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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5화 (5/328)

제 5 화. 진실을 읽는 소년 (4)

너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거야?

진짜 내가 방금 봤던 그런 일들을 하고 있는 거야?

네가 어떻게 힘 좋은 성인 남자를 살해할 수 있지?

그것도 외국인 남성이었는데.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참아낸다. 방금 스스로 생각했듯 이건 예전의 그 사건과 달리 개꿈일 확률이 높으니까. 절로 울대가 꿀렁거리며 침이 삼켜진다. 그 모습을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여학생이 말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

“씹는 거냐?”

“아냐, 그만 갈게.”

황당해 하는 여학생을 뒤로 하고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 나왔다. 아주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던 여덟 살 때의 사건이 생각났다. 물론 그때 읽은 아저씨의 기억이 아닌 그 후에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한 충격적 기억이다. 보육원까지 천천히 걸어가며 예전 일을 떠올렸지만, 그때와 달리 너무나도 강렬한 충격적 기억으로 인해 관자놀이가 지끈거린다.

양 손 검지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잔뜩 인상을 쓰고 걸어 보육원에 도착하자, 루이사 수녀님이 날 보며 환하게 웃어 주신다.

“도경이 학교 잘 다녀왔니?”

“··················.”

“도경아? 무슨 일 있어?”

수녀님 얼굴을 올려 본다. 예전 그 사건 때 수녀님의 얼굴은 한참 좋지 못하셨다. 정말 그때 남편이 죽은 걸까? 하루에도 열 두번씩 묻고 싶었지만 수녀님이 또 그런 수심에 잠긴 얼굴을 하는 것이 싫다는 생각이 들어 참았었다. 이번에도 나는 그럴 것이다. 나는 가방을 내려 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이젠 괜찮아요.”

루이사 수녀님이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신다. 또 학교에서 고아라고 놀림 받았던 것이라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수녀님과 멀어졌지만 여전히 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사랑이 듬뿍 담긴 시선이라 거북하지는 않다.

방으로 들어와 내 침대로 왔다. 작은 옷장과 침대가 전부인 내 공간. 한 방을 여섯 명이 쓰다 중학생이 된 후론 셋이 쓰는 방으로 바꿨다. 원래 이곳을 쓰던 형들이 보육원을 나갔기 때문이다.

아직 다른 친구들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텅 빈 방. 교복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 입다 옷장을 보니, 나름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을 모아 놓은 작은 종이 박스가 보인다. 매일 옷장을 열 때마다 보는 것이라 대부분 무시하고 넘어가지만 오늘은 머리가 복잡해서인지 열어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가만히 상자를 바라보다 손바닥 보다 약간 큰 상자를 들고 침대에 걸터앉은 내가 상자 뚜껑을 열자, 어린 시절 보육원 친구에게 받은 편지들과 사진 따위가 보인다. 대부분 이젠 보육원에 없는 형, 누나들과 찍은 사진이다. 그들은 아주 가끔 보육원에 온다. 올 때마다 사회에 나가 성공했다는 듯 먹을 것을 잔뜩 사 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우릴 안아주지만, 나는 봤다. 그들의 양말에 여전히 구멍이 나 있는 것을.

오늘 그 여학생의 말처럼 우리는 사회에 나가서도 고아 이상의 대우를 받는 건 어려울 것이다. 수녀님 말씀이 맞다. 아니, 그 여학생의 말도 맞다. 우리 같은 고아가 그나마 인간 취급이라도 받으려면 열심히 공부해서 중간이라도 가는 수밖에 없다.

기분이 좋아지려 추억 상자를 열었는데 도리어 나빠졌다. 괜히 열어봤다. 그냥 공부나 할 걸.

“쳇.”

혀를 차고 다시 상자를 닫으려는 찰나. 상자 끄트머리에 가로로 서 있는 명함 한 장이 보인다. 저게 뭐였더라? 잠깐 멈칫한 상태로 있다 천천히 명함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명함을 보는 순간 아까 떠올렸던 예전의 기억들이 물 밀 듯이 밀려왔다.

'밤에 자면서 꾸는 꿈 말고 그때 건널목에서 봤던 꿈. 그런 게 또 보이면 바로 아저씨한테 전화 해줄래?'

'왜요?'

'그걸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사람을 죽일수도, 살릴 수도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난다. 나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 정말인지는 차마 확인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내 입이, 내 혀가 사람의 목숨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입을 다물면 불편한 진실 속에서 생명은 이어진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면 불편한 진실이 고개를 들고, 사람이 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 걸까?

그때 부정으로 기울어진 내 마음에 한줄기 의구심이 피어 오른다.

‘혹시.’

만약 그 꿈이 정말이었다면?

정말 그 아이가 사람을 죽이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아저씨는 경찰이잖아. 난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아저씨는 뭔가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또 다른 사람이 죽는 건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건 예전 사건과 달라. 그 아저씨의 말처럼 진짜 죽을 사람들을 살릴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때 내가 저지른 못된 일을 조금이나마 속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명함을 손에 쥔 채로 굳어 생각에 잠겼다. 그래, 전화해 보자. 벌써 6년이나 지나서 기억 못하면 그만인 거고. 만약 기억한다면 말해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예전 일처럼 일이 커지지 않게 확인만 해달라고 잘 부탁하면 될 거야.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옷장 구석에 둔 저금통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보육원 밖으로 나와 공중전화를 찾았다. 젠장, 요즘은 정말 공중전화 찾기가 힘들다. 웬만해선 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니까. 하지만 난 없다. 내게 핸드폰을 사줄 사람이 없으니까. 친구가 없어 전화할 일도 없었으니 공중전화 위치를 알고 있을 리도 없다. 그나마 학교를 오가며 봤던 공중전화 박스의 기억을 더듬어 결국 찾아냈지만 망할, 이 공중전화는 전화 카드만 되는 곳이었다. 하···

공중전화 박스에 쪼그리고 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냥 하지 말까? 동전 넣는 전화기가 어디 있는지 알고 또 헤매고 다니냐 말이다. 참나, 내가 뭐 하는 짓이지 지금? 괜히 애꿎은 바닥을 차고 있을 때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 누나가 도와줄까? 무슨 일 있어?”

고개를 들어보자, 예쁜 경찰누나가 친절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언제 왔는지 공중전화 박스 옆 도로에 경찰차가 정차되어 있고, 그 안에 남자 경찰 아저씨가 운전대를 잡고 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여경 누나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집이 어디야? 누나가 데리고 가 줄게. 집 주소 말해 줄래?”

여경 누나는 무척 조심스러운 말투를 쓴다. 아마 집 나온 가출 청소년인 줄 알았나 보다. 행여나 도망이라도 갈까 싶었는지 퇴로를 막는 모습도 보인다. 헛웃음을 지은 내가 말했다.

“저 보육원 원생이에요, 누나.”

여경 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저 길 아래에 있는 성당 옆 보육원?”

“예.”

“아, 그렇구나.”

경찰 누나가 경찰차 안의 남자 경찰 쪽을 바라보자 뭔가 눈짓으로 지시를 하는 것이 보인다. 경찰 누나는 한참 눈빛을 교환하다 다시 말했다.

“저기, 거기 테레사 수녀님 건강하셔?”

“그런 수녀님 안 계세요.”

“아.. 이름을 잘못 알았나? 어떤 수녀님이었지?”

“지금은 루이사 수녀님이랑 로사 수녀님이 계세요.”

차 안에서 창문을 열고 엿듣던 남자 경찰이 무전을 하는 것이 보인다. 아마 성당 측에 확인을 하는 것이겠지. 뻔하다. 내가 이렇게 침착할 수 있는 것과 그들의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아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아이는 순찰을 도는 경찰들에게 꼭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대상이다. 납치되어 막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 가정폭력으로부터 도망 나온 아이는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경찰 누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그렇구나. 나도 아주 오래 전에 방문해서 기억이 좀 가물가물했네. 밥은 먹었어?”

“누나.”

“응?”

“저 아저씨 무전 답 올 때까지 그냥 여기 있을 테니까 시간 끌려고 딴 소리 안 하셔도 돼요.”

“·····················.”

경찰 누나가 당황스런 표정을 짓는다. 괜찮다. 이제 익숙하니까.

“괜찮아요. 곧 무전 올 거예요. 그냥 기다렸다 확인 받고 갈 테니까 아무 말 안 하셔도 돼요.”

괜히 관심도 없으면서 이것 저것 관심 있는 척 물으며 시간 끄는 걸 뻔히 안다. 귀찮기도 하지만 이 누나도 일 하느라 바쁠 텐데 괜히 이런 감정 노동을 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다. 누나는 좀 민망했는지 괜히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린다.

‘아, 핸드폰.’

누나의 하얀 핸드폰을 보자 마자 다시 명함 생각이 났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명함을 다시 꺼내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누나.”

“응?”

“미안한데 전화 한번만 써도 돼요?”

“아, 그래. 보육원에 하려고?”

“아뇨, 아는 사람한테.”

“어.. 누군데?”

“그냥 아는 아저씨요.”

“아저씨? 이상한 사람 아니지?”

“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주저하며 핸드폰을 빌려주는 누나.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자, 신호가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저기.”

“말씀 하세요.”

“강혁 아저씨 핸드폰인가요?”

“아저씨? 누구냐, 너?”

“저 현도경인데요.”

이름을 말했다. 기억 못하면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끊자. 여기다 목숨 걸 일도 아니잖아. 마음 속에서 그냥 이 사람이 날 기억하지 못하고, 난 그냥 포기하고 보육원으로 돌아가 매일 같은 일상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상대는 기억력 좋은 경찰이었다. 3초쯤 적막이 흘렀지만 그는 곧 날 기억해내고 반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현도경? 그 도경이? 꿈에서 기억을 보던 여덟 살 도경이 맞아? 으하하! 이 녀석! 왜 이렇게 오랜만이냐!”

“·····················”

젠장, 기억하는 구나.

“저 이제 열 넷인데요.”

“허!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 하여간 세월 한번 엄청 빠르다니까. 그래, 무슨 일이냐?”

“··················.”

잠시 뜸을 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꿈인데. 이거 진짜 말해도 될까?

“도경아, 무슨 일 있어?”

“저기, 아저씨.”

“응.”

“꿈을 꿨어요.”

“························.”

“꿈··· 다시 꾸면 연락하라고 하셨잖아요.”

“··············· 너 어디냐, 지금.”

“여기 경찰 누나랑 같이 있어요.”

“뭐? 경찰? 왜? 뭐 사고 쳤어?”

“아뇨, 그냥 공중전화 박스에 앉아 있다가 가출청소년 불심검문 받았어요.”

내가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경찰 누나 얼굴이 빨개진다. 내게 잘못한 것도 없는 선량한 경찰 누나를 골탕 먹일 생각은 없으니 넘어가자. 시선을 경찰 누나에게 던진 채 통화를 하는 나.

“네? 왜요? 음, 알았어요.”

내가 경찰 누나에게 핸드폰을 내밀자, 누나는 큰 눈을 깜빡인다.

“응? 뭐야?”

“아저씨가 바꿔 달래요.”

“응? 갑자기 왜 날?”

“몰라요, 바꾸래요.”

누나는 잠깐 전화기를 바라보다 마지 못해 받는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네, 아 쌍문 제 2 파출소 소속 순경 구영은입니다. 전화 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예, 헙! 추, 충성!!!!”

엄청 나게 큰 소리로 외치는 경례 구호. 차에 있던 남자 경찰이 화들짝 놀라 뛰어 내린다. 경찰 누나가 자기가 지른 소리에 자기가 놀랐는지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두 손으로 전화를 받는 것이 보인다.

“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충성!”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얼굴로 전화를 끊고 날 바라보는 경찰 누나의 옆으로 다가온 남자 경찰이 날 한번 힐끔 본 후 누나에게 물었다.

“왜 그래? 누군데?”

누나가 큰 눈으로 날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치, 치, 치···”

“어이, 구순경. 정신 차리고. 도대체 누구길래 이래?”

“치, 치안감님···”

“헉. 뭐, 뭐야? 뭐라고 하시는데?”

누나가 핸드폰을 들어 날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이, 당장 청으로 데려오라고···”

놀란 두 사람이 경악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뭐야, 치안감이 높은 사람인가? 둘 다 갑자기 왜 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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