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68화 (68/328)

제 68 화. 먼저 인간이 되어라 (3)

이정연이 정면을 노려보며 말했다.

“혜연이가 가끔 한숨을 쉬며 하소연을 한 적이 있어요.”

하소연? 결혼생활에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무슨 하소연이었습니까? 남편과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이정연은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집안은 항상 우리 집을 무시했어요.”

응? AB전자 경영자 집안이라며?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재벌을 무시하는 자가 있다? 왜 그랬을까? 이정연이 분노에 찬 얼굴로 말했다.

“저희 집안은 조선시대 때부터 상인 가문이었어요.”

헐, 무려 조선시대 때부터? 대단한 집안이었구나. 이정연이 말을 이었다.

“큰 상단을 꾸려 가던 고조부는 일제강점기에 망해버렸죠. 하지만 6.25 이후 다시 집안을 일으켰어요. 사업을 이어받은 증조부가 지금의 AB그룹을 만들어냈고요.”

AB전자는 시가총액 30조원을 돌파한 공룡기업이다. 대한민국 모든 이들이 사명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40년 전부터다. 그런데 왜 무시당하는 걸까?

“김중권씨 집안에서 왜 AB전자를 무시하는 겁니까?”

이정연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 집안은 예전부터 학자 집안이었어요. 몇 대조 조상인지 모르겠지만 대제학을 지낸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매부의 형님인 김재철씨는 2선 국회의원이고요.”

음, 알겠다. 그러니까 학자 집안이 상인 집안을 무시한 것이구나. 이정연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돈만 많은 천하고 무식한 상인 출신 집안이라고 틈만 나면 우릴 무시했어요. 하지만 집안에 힘 있는 국회의원이 버티고 있으니 우린 아무 말도 못했죠.”

“김중권씨의 형님이 김재철 국회의원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집권당 실세예요.”

AB전자 회장은 어떨까? 그도 넙죽 엎드려 있을까?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늙은 회장이라고 해도 AB전자를 유지하고 있는 호랑이다.

“회장이신 아버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정연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일단 숙이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아빠도 김재철이 국회의원에 낙선하는 순간 가만 있지 않겠죠. 그동안 받았던 수모와 멸시를 갚을 날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김재철은 2선의원이 됐고, 우리는 다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그런데 혜연이가···”

이정연이 눈물을 짓는다. 손수건을 꺼내 주고 싶었지만 형사가 그런 걸 가지고 다닐 이유가 없다. 다행히 이정연은 평소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친다. 헐, 손수건도 명품이네. 저런 건 얼마나 할까? 설마 손수건 따위가 내 월급보다 비싸진 않겠지? 설마 아닐 거야.

열심히 정신승리 중인 날 힐끔 본 이정연이 말했다.

“혜연이 사건 담당 형사세요?”

음, 조금 전부터 담당이 되긴 했지.

“예, 맞습니다.”

“부디 우리 동생 죽음에 대해 확실히 조사해 주세요. 부탁합니다.”

이정연이 고개를 숙인다. 나는 조금 놀랐다. 그리고 그런 내 뇌리로 예전에 강혁 아저씨가 해줬던 말이 떠오른다.

‘돈 많은 놈들의 출발선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 백 번 맞는 말이지. 근데 그런 녀석들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게 지금의 나다. 너도 그럴 수 있어. 그 여자애? 됐다 그래. 죄 안 짓고 돈 많긴 쉽지 않아. 네가 나처럼 경찰이 되면 그런 녀석들 위에 설 수 있다. 물론 처음엔 아니겠지만 말이야.’

물론 그때 아저씨가 했던 말과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눈 앞의 이정연이 죄를 지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날 버러지 보듯 하던 재벌이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부탁을 한다. 문득 고등학교 때 날 무시하던 부잣집 여학생이 생각난다. 그 아이는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이정연이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도와드릴 수 있는 건 뭐든 다 하겠습니다. 꼭 조사해 주세요, 형사님.”

나는 내 손을 꼭 잡은 이정연의 손등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정보가 필요합니다.”

“무슨 정보 말씀인가요?”

우리는 김상식의 신병확보가 꼭 필요하다. 그를 우리 쪽으로 잡아올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다. 어떤 명분이면 될까? 머리를 굴리던 내 뇌리로 조금 전 최영현이 말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저런 새끼들은 약을 해도 안 잡힌다니까. 내 저런 놈들 많이 봤지. 재벌 아비 밑에서 태어난 개차반들.’

김상식의 환경을 보면 충분히 마약이나 기타 범죄에 손을 댔을 확률이 있다. 하지만 이정연은 김상식의 가족이다. 과연 그녀가 협조해 줄까? 나는 명함을 꺼내 이정연의 손에 쥐어 준 후 그녀와 눈을 맞췄다.

“국회의원의 힘을 업은 친가 쪽에서 김상식의 수사를 막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떡하든 그의 신병을 확보해야 조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면 수사도 불가능합니다.”

“·····················.”

이정연은 가만히 내 명함을 바라본다. 역시 재벌가문에서 자란 여자 답게 내가 하는 말 속에 어떤 뜻이 숨어 있는지 금세 눈치챈다.

“상식이가 지은 죄를 말하라는 건가요? 다른 죄목으로 구류해서 그 틈에 취조하겠다는?”

역시 미워도 가족은 가족이구나. 나는 은근한 어조로 그녀를 달랬다.

“큰 죄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조사가 가능한 수준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예를 들라고? 평소 여러 가지 죄를 골고루 짓고 사는 건가?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예를 들어 불법약물 투여혐의 정도면 적당하겠죠.”

이정연이 흠칫 놀란다. 나는 얼른 그녀를 안심시켰다.

“해외에서 약물을 투여한 경우 징역기간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약물을 직접 판매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돈 많은 집안에서 자란 김상식씨가 판매책에 가담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

“바로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충분히 고민해 보시고 명함의 전화로 알려주세요.”

나는 그녀를 조급하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초조할 것이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슬쩍 건드렸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곧 친가 쪽에서 시신을 양도해 달라는 압력을 행사할 겁니다. 그럼 사건의 수사는 더 어렵게 됩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세요.”

이정연이 말없이 명함을 바라본다. 아마 속으로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여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조카를 고발할 것인가, 아니면 남은 조카를 지키기 위해 친가와 편을 먹을 것인가? 그때 입구 쪽에서 남편과 담배를 태우고 돌아온 최영현이 보인다. 그는 멀리서 이제 되었냐는 얼굴로 눈짓한다. 내가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남편과 함께 다가오는 최영현.

남편은 이정연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보곤 날 힐끔 본 후 아내의 옆에 앉았다.

“여보, 괜찮아?”

“··················”

“무슨 이야기 중이야?”

이정연은 남편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명함을 바라보다 날 쳐다본다.

“형사님.”

“예, 이정연씨.”

“했어요.”

“··················”

남편이 영문 모를 얼굴로 묻는다.

“뭘 해?”

이정연이 마음을 단단히 먹은 얼굴로 말했다.

“상식이. 필리핀에서 마약 했어요.”

남편이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여보! 그게 무슨 소리야!”

최영현의 눈빛이 빛났다. 원래 마약수사대 출신이라 이쪽은 훤히 꿰고 있는 모양이다. 그가 나서며 물었다.

“리잘(rizal)입니까, 마카티(Makati)입니까?”

이정연은 살짝 놀란 얼굴로 최영현을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연다.

“리잘.”

음? 이게 뭔 소리일까? 최영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건다.

“나다, 최영현. 어, 정보 하나 주려고 전화했다. 그래, 확실하다.”

아무래도 제대로 물어낸 것 같다. 최영현이 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니. 이정연은 날 바라보며 입술을 깨문다.

“형사님. 약속 꼭 지켜요.”

“물론입니다.”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감사합니다.”

“여보, 가요.”

남편이 당황한 얼굴로 주춤거리며 일어난다. 조카의 마약투여 사실을 경찰에게 말하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겠단 얼굴로 바라보는 남편. 아마 집으로 가며 상황 설명을 듣겠지.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뜨자,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최영현이 날 가만히 바라보다 실소를 짓는다.

“생각보다 머리 회전이 좀 되는 사람이었네요?”

생각보다?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한 거냐, 이 자식아. 최영현이 내 옆에 털썩 앉으며 씩 웃는다.

“마약수사대 애들이 곧 올 겁니다. 딱 좋네요, 여기 병원이니 바로 검사할 수 있고. 이제 우린 앉아서 기다리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겠습니다.”

최영현은 한시름 놨다는 얼굴로 기지개를 펴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날 힐끔 본다. 팔을 빙빙 돌려 풀어준 그가 주머니를 뒤져 아주 작은 기계를 꺼내 빙긋 웃는다.

“후후. 이제 내가 나설 차례.”

응? 뭔 소리야, 그게?

잠시 후 마약수사대 형사들 네 명이 병원으로 들어오는 걸 본 최영현이 손을 든다.

“여.”

형사들이 최영현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받는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인가 보다. 최영현과 함께 있는 내게도 슬쩍 눈인사를 해오는 형사들. 하지만 특별히 인사말이 오가진 않는다. 최영현이 작은 기계를 건네 주며 말했다.

“거래하는 거다?”

“···············”

기계를 받은 형사가 인상을 구긴다.

“아직도 이런 짓 하고 다녀?”

“뭐, 어때? 증거로 채택만 안 하면 되는 거지.”

“너 이런 짓 계속하다 진짜 골로 간다?”

“골로 가도 내가 간다. 너흰 거래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형사는 할 수 없다는 듯 작은 기계를 주머니에 넣고 말했다.

“리잘 쪽이래?”

“어.”

“하, 그쪽이면 대형조직에서 수급했겠네.”

“차라리 대형조직이 낫지. 어차피 너희들 그쪽에서 넘어오는 약 수사 중이지?”

“뭐, 그렇기는 하지.”

“잘 조지면 브로커도 알아낼 수 있을 거다. 신세 진 거 잊지 마.”

“미친, 이거 설치해주는 걸로 대가 치른 거라며?”

“흐흐, 그건 그냥 보너스고.”

형사들은 혀를 찬 후 김상식의 병실로 향했다. 최영현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날 보며 씩 웃는다.

“자, 좋은 구경하러 갑시다.”

나는 먼저 가는 최영현의 뒤를 쫓으며 물었다.

“리잘이 뭐죠?”

“필리핀 도시요. 그쪽 마약조직 중에 제일 큰 놈들이 있는 곳입니다. 보통 여행자들은 거기 잘 안 가죠. 재벌 자식 놈이 그 동네 들락거렸다는 건 약에 손댄 겁니다. 그래서 아까 제일 먼저 도시를 물었던 거고. 리잘이란 이름 듣자 마자 확신했죠.”

역시 마약수사대 출신 형사는 다르구나. 그가 없었다면 난 이정연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또 얼마간의 시간을 낭비했을 것이다. 역시 이 사람은 재수는 좀 없어도 잔뼈 굵은 형사다. 그를 따라 VIP 병동으로 오자, 경호원들과 대치하고 있는 마약수사대 형사들이 보인다.

변호사들까지 뛰어나왔지만 수색영장을 가지고 온 형사들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 금테 안경을 쓴 변호사가 영장을 확인하고 말했다.

“체포영장이 아니군요?”

마약수사대 형사가 넉살 좋은 얼굴로 말했다.

“예, 예. 수색영장입니다. 우리 쪽으로 신고가 들어와서. 아시죠? 이쪽 일은 신고 들어오면 무조건 조사해야 되는 거.”

“···············..”

“자자, 여기 병원이니 딱 좋네요. 피검사만 하겠습니다. 비키세요.”

문을 막은 경호원들이 당황한다. 영장까지 들고 온 형사를 막는 건 범법행위이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끼어 들어 말했다.

“여긴 병원이니 간호사 불러서 혈액만 가져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형사가 웃으며 바지를 치켜 올린다.

“그렇죠, 그런데 혈액채취 장면은 저희가 참관해야 됩니다.”

변호사가 다른 변호사에게 눈짓하자, 그는 전화를 들고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 남은 변호사가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는다.

“혈액검사 좀 합시다.”

간호사에게 영장을 보여주는 형사. 간호사는 잠깐 당황했지만 곧 주사를 챙겨 병실로 들어간다. 변호사와 동행해 병실로 들어가던 마약수사대 형사가 우리 쪽을 힐끔 보고는 윙크하는 것이 보인다. 최영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뭔 소리를 하는지 봅시다.”

응? 뭔 소리를 하는지? 나는 조금 전 마약수사대 형사에게 준 작은 장비를 떠올렸다. 설마, 이 사람 그거 감청 장비는 아니겠지?

“설마 도청장비를 준 겁니까?”

최영현이 씩 웃으며 손짓한다.

“여기서 듣기는 그러니 차로 갑시다.”

멀어지는 최영현에게 황당한 눈빛을 던지고 있는 나. 저러니까 강등을 당하지, 어휴. 그나저나 감청이라니. 요즘도 이런 걸 하는 구나. 약간 긴장된다. 이건 엄연히 범법 행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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