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61화 (61/328)

제 61 화. 노인과 바다 (15)

극심한 어지러움이 끝나고 흑백으로 물든 내 시야에 서서히 색이 돌아온다. 시야 속 세상은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상하의 진자 운동을 하고 있다. 깊은 바다의 검푸른 빛이 들어왔다가 파란 하늘로 온 세상이 물들기도 하는 곳이다.

‘배 위다.’

드디어 배 위에서의 기억을 볼 수 있나 보다. 나는 선실 뒤편에서 합사로 만든 원줄에 도래를 직접 묶은 직결 채비에 봉돌과 에기를 끼우고 있다. 젠장, 네 놈이 주꾸미 낚시하는 걸 볼 생각은 없다고! 나는 에기와 봉돌 몇 개를 챙겨 선실을 빙 돌아 갑판으로 나왔다.

선수(船首)에 나란히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이 보인다.

‘작업 좀 할 테니까 구경들 해.’

내 목소리를 듣고 바다를 보던 둘 중 하나가 고개를 돌린다. 1차 사건의 피해자 남승현이다. 그는 호기심이 생겼는지 내가 들고 있는 낚시 채비를 유심히 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어장에 관리하고 있는 주꾸미도 낚시로 잡아요?’

‘그물 쓰면 애들 상처 나. 그럼 값이 떨어져.’

‘근데, 에기가 하나예요? 여러 개 달면 한꺼번에 여러 마리 잡을 수 있지 않나요?’

‘그건 초보 놈들이나 하는 짓이고. 2단, 3단 채비를 사서 핀 도래마다 에자와 에기를 주렁주렁 달아서 낚시하면 이놈들이 물지를 않아.'

'왜요?'

'주꾸미는 바닥에 붙어 먹이를 먹어. 위쪽에 주렁주렁 달린 에기에는 어차피 달라붙질 않는다는 거지. 또 에기를 많이 달면 그만큼 조류를 많이 타서 감도가 떨어져.'

'와, 고수신가 보다.'

'여기서 평생 이 짓으로 먹고 살았는데, 고수지 그럼.'

남승현이 바다를 주시하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며 빙긋 웃는다.

‘지윤아, 할아버지가 주꾸미 잡는 거 같이 볼까?’

한지윤이다. 목과장님의 외 조카가 저 곳에 있다. 남승현의 말에 그를 바라보는 한지윤의 옆모습이 보인다. 어리지만 벌써 청초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외모를 가진 한지윤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 난 바다나 더 보려고. 궁금하면 가서 봐.’

‘에이, 너 안 가면 나도 안 갈래.’

‘진짜 괜찮아, 가서 구경해.’

‘진짜 그래도 돼?’

‘어, 많이 궁금해 보이는데.’

‘그럼 일단 사진 몇 장만 같이 찍자.’

남승현은 백 팩에서 DSLR 카메라를 주섬주섬 꺼낸다. 한지윤은 카메라 세팅을 기다리다 물었다.

‘그거 매번 그렇게 꺼내서 조립하는 거 안 불편해? 그냥 핸드폰 카메라로 찍지.’

남승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다 나름의 감성이 있어. 핸드폰 카메라로는 우리 추억을 온전히 담기 어렵다니까? 너도 내가 찍어준 사진 좋아했잖아.’

‘음, 그건 그렇지만.’

‘잠깐만 기다려, 금방 돼.’

나는 낚시대를 바닥에 던졌다. 벌써부터 입질이 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낚시 보다 다른 곳에 관심이 더 간다. 바로 젊은 처녀다. 얼굴이 하얗고 입술이 붉은 여자. 이곳에서 보기 힘든 외모다. 바닷바람에 전혀 노출되지 않고 자란 서울 처녀.

나도 모르게 입가에 침이 고이는 것이 느껴진다. 나이 때문인지 신체적 반응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지금 내 안에 솟구치는 감정은 분명 성욕이었다. 나는 오종식의 속에 들어 앉아 수만 가지 욕을 퍼부었다. 자신보다 50살은 어린 여자에게 욕구를 느껴 이 짓거리를 벌인 거였단 말인가?

나는 낚시대를 툭툭 치는 감각도 무시한 채 가자미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진 몇 장을 남기던 남승현이 렌즈를 여기 저기로 돌리며 배와 바다 사진을 찍는 것이 보인다. 잠시 후 사진을 다 찍었는지 목에 카메라를 건 남승현이 내게 다가온다.

‘아저씨 많이 잡혀요? 에이, 아직 한 마리도 안 나왔어요?’

나는 말없이 낚싯줄을 감아 올렸다. 그러자, 손바닥만한 튼실한 주꾸미가 올라온다. 남승현은 놀랐는지 탄성을 지른다.

‘와! 주꾸미가 낙지만큼 크네요! 엄청 맛있겠다!’

‘한번 해볼래?’

‘진짜 제가 해봐도 돼요?’

‘이거 에기라서 미끼 값도 안 드는데 뭘. 한번 해 봐.’

나는 선심 쓰듯 남승현에게 낚시대를 건넨다. 아직 어린 학생 답게 신이 난 남승현이 낚시대를 바다로 던지는 걸 본 나는 그의 뒤에 서서 릴에 손을 올려 두고 말했다.

‘자, 릴을 풀어. 바닥에 봉돌이 닿는 느낌이 올 거야.’

남승현은 손 끝에 감각을 집중하고 있다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뜬다.

‘닿은 것 같아요.’

‘좋아, 그럼 이제 기다리는 거야. 서서히 위 아래로 조금씩 흔들어줘. 그럼 지나가던 주꾸미가 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뭔가 툭툭 건드린다 싶으면 휙 채는 거야. 알았지?’

‘예, 할아버지! 꼭 한 마리 잡을 게요.’

‘잡으면 가지고 가서 먹어. 라면에 한 마리 넣고 끓이면 맛있어.’

‘와, 진짜 그래도 돼요?’

‘그래.’

‘하하, 지윤이 주꾸미 라면 끓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남승현에게서 떨어져 한발 물러나 선실에 몸을 기대고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선수에 앉아 아련한 눈빛으로 바다를 보는 한지윤의 모습을 보았다. 갓 스물이 넘은 처녀. 저런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면 어떤 느낌일까? 혹시 내가 젊었을 때 느꼈던 그런 흥분을 다시 맛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림의 떡이지. 남자친구와 같이 있는 여자를 어찌 건드리겠는가? 나는 다시 남승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손으로 낚시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목에 걸고 있던 카메라로 낚시대를 드리운 자신의 손을 찍고 있다.

‘낚시에 집중해. 그렇게 해선 못 낚아.’

‘아, 죄송합니다.’

카메라를 놓은 남승현이 양손으로 낚시대를 붙잡고 묻는다.

‘혹시 잘 낚는 방법 같은 건 없어요?’

‘·····················.’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가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들어온 내 배의 현재 위치. 주변에 낚싯배 하나 없는 망망대해. 멀리 육지가 보이긴 하지만 누구도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곳이다. 주변을 꼼꼼하게 두리번거렸지만 시야 내에 들어오는 것은 아주 멀리서 지나가고 있는 배 한 척 뿐이다.

낚싯대를 붙잡고 있던 남승현이 다시 묻는다.

‘네? 할아버지 그런 방법 또 없을까요?

‘있어.’

‘오! 역시 뭔가 팁이 있을 줄 알았어요. 어떤 방법이에요?’

나는 선실 벽에 내 등을 기대고 씩 웃었다.

‘들어가서 잡는 거.’

나는 등을 벽 쪽으로 미는 것과 동시에 양 발로 남승현의 등을 발로 찼다. 혹시 바다로 떨어지지 않고 버틸까 봐 차는 것과 동시에 발바닥으로 바다를 향해 밀어버렸다.

‘어! 어어!!’

젊은 남성의 순발력으로 순간적으로 몸을 트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내 다리를 붙잡으려 허우적대던 손에는 걸리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갑판 안전 바에 오금을 부딪히며 거꾸로 바다에 떨어졌다.

풍덩!

이제 됐다. 이제 이 배 위에서.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실컷 내 욕정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심할 순 없다. 젊은 놈이니 죽지 않고 살아 기어올라올 수도 있다.

‘푸하! 어푸! 하, 할아 어푸! 사, 살려 어푸! 지, 지윤아! 지윤아!’

바다 위에 뜬 머리가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떴다 하면서 사력을 다해 고함을 치는 남승현. 그 소리를 들은 한지윤이 놀라 뛰어온다.

‘스, 승현 오빠!’

한지윤이 내 쪽으로 다가와 안전 바를 붙잡고 발을 동동 구른다.

‘할아버지! 우리 오빠 왜 빠졌어요? 살려주세요, 얼른!’

내가 왜? 죽이려고 빠뜨렸는데? 나는 바다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빠지기를 반복하는 남승현을 보며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다급해 보였던 한지윤이 남자친구를 살려 달라 소리 지르다 내 미소를 보더니 소리를 멈춘다.

‘하, 할아버지?’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 한지윤이 뒷걸음질을 친다. 그때 남승현이 배 바깥에 빙 둘러놓은 타이어를 붙잡는 것이 보인다.

‘지윤아!’

한지윤이 두려운 얼굴로 날 바라보았지만 남자친구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얼른 갑판 안전바를 붙잡고 허리를 숙인다.

‘내 손잡아, 오빠!’

여자 힘으로 남자를 들어올리겠다고? 물 처먹은 옷 입고 있는 놈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지? 하긴 서울에서 내려온 힘 없는 여자가 뭘 알아. 나는 허리를 숙인 한지윤의 뒤로 가서 섰다. 뭘 먹고 컸는지 상체는 마른 편인데 하체는 튼실하다. 저걸 보니 더 군침이 흐른다. 일이 끝난 후에 마음껏 즐기면 될 일이다.

나는 선실문을 열고 삿갓대를 꺼냈다. 한 손으로 한지윤의 손을 잡고 사력을 다해 타이어로 기어오르려 하는 남승현이 보인다. 나는 삿갓대의 뾰족한 부분으로 녀석의 옆구리를 슬쩍 밀었다. 가뜩이나 젖어 미끄러웠던 손이 타이어에서 미끄러지며 다시 바다에 빠져 버린 남승현.

그의 손을 놓친 한지윤이 울며 고함친다.

‘악! 오빠, 오빠! 할아버지 대체 왜 이러세요!’

‘킥··· 킥킥.’

남승현은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자기 여자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에 눈에 불을 켜고 다시 배에 들러붙는다. 나는 다시 삿갓대로 녀석을 밀어 내려 했다. 하지만 한지윤이 몸을 던져 날 막아 세운다.

‘할아버지! 그만! 제발 그만!’

‘비켜, 이 년아!’

‘악!’

풍덩!

젠장, 갑판 쪽으로 밀었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 바다 쪽으로 밀어 버렸다. 물에 빠진 한지윤은 수영을 전혀 못하는지 몸부림을 치는 와중에 눈까지 감고 있다. 타이어를 겨우 붙잡은 남승현이 그 모습을 보더니 스스로 타이어를 놓고 한지윤이 빠진 방향으로 헤엄치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둘의 모습을 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선실 계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나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두 사람. 과연 물 속에서도 서로를 위할 수 있을까? 어쩌면 여자가 자기 살겠다고 남자를 빠뜨리고 올라서려 할지도 모르지.

이렇게 된 김에 좋은 구경을 해보자. 자, 너희는 어떤 선택을 할 거지?

문득 내 마누라와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어떨지 생각해본다. 서른 살에 결혼해 벌써 40년 넘게 함께 산 여자. 얼굴을 볼 때마다 지겹다. 그나마 음식이라도 잘하니 밥 얻어먹고 살고 있기는 한데···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내가 먼저 나올 거다. 구할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뭐 구해주지. 밥은 잘 하니까.

나는 뿌연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남승현도 수영을 잘 못하는지 허우적대며 한지윤에게 다가간다. 그러자 생사에 기로에 놓인 한지윤이 그를 꼭 붙잡고 머리를 누르는 것이 보인다.

‘낄낄, 그래. 살아. 살아서 너만 기어올라와.’

바다 위에서 남승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지만 한지윤은 숨을 헐떡이며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어찌된 거지? 둘 다 빠져야 말이 맞는 건데. 그때 한지윤의 몸이 배 쪽으로 밀려온다. 파도가 배 방향으로 치는 걸까?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지윤이 타이어를 붙잡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곧 그녀의 옆에서 남승현의 머리가 불쑥 올라온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물속에서 여자친구를 끌고 기어이 타이어까지 온 녀석. 노력은 가상하지만 그렇다고 살려 둘 순 없다. 그대로 보내면 내가 어찌 될지 불 보듯 뻔하니까. 나는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그냥 둘 다 죽어.’

타이어를 붙잡은 한지윤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

‘할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살려주면? 나가서 신고할 거면서. 나는 삿갓대를 붙잡았다. 내 손에 붙잡힌 삿갓대를 불안한 눈빛으로 보는 한지윤의 눈빛이 어쩐지 매혹적이다. 그대로 수장시키긴 아까운 생각이 스쳤지만 그래도 할 수 없다. 곱게 내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지.

‘이건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야, 원망하지 마.’

삿갓대로 남승현을 밀자, 그가 물에 빠지며 원망에 찬 고함을 지른다.

‘이 개새끼야!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남승현이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자, 놀란 한지윤이 타이어를 붙잡고 나머지 한손으로 물 속을 뒤진다.

‘오빠! 오빠!’

남승현의 머리가 다시 물 밖으로 나온다. 이제 슬슬 지겹다. 나는 삿갓대를 세워 녀석의 머리를 내리쳤다. 힘이 없어 강하게 내리치진 못했지만 그 정도로 충분하다. 순간적으로 몸에 힘이 빠진 남승현이 배에서 멀어졌으니까. 어차피 여기서 육지까지 헤엄쳐 가는 건 무리이니 끝난 것이다.

한지윤이 멀어지는 남승현을 보며 소리를 지르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날 노려본다.

‘도대체 왜! 우리가 뭘 잘못 했는데!’

나는 타이어를 붙잡은 한지윤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웃었다.

‘하필 내 배를 탔잖아. 왜 하고 많은 배 중에 내 배를 탔어? 그러니 네 놈들 잘못이지.’

‘이, 이이!!’

원한에 찬 눈빛. 음, 좋은 눈빛이다.

‘너도 가. 남자친구가 기다릴 테니.’

나는 천천히 삿갓대를 들어올렸다. 날 노려보는 한지윤의 눈빛이 두려움으로 바뀌더니 소리를 지른다.

‘아, 안돼!!’

나는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요즘 젊은 놈들은 어른 말이라면 귓등으로도 안 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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