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65화 (65/328)

제 65 화. 노인과 바다 (19)

오랜만에 만난 아저씨. 날 응원해 주러 이렇게 먼 곳까지 와 주셨다고 생각하니 꼭 아저씨가 아빠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식당을 고르기 위해 항구를 거니는 내내 내게 헤드락을 걸고 다닌 건 좀 싫지만.

“야야, 이 집 어때?”

“아씨, 거긴 스파게티 집인데. 영덕까지 와서 스파게티 잡숫게요?”

“음, 좀 그런가? 영덕 왔으니 대게 먹어야 되겠지? 어디 보자··· 오, 저기 좋네.”

내 목을 조르며 질질 끌고 다니던 아저씨가 가리키는 곳은 가게 전면에 커다란 대게 모양의 장식이 부착되어 있는 꽤 큰 규모의 식당이었다.

“저긴 괜찮겠네요. 근데 이거 좀 놔요! 아프다고요.”

“새끼, 엄살은.”

아저씨는 내 목을 슬며시 놓아주며 말했다.

“정경사도 부르지 그래? 같이 고생했는데.”

“정경사가 누군데요?”

“미친, 같이 일하는 동료도 모르냐? 정관우 경사 말이다.”

“아.”

맨날 관우라고 불러서 정경사란 호칭이 생소하다. 난 전화기를 꺼내려 하다 아저씨를 가자미 눈으로 보았다.

“아저씨가 쏠 거죠?”

“킬킬, 인마. 내가 설마 경사한테 얻어먹겠냐? 불러, 인마.”

관우에게 식당 위치를 알려주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손님이 별로 없다. 이 동네에서 큰 사건이 터졌다는 뉴스가 나오자 아무래도 관광객의 발걸음이 뜸해진 모양이다. 가게 구석에 동네 사람으로 보이는 두 테이블 외에 텅텅 비어 목 좋은 자리가 비어 있는 걸 본 아저씨가 얼른 창가 자리에 앉자, 꽤 젊은 여사장님이 방긋 웃으며 다가온다.

“두분 이세요?”

“셋이요, 한 명은 곧 올 겁니다.”

“네, 세분 세팅할게요. 뭘로 드릴까?”

강혁 아저씨가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뭐가 맛있습니까?”

여사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들어온 싱싱한 대게 메뉴가 제일 좋죠. 세트로 해드릴까요?”

강혁 아저씨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좋죠, 그거 3인분, 그리고 소주 빨간 거 하나, 맥주 하나, 막걸리 하나.”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주문이 끝나는 걸 듣고 있던 내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소주, 맥주, 막걸리를 한꺼번에 다 마셔요?”

강혁 아저씨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맥주는 인마, 음료수고. 막걸리 한 병만 딱 빨고, 나머진 소주로 달리는 거지. 아직도 술꾼 소리 들으려면 멀었네, 현도경이.”

그런 소리 안 듣고 싶다. 뭐 좋은 거라고. 술 좀 줄이라 잔소리를 하려는 찰나, 여직원이 기본 반찬을 내온다. 테이블에 깔리는 기본찬들을 직원이 놓기 좋게 옆으로 비켜주던 나는 아무 생각없이 직원 얼굴을 보았다가 그대로 굳었다. 그녀 역시 내 얼굴을 보는 순간 하던 일을 멈춘다.

“너···”

“형사 아저씨?”

펜션에서 봤던 지원이다. 나는 식당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너희 집 식당이야?”

지원이가 반갑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아빠가 대게 잡아오고, 엄마는 식당해서 먹고 살죠. 밥 먹으러 왔어요?”

“어···”

지원이는 쟁반에 있던 반찬을 얼른 내려놓고 주방 쪽으로 뛰어간다.

“잠깐만 기다려요, 엄마한테 말해서 서비스 왕창 줄게요!”

“··················”

저 아이와는 계속 엮이는 구나. 아, 정확히 말하면 저 아이보단 아이 부모님들과 엮인다는 쪽이 옳겠지만. 강혁 아저씨는 날 은근한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야.”

“뭐요?”

“쟤 고등학생이지?”

“고3이래요.”

“범죄다, 이 자식아.”

“···············.”

순간 뭔 소린지 못 알아듣고 멍 때리던 난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뒤늦게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럼?”

“수사에 도움 주신 선장님 딸입니다.”

“애가 싹싹하고 예쁘던데, 전혀 관심 없고?”

“없다고요. 그리고 쟤 남자친구도 있어요. 나 여자한테 관심 없거든요?”

“그게 문제다, 이 자식아. 나이가 몇인데 아직 혼자 있냐? 여자친구도 좀 사귀고 그래.”

“아, 제가 알아서 해요.”

“어허! 어른이 말하면 알겠습니다 하는 거야.”

“아 꼰대 같은 소리 좀 그만 해요.”

바로 그때 뒤에서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린다.

“이야, 우리 형사님 아버님이 오신 겁니까? 허허, 부자 간의 대화가 아주 듣기 좋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지원이 아빠인 선장님이 와 있다. 내가 얼른 일어나 인사를 드리자, 선장님이 날 제쳐 두고 강혁 아저씨에게 가서 굽실거린다.

“형사님 아버님 되시죠? 제가 형사님과 인연이 좀 있어서.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강혁 아저씨가 똥 씹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그렇게 늙어 보입니까?”

선장이 소주 병을 들었다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눈치를 채고 얼른 다시 물었다.

“아... 아닙니까? 이거 제가 또 실례를. 그럼 삼촌이십니까? 좀 전에 대화를 들었는데 아무래도 가족 같던데.”

강혁 아저씨와 내 눈이 마주친다. 남이 보면 우린 가족 같아 보이는 걸까? 아저씨는 싫겠지? 늙어 보이는 게 좋은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도 나한테도 남에게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분 좋다. 강혁 아저씨는 가만히 날 바라보다 씩 웃더니 잔을 내민다.

“맞습니다! 제가 이놈 삼촌입니다, 하하!”

“아이고, 그러시군요. 어쩐지 젊어 보이신다 했습니다. 자 한잔 받으세요! 제가 오늘 서비스 왕창 드리겠습니다!”

“으하하! 그렇다고 공짜로 주시면 안 됩니다? 여기 밥 3만원 넘어서 김영란 법에 걸리거든요.”

“하하! 예! 받을 거 다 받고 서비스만 왕창 드리겠습니다, 우리 형사님이랑 다르게 아주 시원시원하시네, 삼촌은!”

뭐냐, 이 분위기는. 왜 갑자기 여기 선장님이 껴서 술판이 벌어지는 거지? 넉살 좋은 선장은 관우가 도착할 때까지 테이블 한 자리를 차지하고선 혼자 소주를 두 병이나 까고 결국 아내에게 귀를 잡혀 끌려갔다. 어지간히 술을 좋아하는 양반인가 보다.

관우는 자세한 설명도 없이 밥 먹자는 말에 불려 나왔다가 처음보는 강혁 아저씨를 보곤 얼결에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물었다.

“저··· 뉘신지.”

강혁 아저씨는 선장과 술을 마신 후 기분이 한껏 좋아진 표정으로 다리를 쩍 벌리고 말했다.

“나? 이 녀석 삼촌.”

“헉.”

놀라는 관우를 본 내가 아저씨를 째려보며 말했다.

“장난 그만 치고요.”

“킬킬.”

강혁 아저씨가 얼어 있는 관우를 보며 웃는다.

“나, 서울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 강혁이다.”

내 삼촌이란 말에도 놀랐던 관우는 의자에 앉으려고 엉덩이를 붙이려 하다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경례를 붙인다.

“충!!! 서엉!!! 근무 중 이상 무!”

하··· 관우야 우리 지금 밥 먹는 중이다. 근무 중이 아니라고. 강혁 아저씨는 됐다는 듯 손짓한다.

“됐다. 앉아서 밥 먹어라. 수고했다?”

“아닙니다!”

강혁 아저씨가 대게 다리를 떼 관우 그릇에 옮겨주며 말했다.

“이 녀석 보좌하기 힘들지?”

“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국가수사본부장님!”

“호칭 참 더럽게 기네. 그냥 치안정감이라고 불러.”

“그, 그래도 됩니까?”

“어.”

“예! 치안정감님!”

관우는 날 힐끗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킨다. 강혁 아저씨는 넉살 좋게 관우 녀석 옆에 딱 붙어 소주를 계속 먹인다. 어느새 거나하게 취한 관우가 좀 전의 불편함도 잊고 침을 튀겨 가며 말을 시작한다.

“저 이번에 진짜 놀랐다는 거 아닙니까, 사실 도경 형님에 대해 연주한테 이야긴 많이 들었습니다. 진짜 불가사의한 형사라고요.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지만 범인 놈 특정부터 체포까지. 자기들은 빙빙 돌아갈 길을 한번에 찾아간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따라 다녀보니 그게 전부 진짜이지 뭡니까?”

강혁 아저씨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래?”

관우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저 진짜 놀랐습니다. 전 앞으로 도경 형님이 뭔 소리를 하든 전부 믿고 따를 겁니다. 이번에도 말이죠, 그냥 바다 보면서 소주나 한잔 하러 나간 배에서 말입니다···”

얼굴이 붉어진다. 관우 녀석은 과하다 싶을 만큼 내 얼굴에 금칠을 한다. 강혁 아저씨는 진짜 삼촌이 조카 칭찬을 듣듯이 흐뭇한 얼굴로 녀석의 수다를 듣다 적절한 타이밍에 소주를 따라준다. 자기 말을 잘 들어준다고 생각했던 걸까? 기분이 좋아진 관우는 물어보지도 않은 말까지 한다.

“와, 시장에선 또 어떻고요? 오종식의 아내를 한번에 알아보고 접근하는데! 진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습니다. 전 앞으로 형님만 믿고 따를 겁니다!”

강혁 아저씨가 관우 어깨를 두드리며 또 소주를 따라준다.

“그래, 그래. 이 녀석 잘 좀 부탁한다.”

관우는 소주를 받아 마신 후 부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와, 형님. 국가수사본부장님이 삼촌이라니. 어쩐지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대박.”

무슨 오해를 하는 거냐, 이 자식아. 내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강혁 아저씨가 끼어 든다.

“혹시 종로경찰서에 우리 도경이 괴롭히는 놈은 없지?”

뭐야, 삼촌 놀이를 진짜로 만들 작정인가? 관우가 손사래를 친다.

“그럴 리가요! 사실 처음에는 좀··· 아시겠지만 경대 출신 경위가 오면 분위기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형님이 발령 받자 마자 첫 사건부터 사고 제대로 치신 후엔 아무도 형님 무시 못하죠. 게다가 자기가 한 공도 다 동료들과 나눴거든요. 그러니 다들 형님한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죠.”

강혁 아저씨가 날 힐끔 바라보며 윙크한다. 그러고 보니 그 방법도 아저씨가 알려준 방법이었지. 팀원들의 신뢰를 얻는 방법. 공을 나누고 겸손하게 대처하라는 가르침. 어쩌면 아저씨는 진짜 삼촌보다 더 날 위해주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장시간에 걸쳐 날 사이비종교 교주로 만들며 찬양일색의 칭찬을 늘어놓던 관우는 결국 술을 이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테이블에 얼굴을 박는 관우를 보고 실실 웃은 강혁 아저씨가 말했다.

“이 녀석. 주량도 딱 경사네.”

경찰 계급이 주량으로 정해지는 거였습니까, 아저씨? 강혁 아저씨는 내 잔을 채워준 후 잔을 부딪힌다.

“수고했다, 잘 하고 있네, 자식.”

언제나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강혁 아저씨는 그런 날 빤히 보며 미소 짓는다.

“자식, 여덟 살 때 처음 봤는데 벌써 커서 술 한잔 나눌 수 있는 나이가 됐네. 세월 참 빠르다.”

그랬지. 아저씨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날 봤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른들 중에 수녀님 다음으로 날 많이 아는 사람이 바로 아저씨일 것이다. 강혁 아저씨는 턱을 괴고 가만히 생각하다 갑자기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다. 뭘 하시는 거지?

“이정호··· 목과장··· 정관우, 김연주··· 또 누가 남았지?”

“뭐가요?”

강혁 아저씨는 내 물음에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그냥 공 나눠준 사람이 이정호. 그 놈은 뭐 위로 사라졌으니까 패스하고. 목과장은 제 조카 일을 해결해 줬으니 빚이 생겼다. 정관우, 김연주는 옆에서 네 능력을 제대로 목격했으니 네 팬이 됐을 확률이 높고. 그럼 남은 건 최영현 경위 하나인가?”

“최영현 경위가 왜요?”

강혁 아저씨기 음흉하게 웃는다.

“최영현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사건이 있으면 좋겠네. 거기까지 포섭하면 네놈 팀장 만들기가 더 수월해질 테니까.”

아, 팀장. 공로를 나눠주고 팀원들의 인정을 받으라는 이야기의 연장선이구나. 솔직히 팀장에 특별히 관심은 없지만 팀원들에게 인정받고 싶긴 하다. 그래야 움직이기 편하니까. 근육 돼지 최영현. 첫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지켜본 결과 그는 매우 능력 있는 형사였다. 요즘 강력 3반에서 가장 많은 범죄자를 검거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함께 일해보면 배울 것이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일이 생겨야 가능한 일이니까.

술이나 먹자. 언제 또 여기 내려오겠냐?

제길, 이 아저씨. 내 몫의 대게도 다 먹었네,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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