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75화 (75/328)

제 75 화. 먼저 인간이 되어라 (10)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김상식을 수사하는 것을 막는 그의 친가. 그들이 내세운 변호사들에게 지금껏 강하게 수사권을 주장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다. 바로 김상식에게 존속살인을 할 동기가 없다는 점. 이 부분에 대해 증명하지 못하면 김상식에게 살인에 관한 수사권을 행사하는 것은 어렵다.

최영현이 머리를 마구 털며 중얼거린다.

“이래서 재벌 새끼들은 싫어. 일반인이었으면 벌써 취조 따고 있었겠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재벌 눈치 보기 바쁜 대가리 새끼들 때문에 이 나라가 안 돌아가지, 지미.”

처음부터 이 기억을 알았다면 마약수사대의 도움 따윈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투덜거리는 최영현을 뒤로 하고 모니터실을 벗어났다. 최영현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내가 면목이 없어 말없이 나간 줄 알겠지만 그들이 날 어떻게 보고 있든 상관없다. 나는 그 길로 곧장 이정호 계장의 방으로 갔다.

노크를 하자, 다행히 방에 있던 이정호 계장이 답을 한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 경례를 하자, 이정호 계장이 한숨을 쉰다.

“김재철 의원 왔었다며?”

“예.”

“뭐라고 해? 너 서장 방에 끌려갔다고 하던데.”

“별말 없었습니다, 그냥 공정하게 수사하라고 했습니다.”

이정호 계장은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다 실소를 짓는다.

“지금이야 그렇겠지, 그러다 수 틀리면 이빨 드러내는 게 정치인들 수법이니 조심해라.”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들이밀 겁니다.”

이정호 계장이 멈칫하고 날 바라본다.

“증거?”

“김상식이 존속살인을 할 강한 동기를 찾으면 됩니다.”

이정호 계장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누가 모르냐, 새끼야?”

“FBI에 협조 공문을 띄워 주십시오.”

“뭐?”

이정호 계장이 황당한 얼굴로 되묻는다.

“FBI가 옆집 개 이름이냐?”

“안 됩니까?”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인마? 근데 명분이 있어야 될 거 아냐? 뭐 잡은 정보라도 있어? 신뢰할 수 있는 정보야?”

“·····················.”

하, 이래서 기억을 읽는 건 곤란하다. 뭐라고 설명해야 될까? 이정호 계장은 말을 잇지 못하는 날 째려보다 말했다.

“답답한 건 아는데,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여기저기 들쑤시다가 너 뿐 아니라 강력3반 전체가 다친다. FBI 공조? 그거 했다가 아무것도 안 나오면 사유서를 몇 장이나 써야 되는지 알아? 국가간 공조야, 이거.”

“··················.”

“각설하고, 정보 물었으면 정보의 출처와 신뢰성 검증한 뒤에 다시 와. 그럼 해줄 테니.”

제기랄, 확 강혁 아저씨한테 말해버릴까? 그쪽이 쉬울 텐데. 내 상사가 강혁 아저씨였으면 좋겠다. 이정호 계장이 지갑을 열어 삼만 원을 꺼내 내민다.

“밥이나 먹고 다녀, 인마.”

그래도 욕을 하기 보다 다독이는 이정호 계장. 물론 이건 내 덕에 진급했다는 고마운 마음이 베이스에 있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일 것이다. 나는 그가 내민 돈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이정호 계장은 한숨을 쉰 뒤 일어나 내 주머니에 돈을 쑤셔 넣는다.

“맛있는 거 사 먹고 힘내라. 어려운 거 다 안다.”

“···············..”

“영현이와 일 하는 것도 힘든 거 알아, 그 새끼가 원래 말을 좀 막하는 경향이 있지. 그래도 능력은 있는 놈이다. 그거 하나보고 좌천된 놈 데려온 건 나니까 내가 보증한다.”

이정호 계장이 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가봐.”

“예···”

어떻게 해야 될까? 기억은 항상 옳다. 내가 잘못 해석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분명 이것은 상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진실이다. 이번 기억은 너무나 명확하다. 내가 다르게 해석할 부분이 없는 기억이란 뜻이다. 김상식은 미국에서 빚을 졌다. 부모에게 받은 생활비를 모두 탕진하고도 모자라 빚까지 져 가며 도박을 한 것이다. 이걸 증명해야 된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답답한 상황이다. 바득바득 우겨서 FBI 공조를 받아낼까?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다들 인정할 거다. 물론 결과를 내기 전까지 수많은 갈굼을 당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이정호 계장이 준 돈을 꺼냈다. 그리고 그 순간 돈과 함께 주머니 속에 있던 명함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명함. AB전자 전무이사 이정연의 명함이다. 순간 머리를 스친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나는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업가가 FBI와 연결되어 있을 리가 없지. 이쪽에 부탁해 봐야 헛수고일 것이다.

그럼 내게 남은 게 뭐지? 정말 아무것도 없나?

나는 꽤 오랜 시간 이정호 계장의 방 앞 복도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아무리 발끝으로 바닥을 차 보고, 뒤통수를 벽에 퉁퉁 부딪혀 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하.. 미치겠네.”

결국 휘적휘적 걸어 김상식의 취조실로 돌아온 나. 모니터실 안으로 들어가면 또 최영현이 도끼눈을 뜨고 비아냥거리겠지. 짜증나는 상황이지만 할 수 없다. 일단 이 사건은 그와 함께 파트너로 수사해야 되니까. 호흡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최영현은 없고 마약수사대 형사들만 보인다.

“최영현 경위는 어디 있습니까?”

형사가 밖을 눈짓하며 말했다.

“좀 전에 나갔습니다, 답답해서 술이나 한잔 빨러 간다고 했는데.”

후, 아무리 답답해도 업무시간에 술을 마시러 가냐? 뭐,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 이해는 간다. 나는 고개를 돌려 취조실을 바라보았다. 아직 마약수사 관련 진술이 남았는지 안에는 여전히 변호사가 김상식을 대신해 진술에 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진다. 모니터실에 있던 형사들은 고성이 터지자 번개처럼 몸을 움직여 복도로 우르르 나간다. 얼결에 나도 따라 복도에 나오자 눈에 익은 중년 남자가 자신의 앞을 막은 형사들을 몸으로 밀어내고 있다.

“아니! 내가 내 친척 얼굴 좀 보겠다는데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이거 놔 봐요, 예?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다니까!”

형사들과 몸싸움을 한다고 이길 리가 없는데.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힘을 짜내 형사들을 밀어내는 아저씨. 그는 병원에서 본 이정연의 남편이었다. 그는 형사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도중 날 발견하고 멈칫한다.

“어···? 형사님?”

남자가 난동을 멈추자, 형사들이 내 얼굴을 바라본다.

“아는 사이입니까?”

모두가 날 바라본다. 이런 때는 뭐라고 해야 되는 거지? 일단 상대의 신분을 밝혀주자.

“김상식씨 이모부입니다.”

형사들이 한숨을 쉬며 남자에게 말했다.

“이모부신 건 알겠는데, 그래도 취조 중에 진술실에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아니, 애초에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뻔하다. AB전자가 힘을 썼겠지. 여긴 김재철 국회의원의 개도 있지만 AB전자의 개도 참으로 많이 사는 곳이니까. 남자가 내 쪽으로 오며 말했다.

“형사님, 저 아시죠? 부탁 좀 합시다, 제발 상식이 얼굴 좀 보게 해주세요, 예?”

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표정에 간절함은 없다. 대신 분노가 서려 있다. 이 사람도 증거는 없지만 김상식이 뭔가 저질렀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따로 이야기하시죠.”

내가 남자를 데리고 반대방향으로 걸으며 형사들에게 눈짓했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신호다. 형사들은 날 믿지 못하겠는지 우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고 있다. 나는 남자와 복도를 돌아 나온 후 물었다.

“혼자 오셨습니까?”

“아뇨, 1층에 아내가 있습니다.”

“같이 이야기하시죠.”

1층에서 이정연과 합류해 경찰서에서 가까운 카페로 나와 현재까지 수사에 대해 간략히 말해주자, 이정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상식이가 마약을 한 것 말고는 수사에 아무 진척이 없다는 뜻이군요, 형사님.”

“죄송합니다, 힘든 선택을 해 주셨는데.”

그녀는 자기 조카를 고발했다. 만약 김상식이 살인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면 그녀는 평생 김상식에게 미안함을 지고 살아야 할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것도 발견해 내지 못했다. 이정연과 그의 남편은 한숨만 푹푹 쉬고 있다. 남자가 말했다.

“상식이 보는 건 정말 안 됩니까?”

“죄송합니다.”

“하···”

“그런데 왜 보려고 하시는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남자가 이정연 눈치를 본다. 이정연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말했다.

“묻고 싶었어요.”

“뭘 말입니까?”

“진짜 부모를 죽였는지, 네가 정녕 내 형제를 죽였냐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었어요.”

“··················”

살인범이 ‘네 제가 죽였습니다’라고 답하겠냐? 그건 물어서 뭐 하려고···

이정연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병원에서 이정연을 만났을 때 그녀는 공정한 수사로 반드시 동생 죽음에 얽힌 억울함을 밝혀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런데 지금 이 태도는 뭘까? 마치 김상식이 범인임을 알고 있는 것 같은 행태이다.

“김상식씨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제 착각입니까?”

이정연이 손수건을 꽉 잡는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는 상식이를 아니까요.”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이정연이 손수건으로 코 밑을 훔치며 말했다.

“상식이는 매부를 싫어했어요.”

뭐야? 평소 일요일이면 같이 교회도 가는 사이라고 들었는데. 다 큰 남자 놈이 부모님과 교회를 가는 것을 보고 둘 사이에 특별한 문제점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 경찰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정연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흑, 상식이 동생이···”

김상식의 동생, 지금 중국에서 유학 중이라고 들었다. 소식을 전달했으나 아직 한국으로 들어오지 않은 둘째 아들이다.

“그러니까 상원이가··· 한의대 합격 후에 더 심해졌어요..”

김상식의 동생이 대학에 갔는데 그게 왜? 나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정연이 퉁퉁 부은 눈으로 몇 번 더 눈물을 훔치다 말했다.

“매부의 평생 꿈은 거대 한의학 종합병원을 여는 것이었어요. 자신은 공부가 모자라 약재상이 되었지만 평생노력해 번 돈으로 한의원을 열고 싶어 했죠. 그리고 병원장으로 자신의 아들을 앉히고 싶어했어요. 장남인 상식이가 이로 인해 많이 부담을 느꼈었죠.”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겠다. 그러니까 김중권이 김상식에게 한의사가 되라 압박을 한 것이란 말이지? 그런데··· 김상식은 국내 굴지의 대학인 Y대 출신인데? 그 정도면 공부도 잘 했을 텐데. 순간 김상식의 학력을 떠올렸다. 그는 Y대 경영학과 출신이다. 왜 한의대에 안 간 걸까?

“김상식씨는 경영대에 재학 중 아니었습니까?”

이정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점수가 모자랐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경영대로 갔죠. 사실 눈을 좀 낮추면 다른 학교 한의대에 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학교 명함에 미련을 가지더라고요.”

일명 SKY라 불리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3인방. 한의대에 가려면 SKY라는 명함을 놓치게 된다. 김상식은 이것으로 인해 갈등하다 결국 경영대에 진학한 것이다. 하지만 Y대 경영학과도 대단하다. 이정도면 충분히 자랑스러운 아들이 아닌가? 아무리 부모라도 그렇지 자식의 꿈까지 좌지우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수녀님은 단 한번도 내게 커서 뭐가 되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뭐가 되라고 말한 쪽은 오히려 강혁 아저씨였구나. 이정연은 한참 울먹이다 말했다.

“그런데··· 상원이가 한의대에 합격 후에 북경에 유학까지 가자, 그때부터 매부는 상식이를 한심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이정연의 말을 들은 내 눈이 빛났다. 이것이다. 이게 바로 강력한 살해동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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