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76화 (76/328)

제 76 화. 먼저 인간이 되어라 (11)

이정연이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으며 말했다.

“매부는 평소 아주 가부장적인 사람이었어요, 또 보수적이었죠. 가문이 바로 서려면 장남부터 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상식이에게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았어요. 하지만 기대했던 장남은 아버지로 인한 압박감에 자꾸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고, 오히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꿈에 가까워졌죠.”

자, 정리해 보자. 김중권은 장남인 김상식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길 바랐다. 아, 물론 돈을 번 건 아버지였지만 평소 상인 집안이던 아내 이혜연의 가문을 무시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그는 상행위로 돈을 번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들을 통해 의사 집안으로 변신을 꾀했으나, 장남은 자신의 기대에 못 미쳤고, 둘째가 뜻을 잇자 사랑이 둘째로 쏠렸다는 것이다.

이정연의 손수건이 흠뻑 젖자 남편이 새 수건을 내민다. 깨끗한 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이정연이 말했다.

“상식이를 어학연수 보낸 건 혜연이가 주장했기 때문이에요.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한테 잔소리를 하니 잠깐이라도 도피하라고 미국으로 보낸 거죠.”

내 눈이 빛났다. 김상식의 어학연수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물었다.

“거기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아십니까?”

이정연이 날 힐끔 바라보다 한숨을 쉰다.

“5개월도 못 채우고 다시 돌아왔어요. 아버지 몰래.”

“아버지 몰래 한국으로 왔단 말입니까?”

“8개월 어학연수도 못 채우고 돌아왔다고 하면 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가뜩이나 잔소리 피해 도피성 유학을 간 건데 돈만 쓰고 제대로 이수도 못하고 왔으니 무슨 면목으로 매부를 보겠어요···”

“그럼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김상식씨는 어디서 산 겁니까?”

“혜연이가 돌봐 줘서 호텔에 살았어요.”

호텔이라, 원룸이나 고시원도 아니고 호텔이란다. 역시 돈 있는 집 자식은 다르구나. 그 개 난리를 피워 놓고 기세 좋게 엄마를 졸라 호텔에서 지냈다니.

“혹시 미국에서 무슨 일 없었습니까?”

이정연이 무슨 말이냐는 듯 날 바라본다.

“미국에서?”

“예, 혹시 한국에 와서 김상식씨 태도가 어땠는지 들은 건 없으십니까?”

이정연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답했다.

“있었어요, 혜연이가 그러는데 상식이가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기 찾는 전화 오면 무조건 없다고 하라고 시켰다고 했어요.”

확실 해졌다. 김상식은 미국에서 빚을 지고 마피아에게 쫓기다 못해 한국으로 도망 온 것이다. 하지만 여긴 마피아보다 더 무서운 아버지가 계신 곳이다. 여기서도 그는 숨을 곳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이정연 이사님.”

“네.”

“김상식씨는 미국에서 빚을 졌을 겁니다.”

“··················..”

“그것도 꽤 큰 도박 빚일 겁니다.”

이정연의 남편이 끼어든다.

“무슨 근거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나는 남편을 보지 않고 이정연과 눈을 맞췄다.

“그렇지 않다면 김상식씨가 왜 어머니께 그런 부탁을 했을까요?”

이정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동생과 친한 언니는 뭐든 공유했을 것이다. 김상식이 매달 얼마의 생활비를 원했는지, 차를 구입하겠다고 또 돈을 얼마나 가져갔는지. 안 봐도 알겠다. 김상식의 어머니 이혜연은 아마 아버지 모르게 자신의 돈으로 김상식을 후원했을 것이다. AB전자의 가족이라면 돈은 썩어 넘치도록 있을 테니까.

이정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상식이는 매달 거액의 돈을 생활비로 받았어요. 일반 학생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돈이었어요. 매부가 평소 용돈은 네가 원하는 만큼 써도 된다는 방식으로 키운 아이라 씀씀이가 헤프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박 빚이라니.”

나는 김상식에 대한 기본조사와 내 기억을 맞물려 그녀를 설득할 조각을 맞추었다.

“김상식씨가 이혜연씨께 차를 사야 한다고 돈을 받아간 적 있죠?”

이정연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사님. 나는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김상식씨가 미국에 있는 동안의 자료를 확인했습니다만, 본인 명의 차량구입은 없었습니다.”

“·····················”

결정적인 한방. 도박중독자가 차를 사겠다고 돈을 받아갔지만 본인 명의로 구매한 차가 없다는 말은 결국 그 돈도 모두 도박으로 잃었다는 뜻이다. 사업가라 머리가 좋은 이정연은 내 말을 단번에 알아듣고 눈동자를 흔들었다.

“그, 그럼···”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도 내 말에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묻는다.

“그럼 미국에 요청해서 도박 빚이 있었는지 확인하면 될 거 아닙니까?”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습니다, 모두 제 심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경찰 입장에서는 심증일 뿐이지만 당사자인 두 부부와 기억을 읽은 내게 이것은 확증이다. 이정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 상식이가··· 빚 때문에 매부를 죽였다는 말씀인가요?”

남편과 이정연이 동시에 날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원하는 답을 내어줄 수 없다.

“확실히 하려면 그가 빚을 졌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됩니다. 그래야 동기가 생기고 구속수사를 할 명분이 생깁니다.”

이정연이 내 손을 잡는다.

“말해 주세요, 상식이가 정말 그랬을까요?”

“·····················”

간절한 얼굴.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김상식씨가 존속살인을 저질렀다면 아마 빚 때문이 아닐 겁니다. 자신이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안 아버지가 자신에게 쏟아낼 분노의 화살이 두려웠겠죠. 혼자 호텔방에 누워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했을 겁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두려움은 분노가 되었을 겁니다.”

이정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분노··· 라니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남편이 낙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자기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것이겠지, 아마.”

나는 말없이 이정연을 보았다. 김상식이 도박 빚을 진 것 자체는 살인의 동기라 볼 수 없다. 이정연의 남편 말처럼 그로 인해 아버지께 받을 멸시가 두려운 것이 첫째, 두려움의 뒤에 도사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둘째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가져온 아버지에 대한 불만은 자신의 동생이 한의대에 붙으며 사랑이 옮겨가자 폭발했을 것이다.

이정연은 남편의 말을 듣고 눈썹을 파르르 떤다.

“제가··· 제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하, 한숨이 나온다. 경찰은 나다. 내가 이들을 돕는게 맞는데. 왜 이다지도 대한민국 경찰은 힘이 없을까? 그때 남편이 전화를 꺼내며 말했다.

“FBI. 거기 연결하면 되는 거죠?”

나는 놀란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연결이 되겠습니까?”

남편은 슬픈 눈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전화기를 들고 사라진다. 저 사람 뭐지? 그냥 재벌 가문 여자를 아내로 맞아 호가호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정연이 사라지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AB전자의 힘은 생각보다 큽니다, 형사님.”

“·····················”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기업. 아무리 정경유착이 심한 시대라고 하지만 일개 기업과 FBI까지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부탁하는 건데. 뭐, 재벌로 살아봤어야 알지, 제길.

“AB전자의 힘으로 수사공조도 가능합니까?”

이정연이 슬프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사공조로 가면 국가문제가 되죠. 하지만 거기 우리 사람이 있어요 정보 빼 오는 정도면 충분히 가능해요.”

대단한 집안이구나.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하루면 돼요.”

헐, 미국에서 정보 빼 오는데 하루? 그것도 FBI 정보를? 미친 집안이구나. 이정연이 내 손을 끌며 말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도울 게요. 꼭 혜연이 죽음을 밝혀주세요, 형사님.”

**

다음날, 나는 AB전자의 대단함을 몸소 느꼈다.

이정연의 남편은 정말 하루만에 김상식이 미국에서 진 도박 빚의 자료를 보내왔다. 내 자리에 앉아 팩스로 보내온 자료를 확인해 보니 입이 절로 떡 벌어진다.

‘이게 뭔··· 도박 빚이 30만 달러라고? 한화 4억에 가까운 돈이다. 매달 보낸 생활비와 차량 구입비용까지 합치면 도박으로 잃은 돈은 6억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6억. 보통 사람은 평생 만져볼 수 없는 금액이다. 물론 재벌들 입장에서는 돈 같지도 않은 숫자일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대감을 배신한 김상식의 입장에선 아버지 힘이 없으면 갚지 못할 거대한 빚일 것이다. 도박을 해 따서 갚으려고 했겠지. 그리고 또 잃고, 또 빌려 도전했을 것이다. 언젠가 큰 돈을 따 빚을 탕감하고 떵떵거리며 집에 돌아오고 싶었겠지. 하지만 도박의 신은 그에게 그런 호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FBI의 정보는 꽤 자세했다. 언제 얼마를 빌렸고, 몇 번을 빌렸으며 총액은 얼마이고, 현재 이자를 포함한 빚이 얼마나 되는지. 또한 돈을 빌려준 이는 누구인지. 사채업자의 전과까지 전부 기록되어진 서류이다. 커피 잔을 들고 내 뒤를 지나가던 김연주가 내가 보고 있던 서류를 쓱 보곤 중얼거린다.

“뭐 하세요, 경위님?”

“어, 연주야.”

연주가 내 책상에 걸터앉으며 서류를 눈짓한다.

“영어로 된 서류?”

연주가 내 손에 있던 서류를 쓱 가져가서 확인한다.

“후, 작업 당한 인간이네 이거.”

응? 그게 무슨 말이지?

“작업?’

연주가 서류를 흔들며 말했다.

“여기 봐요. 처음엔 만 달러, 두 번째는 만 이천 달러. 계속 조금씩 큰 금액을 빌리고 있죠?”

“그게 무슨 의미인데?”

“선이자요.”

“선이자?”

“네, 신용 안 되는 사람한테 선이자 미리 떼고 빌려주는 거예요. 그런다고 이자 덜 내는 건 아니고, 기존 이자와 같은 이율을 적용하면서 선이자도 떼는 거죠. 만 이천 달러 빌리면 이천 달러 떼고 실수령액 만 달러. 빌려준 사람이 개인인 걸 보니 사채업자이겠죠. 그럼 이자율 40%쯤 된다 치는 거죠. 3년 지나면 빌린 돈이 두 배로 불어나는 방식이에요.”

김연주는 이러한 수사경험이 있는 모양인지 이 바닥을 완전히 꿰고 있는 얼굴이다. 나는 김연주를 올려보며 물었다.

“그건 사채수법을 말하는 거고. 작업은 무슨 소리야?”

김연주는 모르겠냐는 듯 서류를 흔든다.

“이거 전부 한 사람한테 빌렸잖아요.”

“그런데?”

김연주가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통 사람이 사채업자를 알고 지낼 리가 없죠. 게다가 보통은 한쪽에서 빌린 후에 다른 쪽에서 또 빌려서 탕감하는 방식으로 돈을 돌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계속 한 사람한테 빌린 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

듣고 보니 이상하다. 나 같아도 계속 같은 사람에게 빌리진 않을 것 같은데. 아는 사람이면 몰라, 상대는 마피아다. 마피아가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텐데 김상식은 왜 같은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돈을 빌린 걸까?

김연주가 서류를 내 앞에 놓으며 말했다.

“여기 돈 빌려준 놈과 짜고 돈 빌릴 물주 물어준 놈이 따로 있다는 말이예요. 아마 돈 빌린 사람과 가까운 사람이겠죠. 계속 두면 재산 다 날려 먹고 빚더미에 앉게 될 걸요, 이 사람?”

내 눈이 번쩍 떠졌다. 김상식의 기억에서 읽었던 그 사람. 짧은 머리를 하고 비아냥거리던 젊은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연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처음부터 존스라는 마피아와 짜고 김상식의 돈을 노린 것이다.

김연주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러니 빨리 잡아요. 그래야 이 사람 살아요. 빚 때문에 자살하거나 지 가족도 죽이는 사람 생각보다 많아요. 여럿 목숨 달려 있을지 모르는 사건이니 빨리 해결하시길.”

김연주가 손을 흔들며 제 자리로 돌아간다.

미안, 이미 사람이 죽은 사건이야. 본인이 자살하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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