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화. 노인과 바다 (9)
관우에게 압수수색영장 신청을 부탁하고, 나는 파란색 고깃배 바로 옆에 정박되어 있는 꽤 큰 어선에 몸을 숨겼다. 이곳에 숨은 이유는 하나다. 배의 높이가 꽤 높아서 위에서 아래를 내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타겟이 되는 작은 어선에 비해 꽤 큰 어선이다.
나는 갑판에 몸을 숨기고 청각을 곤두세웠다. 혹시 파란색 배의 선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 배의 선주가 살인범일까? 우리가 아는 것은 이 배의 정박 위치가 자꾸 바뀐다는 것과 이 배가 우리가 찾던 무면허 어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청 여직원이 말했듯 단지 단속할 때마다 몇 척 나온다는 평범한 무면허 어선들 중 하나일 수도 있다.
그때 조금 멀리서 인기척과 함께 어린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씨, 무거워···”
나는 슬쩍 머리를 내밀어 상대를 확인했다. 작은 그림자가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부둣가를 걸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목소리와 그림자의 실루엣으로 보아 상대는 여자다. 양동이를 든 어깨가 한쪽으로 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무거운 무언가를 들고 오는 모양새다.
나는 몸을 낮추고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집중하기 위해 청력을 돋우었다. 내가 몸을 숨긴 배를 그냥 지나치는 듯 했던 상대였지만 어느 순간 배가 살짝 출렁이는 것을 느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 그 여성이 내가 있는 배에 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배의 관계자인 모양이다.
일단 나는 잠복 중이지만 선주의 허가 없이 들어와 있기에 정중히 양해를 구하는 쪽이 좋다. 갑자기 나타나면 상대가 놀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다시 한번 머리를 내밀어 주변을 확인한 뒤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든 후에 목소리를 냈다.
“저기, 실례합니다.”
갑판에서 나던 걸음소리가 멈춘다. 나는 품을 뒤져 신분증을 찾으며 말했다.
“놀라지 마세요, 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며 신분증을 든 손을 들었다. 어둑어둑한 시간이라 상대는 내가 뭘 들고 있는지 식별하기 어려운 모양인지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 보인다.
“죄송합니다, 경찰입니다.”
물러나던 상대가 몸을 굳힌다. 나는 상대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한걸음 앞으로 나왔다. 부둣가의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파악되지 않았지만 나는 의외로 금세 상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그쪽에서 먼저 날 알아봤기 때문이다.
“형사 아저씨?”
이 목소리. 기억에 있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들었던 목소리다. 상대가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있다 한걸음 걸어 나오자 빛의 반사각이 바뀌며 얼굴이 보인다.
“어? 넌...”
“형사 아저씨 맞죠?”
아까 펜션에서 봤던 여고생이다. 이 아이가 왜 여기 있을까?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여고생은 아까 펜션에서 볼 때와 다른 차림새다. 영락없이 어부처럼 보이는 차림새를 한 여고생이 양동이를 툭 차며 말했다.
“아빠 심부름이요. 이따 밤에 출항하는데 이거 좀 갖다 놓으라고 해서.”
양동이 속에 밧줄이 칭칭 감긴 뭉텅이가 들어 있다.
“그게 뭐야?”
“부표 밧줄이요.”
아, 이 아이 아버지가 대게 잡이 어선 선주라고 했었다. 어쩐지 배가 좀 크다 했더니 대게 잡이 어선이었구나.
“이거 너희 아버지 배야?”
“네.”
나는 아래에 있는 파란색 배를 눈짓하며 말했다.
“저 배 주인 알아?”
여고생이 갑판 위로 몸을 내밀고 배를 본 뒤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근데 아빠는 아실 거예요.”
“아버지 어디 계셔?”
“··················..”
여고생이 갑자기 겁먹은 얼굴이 된다. 난 안심하라는 듯 손바닥을 보인다.
“아까 내가 본 건 절대 이야기 안 해. 약속한다.”
여고생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얼굴로 다시 한번 묻는다.
“진짜로?”
“어, 경찰 신분증 걸고 맹세한다.”
“다 걸고?”
“그렇다니까.”
여고생은 잠시 고민하더니 양동이를 갑판 한쪽에 놓고 말했다.
“이 시간이면 식당에 계실 거예요. 따라와요.”
첫만남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착한 아이다. 이 아이에게 도움 받은 것이 적지 않다. 아이를 따라 부둣가를 걷던 내가 물었다.
“근데 아까 그 남자 애는 뭐야?”
“··················..”
설마 부적절한 관계는 아니겠지?
“남자친구 맞지?”
만약 그렇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어린 나이에 그런 방법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 나중엔 절대 그 세계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여고생이 뒤를 돌아보며 눈을 흘긴다.
“맞거든요, 남자친구.”
여고생이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으로 사진을 검색한 후 내민다.
“우리 사귄 거 3년 넘었거든요.”
3년이라, 그럼 네가 고1때부터 사귄 거냐? 요즘 애들 참 빠르다. 나 고1 때는 여자애가 말만 걸어도 얼어붙었는데. 아이가 보여주는 사진을 보니 안심이 된다. 그나마 부적절한 관계는 아닌가 보다.
“그래도 인마, 벌써부터 그런 곳 가면 쓰냐?”
여고생이 입을 삐죽거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체.”
음, 도움 받은 게 고마워서 그랬던 건데 마음 상하게 해버렸네. 나는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냥 걱정에 한 소리다, 막내 동생 같아서.”
여고생이 날 다시 째려보며 물었다.
“동생 있어요?”
“아니.”
“뭐야, 동생도 없으면서.”
“나 가족 없어.”
여고생이 멈칫한다. 놀란 얼굴로 날 돌아본 여고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아빠는?”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 보육원에 버리고 갔다고 말할 필요까지 없는 관계이니까. 여고생은 바로 상황을 짐작했는지 눈 흘기기를 멈추고 오히려 안쓰러운 얼굴이 된다. 역시 착한 아이구나. 위로를 해주고 싶었는지 몇 번 입을 달싹이는 것 같았지만 결국 말없이 다시 걷는 여고생. 한참을 걸어 인가가 나타나는 구역까지 오고 난 뒤에 아이가 물었다.
“아저씨.”
“어.”
“아직 그 언니 수사 하는 거예요?”
“············..”
“나도 다 알아요. 그 언니 죽었죠?”
이 동네는 소문도 엄청 빠르구나. 여고생은 내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음, 형사 아저씨가 쫓아다니는 걸 보니 그냥 자살이 아닌가 보네.”
음, 드라마 좀 봤다 그거냐? 여고생은 불이 켜진 식당을 눈짓하며 말했다.
“저기에 아빠가 있을 거예요.”
나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식당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때 여고생이 다시 날 부른다.
“아저씨.”
“왜?”
“꼭 잡아요.”
“··················..”
“그때 그 언니. 엄청 선한 사람 같았어요. 울 엄마가 그랬어요. 선한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나까지 착해지는 기분이 든다고. 그 언니는 그런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어요.”
당돌한 여고생. 하지만 마음에 드는 아이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꼭 잡는다.”
여고생은 나와 잠시 눈을 맞추다 식당 미닫이 문을 와락 열며 외친다.
“아빠! 또 술 먹어?”
밝은 식당 안, 열명도 넘는 거칠게 생긴 남자들이 술과 식사를 하다 시원하게 웃는다.
“여, 지원이 왔네.”
“이야, 점점 더 예뻐지네. 나중에 아저씨한테 시집와라!”
“예끼, 미친놈아! 네 나이가 몇인데!”
“하하! 그냥 농담이지, 뭘.”
여고생 이름이 지원이었구나. 나는 지원이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방금 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거친 뱃사람들이 날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보인다. 지원이는 구석에서 노트를 펼치고 뭔가를 기록하고 있는 수염이 잔뜩 난 아저씨에게 달려가 허리춤에 손을 얹는다.
“아빠, 또 술 먹었지?”
아빠라고 불린 이는 수첩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몇 시간 뒤에 조업 나가야 되는데 술 마시는 미친 선장 봤냐? 한 잔도 안 마셨다. 이 친구들이나 마셨지.”
“이리 와봐. 냄새 좀 맡아보게.”
“하~~~ 됐지?”
“으, 담배 냄새!”
“으하하! 담배는 좀 참아줘라.”
“뭐, 술냄새는 안 나네.”
“부표 밧줄 갖다 놨어?”
“어, 배에 올려 놨어. 근데 아빠. 손님 왔어.”
턱수염 선장이 그제야 지원이 뒤에 서 있던 날 바라본다. 잠깐 내가 누구인지 유추하듯 살펴보던 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혹시.. 우리 지원이 학교 선생님이십니까? 우리 애가 무슨 잘못이라도.”
선장이 애꿎은 지원이를 째려본다.
“너 뭔 사고 쳤지?”
지원이가 억울하다는 듯 혀를 찬다.
“참나, 아니거든!”
“너! 지난 번에도 학교 선생님 교단 서랍에 개구리 넣어 놨다가 아빠 학교 불려 가서 창피 당했잖아.”
식사 중이던 선원들이 킬킬 웃는 것이 들린다. 얼굴이 빨개진 지원이가 선장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며 말했다.
“그거 초등학교 때 이야기인데 언제까지 그 이야기 할 거야! 나 고3이라고. 이제 곧 스무 살이라고!”
“어이구, 지금 2월인데 아직 성인 되려면 10개월도 넘게 남았어. 아직 애다, 애.”
“이씨!”
뭔가··· 부럽다. 그냥 딸과 아빠가 장난치는 모습인데. 나는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어리광 부리는 모습. 나는 그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마음 한 켠이 아프다. 선장은 잠시 딸을 놀리다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 후 나를 보았다.
“선생님이 아니면, 누구요?”
나는 신분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린 뒤 조용히 말했다.
“잠시만 둘이 이야기 하시죠.”
선장은 내 신분증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린다. 조업을 떠나기 전의 선원들에게 만선을 빌어주진 못할 망정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경찰 신분의 내가 왔다는 것이 알려지는 건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니니 배려를 한 것이다. 선장은 내 생각을 읽었는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다들 밥 먹고 한 시간 뒤에 배로 와. 조업 준비할 거 산더미야. 늦지 말고 오고. 김씨는 술 좀 그만 먹어!”
선장이 눈짓으로 나가자는 신호를 보낸다. 지원이가 따라 나오려는 걸 본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와 이야기 잠깐 할게.”
내가 살인범을 쫓고 있는 걸 알고 있지만 아빠가 용의자가 아니란 걸 이미 알고 있어 그런지 아이는 얌전히 물러난다. 먼저 나간 선장을 따라 식당 밖으로 나가 그를 찾았다. 그러자 식당 모퉁이 뒤쪽에서 선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
뒤로 돌아보자 모퉁이 뒤에 기대 담배를 물고 있는 선장이 보인다. 선장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준 후 물었다.
“혹시 이 배 선주 아십니까?”
선장은 배를 잠시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역시, 지원이 말이 맞았다. 여기서 대게 잡이 선장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토박이 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 많은 배들의 선장이 다 알고 지낼 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원이 말처럼 아빠는 배의 선주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나는 얼른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선주 이름 아십니까?”
“종식.”
“성은요?”
“오.”
“혹시 주소도 아십니까?”
“·····················”
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선장은 담배를 꼬나 물고 날 가만히 바라본다.
“형사가 아니고, 시청 공무원 아닙니까?”
“예?”
“세금 징수국 직원 아니냐고.”
“아닙니다, 선장님.”
“거, 무면허 어선 단속 나온 거 아니요? 내가 바보인 줄 아나. 거참, 좀 내버려 둡시다. 그 쥐 방울만한 어선 끌고 나가서 얼마나 건져 온다고. 푼돈에도 꼭 세금 먹여야 속이 시원하쇼? 푼돈 가지고 근근이 생활하는 사람들 생각도 좀 해줘야지.”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아저씨. 왠지 파란색 배의 선주와 알고 지내는 듯 감싸주려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 의도로 여쭙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혹시 그 배 선주와 친하십니까?”
선장은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말했다.
“한 동네 살고 얼굴 보며 살면 친한 거지, 뭘. 아무튼 나 남의 이야기 함부로 하는 사람 아니니 딴 사람 찾아보쇼. 직접 알아보던가.”
“부탁드립니다, 강력사건 용의자라 여쭙는 것이니 부디 협조 바라겠습니다.”
선장이 멈칫하며 다시 날 돌아본다.
“강력사건?”
“예.”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제 놀란 마음에 협조해 주겠지? 하지만 선장은 내 예상과 다르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강력사건이란다, 으하하!”
“···············..?
선장은 한참을 웃다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이 친구야, 70이 넘은 할아범이 강력사건은 무슨 강력 사건이야, 으하하!”
뭐···? 선주인 오종식이 70이 넘은 할아버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