밖에 보고 있지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희망을, ‘어쩌면 나도 가능할지 몰라!’ 라는 희망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내가 가능할 리가 없잖아?’ 라는 절망에 휩쓸려 버리는 것이었다.
떠오른 희망은 곧바로 절망에 잠식당한다. 그리고 그 절망에 의해서 공선자는 생존보다 ‘죽음’을 바라게 된다. 그것이 지금의 공선자의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선자가 살아가고자 하는 것은 희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의무감.
자신에게 모든 희망을 넘기고 소멸해버린 자신의 근본 인격에 대한 채무. ‘결코, 죽고 싶지 않다!’ 라는 것이 아닌 ‘결코 죽을 수 없다!’ 라는 의무감의 발로.
……그렇기에 그것은 생존 열망이 될 수 없었다. 강렬한 의무감일지언정 생존에 대한 자기 자신의 열망은 아니었으니까.
‘……나한테도 희망은 있어. 하지만 난……, 도저히 그 희망을 받아들일 수 없어.’
기대를 하니까 배신을 당한다. 희망을 바라보는 순간 또다시 언젠가 배신을 당할 것 같아 불안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그야 그의 인생은 늘 희망에게 배신당해온 인생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희망을 믿기에는, 희망을 표면화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늦고 말았다.
그러니 공선자의 생존에 대한 감각은 열망이 아닌 의무감이었다. 그러니 다른 파티원들처럼 생존 열망을 통해서 살기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