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제 01계-챕터 02: 의도치 않은 인연
그렇기에 무의식적으로 예측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는 것. 이 이상 스스로를 부정하여 자괴감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애초에 이미 저질러버린 뒤이니 엎질러진 물인 것. 여기서 자신만을 생각해서 프로아들과 결별을 선언하면 아무리 그래도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공선자 자신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온기를 기대하고 그들과 함께 행동하기로 결정한 공선자이기에 도저히 그들에게 기대하고 있는 온기를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
그런 이유로 일단 밤의 자신에 관해서는 당장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지금의 공선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거기에 3시간 뒤라면 아직 해가 떠있는 상황일 테니 밤의 공선자가 되지는 않을 터. 새벽에 해가 뜨는 광경을 보고 아침의 공선자가 되었으니 해가 완전히 지면 그때 밤의 공선자가 되지 않을까 추측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들한테 도움을 받고 쌈닭을 사냥하러 간 지 아직 하루는커녕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황인 건가?’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자신이 세계를 멸망시키고 죽은 뒤 위대한 존재의 사자니 하는 천사들한테 자신의 반신 인격이 당하고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뜬지 아직 이틀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고작 그 이틀 동안 정말로 많은 일들을 겪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라는 괴물에 초능력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이능이었지만 마법이라는 이능이 실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본래라면 정신세계에서 지냈어야 했을 근본 인격이 처음으로 세상으로 나와 활동을 시작했고, 여기에 자신이 감정이 멋대로 제어되었다가 해제된다는, 평범한 사람은 평생 겪기 힘든 경험까지 겪었다.
무엇보다 에볼루션 시스템이라는 권능을 지니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을 터. 결국, 그의 감정제어도 에볼루션 시스템의 편린이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많은 변화를 공선자는 고작 하루하고 조금 더 지난 시간 만에 겪게 된 것. 그렇기에 체감으로는 그야말로 몇 주는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실제로는 고작해야 40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 도착했다. 그러면 각자 방으로 해산한 뒤에 1층의 로비에서 3시간 뒤에 모이는 걸로 하자! 으으, 흙을 뒤집어써서 그런지 찝찝해 죽겠어. 난 일단 씻어야겠어.”
“쿠루미도 씻고 싶음. 그런데 피곤해서 도저히 혼자서는 못 씻겠음. 프로아, 씻는 김에 쿠루미도 씻겨주기를 희망함.”
공선자가 파티원들과 걸으며 홀로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을 때 마침내 다시금 자신들이 머무는 여관에 도착한 프로아가 안도의 기미가 담긴 목소리를 토해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옷과 옷 위에 덧대고 있는 가죽 경갑옷을 묻은 흙을 털어내며 샤워가 절실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에 여자가 아닌 남자라고 해도 이대로 흙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찜찜했기에 전원 공감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것.
그러나 직후, 이제 완전히 완전해졌다는 생각 때문인지 긴장감이 완전히 풀려 비틀거리던 쿠루미가 그대로 프로아에게 매달리며 입에 담은 발언에 프로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아니, 저기? 쿠루미씨? 저희 어제 막 만난 사이인데요? 물론 앞으로 파티원으로 같이 활동하며 같은 여자 멤버끼리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거리를 좁히면 많이 곤란한데 말이죠?”
설마하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쿠루미가 알몸의 교제(!)를 요청할 줄은 몰랐던 프로아가 당황해서 자신에게 매달리는 그녀를 어떻게든 때어놓으려고 하며 이야기하자 쿠루미가 남아있는 힘을 총동원해서 그녀에게 매달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무리, 무리. 쿠루미는 이미 한계. 혼자 씻는 거 무리. 잘못하면 씻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릴 것 같음. 그런 의미에서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 프로아가 쿠루미를 씻겨줄 것은 강력하게 요청하겠음!!”
“그러니까 어제 만난 나의 뭘 믿고 그런 부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아니, 그전에 이거 신뢰니 뭐니 하는 것 이전에 그냥 자기 힘으로 씻기 싫어서 나 이용하려는 거지?!”
“어제의 경험으로 프로아가 상당히 정의감이 넘쳐서 곤란에 빠져있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판단은 이미 끝냈음. 그러니 포기하며 쿠루미를 같이 씻겨주면 되는 거임.”
갑작스럽게 쿠루미가 끈질기게 프로아에게 달라붙으며 자신을 씻겨줄 것을 요구하는 모습에 완전히 방관자가 되어버린 남자 멤버들은 갖가지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그는 이게 뭔 그들이 함께 씻든 말든 관심 없고, 빨리 여관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밀리언은 겉으로는 냉정해 보이면서도 과연 남자라는 것인지 그녀들의 대화를 통해서 어떤 상상을 했는지 슬쩍 뺨을 붉히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선자는 쿠루미를 때어놓으려는 프로아를 도와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남자들이 각자의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쿠루미와 프로아는 계속해서 씻겨주니 마니 하는 것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엄청난 게으름뱅이였지?! 파티원을 구할 때랑 쌈닭이랑 싸울 때는 꽤 바지런히 움직여줘서 까먹고 있었는데……!”
“쿠루미의 장래희망은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주부임! 하지만 현실과 타협할 줄도 알고 있음! 고로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반이 잡힐 때까지는 일을 해야 한다고 판단을 하고 있었던 거임!”
그렇기에 파티를 짤 때와 쌈닭의 사냥 때는 부지런히 움직였다는 것! 거기에 쌈닭의 사냥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으니 긴장감 때문에 도저히 게으름을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허나, 일단 일이 일단락되었고, 또, 그 덕분에 긴장감도 풀려서 그런지 나나미 쿠루미라는 이름의 인간이 지닌 본래 성격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뭘 당당하게 자기가 게으름뱅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정말! 떨어져! 아무리 그래도 고작 자기 힘으로 씻기 싫다는 이유로 어제 만난 사람하고 샤워하고 싶지는 않거든? 거기에 내가 씻겨줘야 하는 거잖아?! 무엇보다 내가 부끄럽다고!!”
아무리 곤란해하는 사람을 보고 지나치기 힘든 성격이라고 해도 정도가 있는 것이었다.
어제처럼 내버려두면 엄청 위험해 보이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고작 자기 힘으로 씻기 귀찮다는 사람을 데리고 씻겨줄 정도로 사람이 좋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좋다, 나쁘다, 를 이야기하기 전에 인간으로서 수치심이라는 게 있었다.
동성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친해진 사람이라면 모를까 어제 막 만난 사람한테 알몸을 보여주는 게 부끄러운 건 당연하지 않은가?
거기에 씻겨준다고 한다면 당연히 상대의 알몸을 자신이 만져야 할 텐데, 그것 역시 부끄럽기 그지없는 것.
그렇기에 어제는 도저히 쿠루미를 내버려둘 수 없어서 도와주었던 프로아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으으! 이건 단순한 설득으로는 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인 알겠음. 포기하겠음. 쿠루미는 안 된다는 걸 알아도 물고 늘어질 정도로 끈질긴 타입이 못 되는 거임. 대신…….”
단순히 매달리는 것으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결국, 쿠루미가 포기하고 프로아에게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프로아였는데 직후, 쿠루미의 발언에 경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녀뿐 아니라 언제 끝나나 하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남자들도 그녀와 같은 반응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블러드가 쿠루미를 씻겨줬으면 좋겠음. 음, 프로아가 안 된다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한다. 쿠루미는 의외로 머리가 좋은 걸지도 모르겠음.”
“아니아니아니! 그게 어떻게 머리가 좋다는 걸로 연결되는 건데?! 이상하잖아?! 동성인 나라면 모를까 블러드한테 그런 부탁을 하다니 아무리 자기 힘으로 씻기 싫어도 그렇지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거야?!”
“……어, 어, 어? 저, 저기, 제가 쌈닭의 살기에 의한 후유증으로 화, 환청을 들은 것 같은데 어떡해야 하죠?”
갑작스러운 쿠루미의 폭탄 발언에 프로아가 미쳤냐는 표정으로 쿠루미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에게 따지고 들었고 공선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결국에는 자신이 미친 건가? 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 하긴, 세계 하나를 멸망시키고 인격도 쪼개졌다가 붙었다가 했는데 제정신이면 그게 이상하지 않은가! 라고 묘하게 스스로 미쳤다는 사실을 납득하는 공선자.
허나, 아쉽게도(?) 공선자는 미친 게 아니었다. 그럴 것이 공선자뿐 아니라 밀리언과 고그 역시 공선자의 환청이 아니었기에 쿠루미의 발언을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네가 환청을 들은 게 아니다. 우리도 확실히 같이 들었으니 말이다. 아니,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내뱉은 건지 모르겠군. 저 소녀는 위기감이라는 게 없는 건가? 아니면 기억상실의 여파로 상식의 일부분이 날아갔나?”
어떻게든 냉정하게 자신의 추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쿠루미가 왜 저딴 발언을 한 것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밀리언.
“하! 팔자도 좋군. 당장 처음 받은 귀속 의뢰가 실패할 상황에서 여자애랑 꽁냥꽁냥 거릴 기회도 생기고 말이야.”
그리고 뭐가 심기를 뒤튼 것인지 공선자를 바라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잔뜩 짜증이 넣어 혀를 차는 고그.
고그의 그와 같은 반응에 공선자는 히익!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자신도 모르게 ‘죄,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더 고그의 짜증을 유발한 것인지 인상을 구긴 고그가 더 이상은 상종을 못 하겠다는 것처럼 먼저 여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니, 들어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자인 블러드한테 자길 씻겨달라고 하는 거야? 아무리 씻는 게 귀찮아도 그렇지 정도가 있잖아?!”
“그렇지만 프로아가 씻겨주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지 않음?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 수밖에.”
“그러니까! 그 다른 사람한테 부탁한다는 발상까지는 백번 양보해서 좋다고 치자! 그런데 왜 이성인 블러드한테 부탁하느냐는 결론이 나는 거냐고?! 여자로서 그건 아니지 않을까?! 보통은 그럴 바에는 스스로 씻겠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까?!”
“그렇지만 혼자 씻다가는 정말로 그대로 자 버릴 것 같고, 그렇다고 씻지 않고 자기도 싫고, 그러면 결국 누구한테 부탁해야 하는데 프로아는 안 된다고 거절했지 않음? 그럼 결국 남는 건 블러드, 고그, 밀리언에게 부탁하는 거임. 하지만 고그한테 부탁했다가는 100% 확률로 덮쳐질 것 같은 위기감이 경종을 울리는 거임. 밀리언에게 부탁하면 대가를 요구할 것 같았음. 경우에 따라서는 몸을 요구할지도?”
……여관에 들어가기 직전에 들려온 쿠루미의 목소리에 욱하는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대꾸하는 것이었다.
“누, 누가 그런 빈약한 몸매를 가진 어린애 따위를 덮칠 것 같아?! 괜한 생사람 잡지 마! 내 취향은 빵! 쏙! 빵! 한 몸매의 다이너마이트 계열의 여자라고! ……아마도.”
마지막에 약간 자신 없는 것 같은 첨언은 과거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의미로 넘어가 주도록 하자.
“……난 부정할 수 없겠군. 일단 남자인 만큼 제대로 성욕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특히 억지로 덮치는 게 아니라 대가로 요구한다는 부분에서……, 음. 고작 몇 시간 만에 나를 파악했다는 느낌이 드는군.”
이어서 밀리언은 고그와 다르게 순순히 쿠루미의 추측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부끄럽다, 억울하다! 라는 것 이전에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
여하튼 자신을 마치 강간마처럼 이야기하는 쿠루미의 발언에 고그가 따지고 들자 이번에는 빈약한 몸매라고 말해진 쿠루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그를 노려보며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여자의 몸매를 따진다는 것부터가 성욕의 화신이라는 증거임! 색골, 짐승, 아저씨!”
“크헉?!”
어째 색골이니 짐승이니 하는 매도보다 맨 뒤의 아저씨라는 매도에 더 강력한 데미지를 입는 고그였다.
그에 이를 갈며 쿠루미를 노려보는 고그였지만 썩어도 앞으로 같이 활동해야 하는 파티원이라고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고 이 이상은 못 어울려주겠다는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여관 문을 열고 먼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마지막 순간만큼은(여자를 몸매로 따지면 안 된다는 부분) 같은 여자로서 쿠루미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던 프로아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쿠루미에게 계속해서 따지고 들었다.
“아니, 그러면 역시 남자에 대한 경계심은 있는 거잖아?! 그런데 왜 블러드한테만 그런 부탁을 한 건데!”
“그럴 게 블러드는 딱 봐도 전혀 해가 없어 보이는 소동물 분위기가 있지 않음? 그러니 씻겨달라고 해도 전혀 무해할 것 같았음. 거기에 프로아랑은 다른 의미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타입 같았고 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