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화. 종로 경찰서 강력 3반 (1)
내연남이란 단어가 들리자 마자 잠깐 잊고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생각나 버렸다. 내가 저질렀던 그 사건. 내 표정이 달라지자 아저씨가 얼른 말을 돌린다.
“박세준은 자기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증거를 보여주자 바로 말을 바꿨어. 반드시 지켜내야 할 아내에서 당장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여자가 되는 건 한 순간이더군.”
“박세준이 전부 말했나요?”
“음, 진술했다. 하지만 변호사가 나서 박세준의 진술을 증명할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지.”
“그래서요?”
“박세준은 머리가 나쁜 녀석이야. 그래서 신정희에게 휘둘렸지. 하지만 머리는 나빠도 멍청하진 않더군.”
“음?”
강혁 아저씨가 윙크를 하며 말했다.
“자기가 블랙박스를 어디에 버렸는지는 정확히 기억하더라.”
블랙박스? 갑자기 그게 무슨.. 아, 자기 차 블랙박스가 고장 나서 구청 쓰레기장에 버렸다고 했었지. 그런데 그게 왜?
“갑자기 블랙박스는 왜요?”
“차에서 범행을 모의하는 음성이 녹음된 파일이 있었다. 지운다고 지우고 버리긴 했는데 복원이 가능했지. 박세준의 진술을 토대로 블랙박스를 찾아내 파일을 복원 후 신정희의 죄를 밝혔다.”
와, 대단하다. 신정희의 지능 범죄도 대단하지만 이걸 일일이 발로 뛰어가며 증거를 수집해 결국 그녀를 잡아넣은 경찰 쪽이 훨씬 대단해 보인다. 사실 얼마 전 경찰청에 갔을 때부터 느꼈지만 형사 아저씨들은 엄청 멋져 보인다. 덩달아 이 나사 빠져 보이는 아저씨도 조금씩 멋져 보인다.
한참 아저씨를 바라보다 보고서로 시선을 옮겼지만, 이미 방금 대화로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아서 그런지, 보고서가 별로 재미없다. 역시 진짜 현장에서 보는 쪽이 훨씬 재미 있다. 보고서를 정리해 다시 내민 내가 말했다.
“잘 봤습니다.”
“벌써 다 봤냐? 새끼, 공부를 잘해서 그런가, 읽는 속도 엄청 빠르네.”
보고서를 챙긴 아저씨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다.
“하여간 이번 사건은 수고했다. 하지만 이번에 본 건 다 잊어. 도와 달라고 청해 놓고 이런 말 하는 게 미안하지만 어린 녀석이 기억해서 좋을 거 없다. 그냥 없었던 일이다 생각해라.”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아저씨. 실소가 나온다. 강혁 아저씨도 말도 안 되는 말이라 생각했는지 관자놀이를 긁다 돌아선다.
“난 그만 간다.”
그네에 앉아 돌아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나. 차장쯤 되면 직접 사건을 지휘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들었다. 하지만 유사시에 나서서 직접 현장을 지휘하던 강혁 아저씨. 그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네를 두어 번 흔들던 내가 멀어지고 있는 아저씨를 부른다.
“강혁 아저씨.”
아저씨가 돌아본다. 그네에 앉은 채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해볼게요, 저.”
아저씨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뭘?”
발로 땅을 구르며 힘차게 그네를 흔드는 내가 조금 소리를 높여 말했다.
“경찰이요. 그거 한번 해본다고요.”
그네가 오르락내리락 진자 운동을 하는 만큼 가슴이 뛴다. 살면서 무언가 강하게 열망해 보는 건 처음이다. 이 두근거림이 결코 나쁘지 않다.
“야! 너 진짜지? 번복하기 없기다! 으하하, 으하하!!”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아저씨의 기분 좋은 웃음도, 어쩐지 기분 좋은 늦은 오후의 공기도 날 기분 좋은 설렘으로 데려간다.
**
강혁 아저씨의 지원은 확실했다.
맨 먼저 배우게 된 건 검도였다. 요즘 누가 칼 들고 싸우나 하는 생각에 질문했다가 꿀밤을 맞았다. 경찰대 진학 후 필수 운동이니 미리 배워 놓는 쪽이 좋다고 한다. 당연히 학원 같은 곳에 보내줄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아저씨는 날 진짜 현역 경찰 아저씨들이 운동하는 곳에 넣어 버렸다. 범죄자들 상대하며 땀 흘리는 일선 경찰들 사이에서 운동하니 실력이 쭉쭉 늘어나긴 했지만 무식한 훈련 덕에 지나치게 힘들기도 했다.
가끔 찾아와 간식을 사주던 아저씨는 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사람은 단번에 높은 곳에 뛰어오른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밤에 단잠을 잘 적에 그는 일어나서 괴로움을 이기고 일에 몰두했던 것이다.
인생은 자고 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속에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이룬 성공의 일순간은 실패했던 몇 년을 보상해 준다.
사실 처음 들었을 땐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아저씨 말은 맞았다.
형사들 틈에 섞여 검도와 유도를 비롯한 각종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던 어느 날. 그 날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되고 체육시간에 처음 검도를 하게 되었을 때였다. 나는 건들거리며 나선 일진 녀석과 대련을 하게 되었다. 나름 검도학원 좀 다녔다고 건방 떨던 녀석은 시합 시작 10초도 안 되어 내게 머리, 가슴, 배를 차례대로 내주고 무릎을 꿇었다.
거기서 끝났냐고? 아니다.
앙심을 품은 녀석이 점심시간에 내게 찾아와 주먹질을 해댔다. 하지만 그땐 벌써 3년이나 경찰 아저씨들과 매일 같이 대련을 하던 때였다. 검도 뿐 아니라 유도도 배웠기에 주먹질을 하는 녀석을 가뿐히 날려 책상 위에 메다 꽂아 기절 시켰다. 그 후부턴 아무도 날 고아라 놀리지 못했다. 그날 내게 던져져 기절한 녀석이 학교 일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제일 잘 나가는 녀석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한 희열도 느껴졌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느껴온 아이들의 멸시 어린 시선들이 두려움 섞인 시선으로 바뀌는 경험. 나는 강한 힘이 주는 희열에 푹 빠져 버렸다.
신이 났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운동을 하니 함께 운동하던 형사 아저씨들이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신이 나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자랑하고 나서···
나는 그날 아저씨들에게 삼백 번이나 메치기를 당해야 했다. 그때 날 날려버리고 깔고 앉은 형사 아저씨들이 했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힘은 또 다른 힘에게 제압당한다. 하지만 정의는 또 다른 정의에 의해 제압당하지 않는다.’
만약 아저씨들이 ‘내가 그러라고 운동 알려준 줄 아냐?’라고 했다면 난 반항했을 거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시작된 집요한 괴롭힘을 당해본 적 없는 사람들의 말 따위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얻어 맞은 걸 다 돌려준다면 평생 누군가를 때리고 살아도 부족했을 테니까. 하지만 아저씨들은 일절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질책하기 보다 뭐가 옳은지를 알려줬다.
검도장까지 끌려가 두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두들겨 맞고, 방호구를 차지 않은 팔에 멍이 잔뜩 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때 이름도 알지 못하는 형사 아저씨가 내 옆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경찰은 말이다, 도경아. 공격수가 아니라 수비수다. 축구 해봤지? 백 번 잘 막고 한번 실수하면 욕 들어 처먹는 수비수 말이다. 우린 그런 사람들이다. 어떤 경우에도 뚫려서는 안 되는 방패가 되기 위해 운동하는 거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날 괴롭히며 히죽거리던 일진 녀석들의 얼굴과 그들을 때려주고 나서 통쾌함에 웃었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하마터면 나까지 쓰레기가 될 뻔 했다.
인간병기를 만들어주겠다던 형사님들의 수업을 받느라 지쳐 공부를 게을리하다 강혁 아저씨에게 크게 혼이 난 적도 있다.
“너 인마! 경찰대가 우스워 보여? 서울대 의대나 법대 갈 실력은 되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경찰대다. 이 놈아!”
에이, 그럴 리가. 그 정도 실력이면 서울대 법대 가서 판, 검사를 하지 왜 경찰이 될까 싶었다. 하지만 알아보니 성적 커트라인이 엇비슷했다. 결국 난 하루를 반으로 쪼개 공부와 운동을 하느라 정신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가끔 그때 했던 선택을 후회하긴 했지만 결국 경찰대에 합격하고 자랑스러움과 흐뭇함에 눈물을 흘리는 두 분 수녀님들의 얼굴을 보니 그간의 고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역시 그때 아저씨 말을 듣길 잘했다.
**
서울경찰청.
예전보다 훨씬 넓어진 사무실에서 집무를 보고 있는 강혁이 보인다. 도경과의 첫 사건 이후 10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일까? 예전보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그였지만 여전히 건장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
결재가 필요한 서류들에 사인을 하고 있던 그의 귀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정복을 입은 경찰이 들어와 경례를 한다.
“충성.”
“어, 앉아.”
“감사합니다.”
하던 일을 잠시 더 한 후 일어난 강혁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 인사과장이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인사과장이 허리를 펴고 앉아 있다가 말했다.
“한달 전에 종로 경찰서 강력계에서 인력충원을 요청한 바 있습니다만, 차장님 결재가 아직 나오지 않아 확인 차 왔습니다.”
“아, 그거.”
강혁이 손을 휘휘 저어 보이며 말했다.
“보름만 기다리라고 해.”
인사과장은 종로 경찰서 측에서 꽤 압박을 받고 있는지 반색을 하며 말했다.
“보름 뒤에 충원해 주시는 겁니까? 몇 명이나 가능할까요?”
강혁이 턱을 괴며 말했다.
“왜 이리 안달이야? 순환보직 끝난 애들 꽤 많을 텐데. 지원자 없어?”
인사과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쉰다.
“요즘 젊은 애들이.. 누가 힘든 강력계에 지원하겠습니까? 다들 지능범죄 수사대나 안정적인 내근직을 원하고 있습니다.”
“응? 한 명도 없어?”
“작년 한 해 강력계 지원자는 총 31명이었습니다. 그 숫자론 서울 전 지역의 경찰서에 지원해 줄 인력에 못 미칩니다.”
“음, 힘든 일이긴 하지. 후, 예전엔 영화보고 멋지다고 생각해서 지원하는 녀석들도 꽤 있었는데. 요즘은 그것도 없네. 하여간 보름만 기다리라고 해. 한 명 보내준다고.”
인사과장이 한숨을 쉰다.
“한 명 말입니까, 차장님? 종로 경찰서에서 요청한 인력은 셋입니다.”
강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세 명분 하는 한 놈 보내주면 되는 거 아냐?”
인사과장이 눈썹을 꿈틀하며 말했다.
“누구 말씀이십니까?”
“있어, 경찰대 수석 졸업하고 순환보직 돌고 있는 놈.”
“경찰대 수석이요?”
“음, 경위 한 녀석 보내주면 좋다고 할 거다.”
인사과장이 다시 한숨을 쉰다.
“차장님. 종로 경찰서 강력계면 닳고 닳은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이제 막 경대 졸업한 애송이가 가 봐야 무시만 당할 겁니다. 차라리 부리기 좋은 경장 정도 계급을 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지원자 있어?”
“·····················.”
인사과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강혁이 것 보라는 듯 웃는다.
“사정 이야기 잘 하고, 보름 뒤에 보내준다고 해. 잘 할거다.”
인사과장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그런데.. 그 친구. 아는 사이십니까?”
강혁이 빙긋 웃는다.
“잘 알지.”
“누구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질문을 받은 강혁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간다. 커튼 밖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빛난다.
“있어, 경대 수석 졸업 후 707특임대로 군 복무한 괴물 같은 녀석.”
인사과장의 눈이 커진다. 경대 수석이라는 타이틀만으로 대단한데 군복무를 707특임대로 제대했다는 건 단순한 공부벌레가 아니란 뜻이기 때문이다.
“음, 그 정도면 종로 경찰서 쪽에 비벼 볼만 하겠군요.”
창 밖을 바라보던 강혁이 인사과장을 돌아보며 씩 웃는다.
“실망하지 않을 거라고 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