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74화 (74/328)

제 74 화. 먼저 인간이 되어라 (9)

어지럽게 돌아가는 주변환경.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이 느낌은 견디기 어렵다. 얼마나 더 보아야 이 어지러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걸까? 차라리 눈을 감는 편이 덜 어지럽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진짜 몸이 회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까? 눈을 감으니 어지러움이 가신다.

잠시 후, 백색소음들이 들려온다.

종을 치는 소리.

뭔가 테이블 위에 툭 던지는 소리.

사람들의 대화소리.

고성을 지르는 사람,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며 웃는 사람.

언뜻 보통의 카페에서 들리는 소리 같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들려오는 소리들이 모두 영어라는 사실이다.

‘Maximum Bet.’

‘No! It's Sucker Bet, Bro’

‘Please Face Down sir.’

‘High Roller, go to the vip room.’

‘Please return the Money Tray sir.’

어디일까?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휘황찬란한 광경이 과연 현실에 존재하는 곳인지 의심해야 했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토끼 머리띠에 검은 망사 스타킹을 신고, 수영복인지 일상복인지 모를 옷을 입은 미녀들.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카지노?’

저 멀리 거대하고 화려한 조명을 빛내고 있는 카지노의 이름이 보인다.

‘Golden Nugget Hotel & Casino’

이게 도대체 무슨 기억이지? 난 김상식이 부모님을 죽였다는 증거를 잡아야 한다고. 그래서 억지로 우겨서 여기 들어왔는데 뜬금없이 무슨 카지노에서 기억이야? 이 새끼 도박하는 것 따위 볼 생각 없다고! 나는 카드 두 장을 앞에 두고 옆에 쌓아 둔 칩 몇 개를 집어 내밀었다.

‘Do you get this too?’

내가 묻자 내 앞에 있는 여성 딜러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Foreign Chip? Yes sir’

다행이다, 외국에 한번도 나가본 적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영어는 필수다. 방금 난 ‘이것도 받지?’라고 물었고, 딜러는 ‘다른 카지노 칩? 받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칩을 딜러 쪽으로 툭 던진 후 말했다.

‘Open.’

딜러가 자신 앞에 있는 두 장의 카드를 뒤집자, 다이아몬드 10, 클로버 9가 보인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한다. 당황해서가 아니다. 내 안에서 느껴지는 이 감정. 이것은 기쁨이다. 나는 내 카드를 동시에 뒤집으며 말했다.

‘Clover ten, ACE Spade.’

딜러는 두말없이 웃어주며 말한다.

‘Black jack sir, Congratulations.’

딜러가 칩을 내어주며 말했다.

‘Welcome to Las Vegas.’

젠장, 라스베이거스야? 여기 와서 도박을 하고 있는 모습은 도대체 왜 보여주는 거야? 딴 칩을 옆에 쌓아 두고 낄낄거리는 나. 그때 누군가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헤이, 킴.’

나는 딜러가 섞고 있는 카드를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뭐?’

응? 한국말을 하네? 옆에 앉은 사람이 말했다.

‘핏 보스가 그러는데, 너 찾아 다니는 놈들이 있다는데?’

나는 급히 옆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국말을 잘한다 싶더니 역시 한국인이다. 짧은 머리에 점퍼를 입은 남자다. 나는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어떤 놈들인데?’

짧은 머리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존스 패거리 아니겠어? 아까, 존스 밑에 있는 따까리 새끼 보긴 했는데.’

나는 벌떡 일어나며 급히 칩을 주머니에 마구 쑤셔 넣었다. 그 와중에 딜러의 팁 박스에 칩 하나를 던져주는 걸 잊지 않는 나.

‘그런 건 좀 빨리 말해, 새끼야.’

‘낄낄, 야 언제까지 도망 다닐 거냐? 차라리 꼰대한테 말하지?’

‘닥쳐, 이거 꼰대가 알면 나 뒤진다.’

나는 얼른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자 짧은 머리 남자가 지나는 바니걸의 쟁반에서 샴페인을 한잔 들며 말했다.

‘숨어 있다, 호텔로 와. 너 급하다고 해서 다른 쪽 연결했으니.’

나는 얼른 도망 가려다 멈칫하고 남자를 돌아본다.

'얼마까지 돼?'

'이야기 잘하면 5만 정도?'

'씨발, 그거 가지고 누구 코에 붙여.'

'킥킥, 그래도 이자라도 내면 눈에 불 켜고 쫓아오진 않을 거 아니냐?'

'하, 일단 알았다. 호텔에서 봐.'

'총알에 눈 안 달렸다. 잘 피해 다녀.'

'약 올리지 마 개새끼야.'

'낄낄.'

뒤뚱거리며 뛰는 나. 이게 걷는 건지 뛰는 건지 모를 속도로 카지노 정문이 아닌 식당으로 통하는 문으로 나온 나는 벌써 숨이 턱까지 차 있다.

‘헉, 헉! 헉! 헉!’

운동 좀 해라, 이 돼지 새끼야. 몇 미터 뛰었다고 이 지경이 되는 거냐? 눈앞이 뿌옇게 될 정도로 숨이 찬 나는 식당 구석에 잠시 웅크렸다. 누군가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는 것이 들린다.

‘Find him!’

‘Fucker, I'll kill you’

나는 몸을 더욱 웅크렸다. 요리를 하던 백인 요리사가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다 누군가 날 찾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딴청을 부리는 모습이 보인다. 난 얼른 주머니를 뒤져 칩 하나를 그에게 팁으로 건네 주었다. 백인 주방장은 슬쩍 자기 주머니에 칩을 넣더니 사라져 준다. 힘겹게 일어나자, 저 멀리 문 앞에 요리사가 보인다. 그는 문을 열고 밖을 살피더니 고갯짓으로 이리 오라는 신호를 준다.

갑자기 뛰었더니 고관절이 빠질 것 같은 느낌이다. 절뚝거리며 요리사가 열어준 문 밖으로 나오자 식자재가 오가는 뒷문으로 빠져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쉰 나는 후드를 눌러쓰고 길가로 나왔다. 다행히 아직 초저녁이라 행인들이 많다. 행인들 사이에 섞여 호텔 카지노에서 멀어진 뒤 가까운 공원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 씨발. 죽을 뻔했네.’

그때 품에서 전화가 울린다. 뱃살 때문에 후드 앞 주머니에서 잘 빠지지 않는 핸드폰을 억지로 빼내자 액정에 엄마라는 글이 보인다.

‘씁.’

엄마한테 전화가 왔으면 반가워하는 것이 보통 아닌가? 나는 혀를 차며 받기 싫은 전화를 억지로 받았다.

‘어.’

-상식아, 잘 있니?

‘어.’

-밥은 잘 챙겨 먹고?

‘어.’

-어학원은 어때?

‘그냥 그래.’

-벌써 4개월째네.

‘그래.’

-이제 4개월 남았지? 조금만 더 힘내자, 샌프란시스코 날씨는 어때?

‘맨날 비와.”

샌프란시스코? 너 이 돼지 새끼. 지금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 있는 새끼가 뭔 샌프란시스코에 있다고 거짓말을 해?

-생활비 받았지?

‘··················..’

-상식아? 못 받았어?

‘받았어, 근데 너무 적어.’

-상식아, 너 한달에 생활비를 만 달러나 보내주는데 학생이 무슨 돈을 그렇게 써?

‘아! 엄마가 몰라서 그렇지! 여기 물가가 얼마나 비싼데!’

한달에 만 달러. 젠장, 한달 생활비가 천만원이 넘는 거냐? 근데 그게 적다고? 말을 잇지 못하는 엄마에게 소리친다.

‘나 차 필요해.’

-차?

‘어, 여기 한국이랑 달라, 차 없이는 동네 슈퍼도 못 가.’

-그래? 그런데··· 4개월 후에 돌아오는데 굳이···

‘아! 나 불편하다고! 돈 보내줘.’

-어··· 아빠한테 말하면 주실 거야. 얼마나 필요하니?

‘십 오만 달러.’

-뭐? 무슨 차를 그렇게 비싼 걸 산다고.

‘여기 애들 수준이 있지. 나 다른 새끼들한테 무시당하기 싫어.’

-하··· 일단 알았다. 아빠랑 상의해 볼게.

‘빨리 보내, 아들 창피하니까.’

-그래···

나는 전화를 벤치에 던진 후 의자에 녹아들 듯 누워 버린다. 뭐 이런 호로 새끼가 다 있지? 한달에 생활비를 천만원도 넘게 쓰는 놈이 차 산다고 거의 2억이나 되는 돈을 더 달라고? 아, 요즘은 환율이 올랐으니 더 하겠구나. 그때, 내 눈 앞에 보이는 거대한 라스베이거스 전경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뭐야! 이게 끝이야? 안돼! 내가 필요한 기억은 이게 아니라고!!’

손발을 허우적대 봤지만, 그건 내 생각 안에서 이루어진 행동이다. 나는 타인의 기억 안에서 내 의지를 행동으로 발현할 수 없다. 빙글빙글 도는 세상. 극심한 어지러움은 할 수 없이 내 눈을 감기게 한다.

“·········.현순경?”

귀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문이 열려 있고 변호사를 대동한 마약수사대 형사가 날 부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직 정신이 없지만 필사적으로 멀쩡한 척하며 답했다.

“아, 예.”

변호사가 뒤에서 얼굴을 드러낸다. 김상식이 질질 짜고 있는 모습을 본 변호사가 으르렁거린다.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분명히 제가 없는 사이에 취조는 불가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마약수사대 형사가 곤란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나는 얼른 일어나 취조한 것이 아니라 말하려 했지만 김상식이 한발 빨랐다. 눈물을 훔친 김상식이 훌쩍이며 말했다.

“됐어요.”

변호사가 형사의 눈치를 보며 얼른 김상식에게 다가온다.

“정신이 돌아오십니까?”

“···············..”

변호사가 자꾸 형사 눈치를 보며 말했다.

“온 정신을 유지하실 때도 있다고 미리 말씀드렸었죠?”

형사는 어차피 연기라는 걸 알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예, 예. 압니다.”

변호사가 날 힐끔 보며 김상식에게 물었다.

“저 순경이 뭐라고 했습니까?”

김상식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위로해 줬어요. 부모님 사건 들었다고.”

“··················.”

변호사가 다시 날 바라본다. 그리곤 다시 김상식에게 물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예.”

변호사가 한숨을 쉰 뒤 날 보며 으르렁거린다.

“나중에 CCTV를 확인해 볼 겁니다. 만약 의뢰인의 말씀과 현실이 다를 때는 각오하세요.”

뒤져 봐라, 이 새끼야. 진짜 위로 밖에 안 했다. 근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이 돌팔이 변호사야. 이 개고생을 하고 들어왔는데 결국 저 망나니 새끼 도박하는 기억 밖에 못 읽었다고! 내가 입술을 깨물고 있자, 마약수사대 형사가 무릎으로 날 툭 밀치며 말했다.

“현순경? 뭐해? 일 끝났으니 나가 봐.”

“··················”

나는 주춤대며 일어났다. 아니,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더는 시간을 끌 명분이 없었으니까. 취조실을 나오는 도중 뒤에서 변호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단 보내주시죠? 아까 말씀드린 사유로 병원에서 불구속 수사를 받겠습니다.”

문이 닫힌다. 젠장, 이대로 끝인가?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모니터실로 돌아왔다. 회전의자에 앉아 목 뒤로 깍지를 끼고 있던 최영현이 한심하단 눈빛을 쏘아 보낸다. 그렇게 보지 마, 이 돼지 새끼야. 지금 나도 죽고 싶으니까. 하지만 최영현은 내 마음 속 바람을 무시하고 쏘아붙인다.

“도대체 뭐하는 거요?”

“··················..”

“아니, 순경 옷까지 갈아 입고 들어가길래 뭘 하나 했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유감입니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우는 김상식 보면서 멍 때리다 그냥 들어와요? 뭐 하러 들어간 겁니까, 도대체?”

“·····················”

최영현은 날 몰아붙이다 결국 한숨을 쉰다.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의 표정에서 이래서 경대 출신 애송이랑 일하는 게 아닌데 하는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변론도 제시하지 못했다. 내가 억지로 벌인 이 행동에서 건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최영현은 회전의자에 뒤통수를 기대고 빙글빙글 돌았다.

“하, 아아아!! 미쳐 버리겠네, 지미!”

최영현이 머리를 마구 쥐어 뜯으며 말했다.

“하다 못해 범행 동기라도 밝혀내야 일을 시작하기라도 하지! 부잣집 돼지 새끼가 뭐가 부족해서 지 부모를 죽였냐 이 말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나. 그것은 날 도와준 주변인들의 믿음을 배신했기에 가진 죄책감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최영현의 마지막 외침을 듣는 순간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기! 강력한 범행 동기가 있었다!’

김상식은 금융권에 빚이 없었다. 그건 수사 초반부터 확인한 일이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에서 그는 총을 든 괴한들에게 쫓겼다. 그렇다는 뜻은.

‘금융 기록이 남지 않는 도박 빚이 있다. 그것도 미국의 갱에게 사채를 빌려 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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