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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6화 (6/328)

제 6 화. 진실을 읽는 소년 (5)

득달 같이 날 태워 어디론가 데려가는 두 경찰. 경찰이 데려가니 별다른 일은 없겠지만 경찰차 뒷좌석에 타고 가니 꼭 범죄자가 된 느낌이라 기분이 더럽다. 다행히 경찰 누나가 보육원에 연락을 해줬다. 이따 끝나고 다시 데려다 준다고 약속까지 하는 걸 보니 별 문제는 없을 분위기다.

어딘지 모를 큰 건물에 도착한 두 경찰이 날 데리고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탄다. 잔뜩 긴장해 보이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눈만 멀뚱거리던 난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 중이다. 맹세코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나도 모르겠다. 에라, 경찰들이 득실거리는 건물인데 별 일 있겠냐.

엘리베이터에 타 있는 내내 옷 매무새를 점검하던 두 사람은 문이 열리자 목각인형처럼 잔뜩 굳은 자세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복도 맨 끝에 있는 커다란 문 앞에 선 두 사람이 노크를 하자, 안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경례를 붙이는 두 사람.

“충성!”

“어,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차장님!”

“애는?”

“여기 데려왔습니다.”

경찰 누나가 뒤에 있던 날 앞으로 밀자, 예전에 봤던 강혁 아저씨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책상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응? 그땐 잠바 같은 거 입고 있는 영락 없는 형사였는데. 정장을 입으니 사람이 달라 보이네.

“여, 도경이! 오랜만이다?”

내 입장에선 무서운 경찰 아저씨들도 딱딱하게 굳어 경례 하는 걸 보니 괜히 마음이 졸아든다.

“네···”

강혁 아저씨가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두 경찰에게 말했다.

“나가 봐요, 수고했습니다.”

“아닙니다, 충성!”

두 경찰이 나가자, 아저씨가 내 머리를 잡은 채 소파로 민다.

“자, 앉자. 도경아. 아따, 키 엄청 컸네?”

“네···”

“음? 뭐야, 예전엔 당돌하게 할 말 다 하는 녀석이었는데. 왜 이리 소심해졌어?”

“아니, 뭐 그냥.”

“짜식. 앉아라. 뭐 줄까, 우유? 오렌지 주스?”

“우유요.”

“그래, 우유 많이 먹어야 키 크지.”

아저씨가 인터폰을 누르고 우유를 가져오라고 하자, 1분도 안 지나 누군가 쟁반에 우유 컵을 놓고 들여온다. 와, 이 아저씨 진짜 편하게 사네. 우유 먹고 싶으면 ‘가져와’ 하고 말만 해도 누가 가져다 주는 구나. 근데 이 아저씨는 얼마나 높은 사람일까? 명함에는 치안감이라고 써 있었는데 아까 그 경찰 형, 누나들은 차장님이라고 불렀지?

“아저씨 높은 사람인가요?”

강혁 아저씨가 빙긋 웃으며 가슴을 친다.

“어, 내가 여기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거거든.”

“치안감이 그렇게 높아요?”

“그럼.”

“근데 아까 그 경찰 아저씨가 차장님이라고 부르던데. 그건 뭐예요? 계급이 두 개예요?”

“킥킥, 아니. 치안감은 계급이고 차장은 내 보직이지. 서울경찰청 차장.”

헉, 경찰청 차장. 드라마에서 봤다. 보통 악역이던데. 주인공 형사들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검사들이랑 짜고 돈 받아 먹고 막 그러는 경찰 대가리잖아.

내 표정이 이상해지자, 강혁 아저씨가 슬픈 표정을 짓는다.

“하, 이래서 드라마가 애들을 망친다고 하는 거지. 나 나쁜 사람 아니다, 도경아.”

“··················”

“나 이 자리 올라오는 동안 뒷돈 같은 거 100원도 안 받아 봤다. 그러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도경이 순간적으로 강혁을 훑어본다. 정장을 입고 있긴 했지만 구두가 꽤 낡았다. 시계는 차지도 않았다. 돈 받아 먹는 경찰청 차장이었다면 고급 시계에 고급 구두를 신었겠지. 순간적으로 강혁에 대한 판단을 마친 내가 말했다.

“믿어 볼게요.”

“킥킥, 믿어 볼게요? 이 녀석 그때 내가 알던 그 녀석이 맞네. 여전히 당돌하고. 하하!”

한참 지난 6년간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묻는 아저씨.

“그래, 여전히 공부 잘하고? 그때 너 공부 잘한다고 수녀님이 엄청 자랑했었는데.”

“잘해요.”

“오, 1등 하냐?”

“예.”

“반에서?”

“전교에서요.”

“어허허! 그래? 이 녀석 역시 크게 될 놈인 줄 알았다, 하하!”

크게 되어 봐야 겨우 사람 취급 받는 정도일 텐데요, 뭘. 내 표정은 그냥 그랬지만 아저씨는 무척 기분이 좋은 듯 하다. 한참 안부를 묻다 본론을 꺼낸 건 내가 이 방에 들어온 지 20분이 지난 후였다.

“그래, 또 꿈을 꿨다고?”

“네.”

“말해 봐, 어떤 꿈이었어?”

“그게···”

무척 조심스러워진다. 예전의 그 사건도 마음에 걸리고, 그 여학생도 그렇다. 아무리 싸가지를 말아 먹은 애라곤 하지만 그래도 같은 학교 친구인데 괜히 중상모략을 하는 꼴이 되는 건 아니겠지? 아저씨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그거 듣고 판단하는 건 내 몫이다. 넌 그냥 말만 해주면 돼. 게다가 지금은 예전과 상황도 달라. 그 사람 주변인에게 막말을 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만 말하는 거야. 편하게 해.”

음, 듣고 보니 그렇다. 어차피 그게 진짜라면 내 힘으론 안 된다. 그런 우락부락한 외국인 남자들도 죽이는 여자를 내가 무슨 수로 제압한단 말인가? 주저하던 내가 더듬거리며 꿈에 나왔던 이야기를 하자, 처음에는 자세히 듣던 아저씨가 중간부터 히죽히죽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테이블 위에 둔 노트북을 가져와 뭔가를 한다. 나에게는 계속 이야기 하라는 듯 손가락을 빙빙 돌리면서 자기는 노트북으로 딴 짓을 하고 있다. 좀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남에게 이야기를 하니 속이 좀 시원해지긴 한다.

아저씨는 내 말을 다 들을 때까지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다가 말했다.

“끝?”

“예.”

“그러니까 시체를 토막 내서 바닥에 돌을 묶어 던지는 장면인데, 버리다가 말고 머리를 꺼내 눈 밑에서 피를 짜내 아크릴 판에 보관을 하더라?”

“예.”

“그리고 집에 와서는 에어컨 박스를 열어 그 안에 피를 보관했고.”

“예, 그런데 그 안에 아크릴 판이 엄청 많았어요. 그 사람들을 다 죽였다면 몇 십 명은 될 거예요.”

“킥킥.”

아저씨가 웃는다. 이게 웃을 일이야 지금? 사람이 죽었다고! 몇 명인 지도 모르는데. 아, 혹시 이게 개꿈이란 걸 아저씨도 아는 걸까? 확인도 안 해주시려나? 하, 내가 생각해도 개소리 같긴 하니 반론도 못 들이밀겠다. 그냥 확 집에 가버릴까?

민망해 하는 날 웃음기 있는 눈으로 바라보던 아저씨가 노트북 화면을 돌린다. 어떤 영상물인 것 같아 보이는 화면. 아저씨가 스페이스 바를 누르며 말했다.

“봐.”

아저씨가 재생해 주는 영상. 이거 뭐지? 영화인가? 처음에는 영문도 모르고 영상을 보던 나는 어느 장면에서 얼굴이 새빨간 사과처럼 벌겋게 익었다. 꿈에서 봤던 내용이 그대로 영화에 담겨 있었다. 하, 창피해.

“영화··· 였어요?’

그때 강혁의 눈썹이 꿈틀한다.

‘이 아이. 이걸 안 봤다. 드라마를 영화였냐고 묻는 것 자체가 이것의 존재를 까맣게 모르고 있는 거야. 그런데 드라마의 정확한 플로우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진짜일 확률이 높아. 또 남의 기억을 읽었다.’

잠시 이채를 보였던 눈을 금방 감춘 강혁이 웃음을 짓는다.

“하하, 영화가 아니고 드라마다. 꽤 인기 있는 미국 드라마였지. 시즌도 여러 개 나왔으니까.”

“아···”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고작 드라마 내용을 꿈으로 꾼 거라니. 이게 내 한계인가 보다. 그럼 그렇지 나 따위가 무슨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 한다고. 휴.

“죄송해요, 아저씨.”

고개를 숙이는 날 가만히 바라보던 아저씨가 등을 두드려준다.

“아냐, 잘 했다. 난 네가 다시 꿈을 꿨다는 것이 기쁘다.”

“예?”

“하하, 자 이제 아저씨 질문에 답 해줄래?”

“어떤 질문이요?”

강혁 아저씨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꿈을 꾸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지?”

생각만 해도 좀 짜증난다. 그때 그 아이가 말했던 건 다시 떠올리기 싫은 무시와 질투였으니까. 그래도 아저씨를 귀찮게 만들었으니 숨기진 말자.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심각한 얼굴로 듣고 있던 아저씨가 혀를 찬다.

“참나, 요즘 부모라는 새끼들은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길래. 허, 참.”

“··················”

그렇지, 매번 날 괴롭히는 일진 놈들의 기억 속에서 본 장면도 그랬다. 제대로 된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그런 나쁜 짓들은 안 했겠지. 하지만 이 일은 숨기자. 괜히 자주 기억이 보인다는 말을 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내 속내를 모르는 아저씨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애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시작점이 다르다는 건 맞지만 올라갈 수 있는 도착점도 다르지. 네가 그들보다 훨씬 앞에 서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거다. 그러니까 그걸 믿고 열심히 하는 거야. 알았지?”

“도착점이 다를 수 있다고요?”

“그래.”

강혁 아저씨가 리모컨을 들어 TV를 켜자, 기자들의 아우성 속에 차에서 내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뉴스를 통해 방송되고 있다.

“저 영감 보이지?”

“네.”

“저 영감, 우리나라 30대 재벌 중에 한 명이다.”

“그런데요?”

“저 영감, 이제 감옥 갈 거야. 최소 10년이다.”

“누구 죽였어요?”

“아니, 횡령에 담합, 폭행치사. 살인 빼고 지을 수 있는 죄는 다 지었지.”

“나쁜 사람이네요.”

“그래, 근데 저 사람 감옥 보낸 게 나란 말이지.”

놀란 얼굴로 아저씨 얼굴을 바라보자, 그가 씩 웃는다.

“돈 많은 놈들의 출발선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 백 번 맞는 말이지. 근데 그런 녀석들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게 지금의 나다. 너도 그럴 수 있어. 그 여자애? 됐다 그래. 죄 안 짓고 돈 많긴 쉽지 않아. 네가 나처럼 경찰이 되면 그런 녀석들 위에 설 수 있다. 물론 처음엔 아니겠지만 말이야.”

괜찮다. 더 멀리 뛰기 위해 몸을 움츠리는 시간은 멀리 뛸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하나도 괴롭지 않으니까. 정말, 정말 나도 저런 재벌들이 겁 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경찰이 되면..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음, 그냥 경찰 말고. 경찰대학교 나오는 편이 좀 쉽지. 그거야 말로 합법적으로 남보다 앞선 시작점에 설 수 있는 방법이니까.”

“경찰 대학교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강혁 아저씨가 어깨를 으쓱한다.

“지금처럼 공부 열심히 하면 된다. 아, 한 가지만 더. 운동도 열심히 해야 돼. 가급적 유도나 검도 같은 거 하면 더 좋고.”

공부는 자신 있다. 하지만 유도와 검도라니. 그런 건 체육관에 다녀야 되는데 난 돈이 없다. 수녀님이 보내주실 수 있을 리도 없고. 풀이 죽어 보이는 날 보며 빙긋 웃은 아저씨가 책상 서랍을 뒤져 핸드폰 하나를 꺼내 내민다.

“너 핸드폰 없지?”

“·····················”

“아아, 이런 것도 없냐고 뭐라고 하는 거 아니다. 이거 작전할 때 쓰는 폰인데 너 하나 써라. 폰 비도 국가에서 나오는 거라 막 써도 돼. 물론 유료 결제 같은 거 하면 큰일 나니까 그런 짓은 하지 말고.”

핸드폰? 나한테 핸드폰을 준다고? 나도 저런 거 가질 수 있다고? 놀라움과 감격한 눈빛으로 손 안에 든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날 흐뭇한 눈으로 보는 아저씨가 말했다.

“경찰 대학교. 가 볼 테냐?”

경찰··· 진짜 이 아저씨 말대로라면 한번 해 볼만 하다. 어쩌면 진짜 내 눈에 보이는 것들로 사람을 살릴 수있을 지도 모르니까. 아니, 아니. 내가 정말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중 문제고 일단 지금은 핸드폰이 생겼다는 게 제일 중요하다. 밝은 웃음을 머금은 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해볼게요.”

손가락을 딱 튕긴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좋아! 열심히 하는 거다. 알았지?”

“네, 아저씨.”

“보육원까지 아까 그 순경들이 태워 줄 거야. 안전하게 돌아가고. 혹시 또 꿈을 꾸게 되면 전화하는 거 잊지 마라. 그러라고 폰 준 거니까. 알았지?”

“네!”

역시 전화하길 잘했다. 솔직히 그 꿈이 드라마인 걸 알았을 땐 창피해서 얼굴에 불이 나는 느낌이었지만 뭐 어때. 핸드폰이 생겼잖아! 이거 꼭 갖고 싶었는데. 보육원 가서 인터넷 검색도 해 보고 영상도 봐야지!

신이 나서 나가는 도경.

그 모습을 보며 웃던 강혁이 아이가 사라지자 마자 표정을 바꾸고 전화를 든다.

“어, 정보팀이지? 내가 지금 이메일 보낼 테니까 기재된 이름의 학생 학교 좀 알아보고, 그 학생 짝이 누군지 알아 봐. 여학생이야. 그 여학생이 사용하는 IP로 다운 받은 동영상 목록 중에 이메일로 보내는 드라마가 있었는지도 확인해 보고. 민간인 사찰 아니고, 꼭 확인해 봐야 할 일이니 비밀 리에 진행해.”

전화를 끊은 강혁이 아직 TV 속에서 흘러 나오는 뉴스를 보며 깍지를 낀다.

“현도경이라. 만약 이것도 사실이라면 넌 진짜구나. 그때 그 사건 때처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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