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77화 (77/328)

제 77 화. 먼저 인간이 되어라 (12)

연주가 돌아간 후 가만히 김상식의 금융기록을 보는 나.

‘연주 말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 기억에서도 그 짧은 머리 남자가 김상식에게 돈 빌릴 곳을 소개해 줬다.’

다시 기억을 떠올렸다. 카지노에서 마피아가 쫓고 있다는 걸 알려주러 온 남자의 말.

'얼마까지 돼?'

'이야기 잘하면 5만 정도?'

'씨발, 그거 가지고 누구 코에 붙여.'

'킥킥, 그래도 이자라도 내면 눈에 불 켜고 쫓아오진 않을 거 아니냐?'

'하, 일단 알았다. 호텔에서 봐.'

'총알에 눈 안 달렸다. 잘 피해 다녀.'

'약 올리지 마 개새끼야.'

'낄낄.'

분명히 그런 놈이 있었다. 만약 이놈이 작업을 해 김상식에게 막대한 빚을 지게 했다면? 이놈을 찾으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정호 계장이 증거에 신빙성이 있을 때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불법적인 경로로 입수한 것이긴 하지만 FBI의 서류. 이게 있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다, FBI가 정식으로 발행한 서류가 아니다.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는 문서란 뜻이다. 이걸로 상부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그때 다시 돌아온 연주가 볼펜으로 내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는 것이 보인다. 고개를 들어보자 연주가 복도 쪽을 눈짓한다. 그런데 그녀의 오른손이 이마 위로 붙어 있다. 경례를 하고 있는 거야, 지금? 급히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만면에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며 날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내가 처음 종로경찰서에 왔을 때 로비 앞에서 처음 만났던 사람. 그는 정지훈 계장, 아니 이제 차장이다. 나는 주춤주춤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이정호도 계장 진급 후 사무실까지 내려오는 일이 거의 없는데 차장이 사무실까지 내려올 일이 무엇일까?

정지훈 차장이 날 가만히 바라보다 김연주에게 말했다.

“김 경사.”

“예, 차장님.”

“이 친구와 잠깐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은데.”

김연주는 슬쩍 주변을 본 후 이정호가 반장 시절 쓰던 방을 가리켰다.

“이정호 계장님 방이 비어 있습니다.”

“음, 고맙네.”

정지훈이 내 파티션을 손톱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잠깐 나 좀 봐.”

“예, 차장님.”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나? 젠장, 잘못한 것이 한두 개여야 예상을 하지. 일단 무려 2선 국회의원인 김재철에게 무례를 범했고, AB전자 전무이사를 동원해 FBI 문서를 빼냈고, 김상식 우선 검거를 위해 마약수사대를 들쑤셨다. 하, 생각해보니 그 중 하나만 들켜도 모가지 잘릴 수도 있겠구나.

하도 지은 죄가 많다 보니 변명이 정리되질 않는다. 어떤 걸 물어볼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한 마음이다. 에라 모르겠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을 뿐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자. 막말로 형사가 범인 잡겠다고 몸부림치다 그랬다는데 설마 제 식구 안 감싸주겠어?

정지훈 차장은 이정호의 방에 들어온 후 모든 블라인드를 닫고, 문을 잠근다. 뭔가 단단히 벼르고 있는 모양이다. 구석에 서서 우물쭈물 하는 날 힐끔 본 정지훈이 비어 있는 소파를 눈짓한다.

“앉아.”

“예.”

정지훈이 아무것도 없는 사무실의 소파에 앉은 후 정자세로 앉은 날 지그시 바라본다. 한참을 아무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정지훈.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긴장감이 높아진다. 차라리 빨리 말해, 이 양반아.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는데 너무 질질 끄는 건 학대라고.

정지훈은 그후로도 한동안 날 가만히 바라보다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정호한테 들었다. FBI 공조 수사를 요청했다고.”

“···············”

뭐지? 내가 생각했던 질문지와 다른 질문이다. 아직 모르고 있는 건가?

“예, 맞습니다.”

“뭘 봤냐?”

뭐긴 뭐야, 김상식 그 새끼가 도박하다 빚진 걸 봤··· 자, 잠깐 이 사람 방금 뭐라고 했지? 내가 놀란 눈으로 정지훈을 보자 그는 복잡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현도경.”

“···············..”

“뭔가 봤지?”

뭐야? 무슨 의도로 묻는 거지? 설마 내가 남의 기억을 읽는다는 것을 알고 질문할 리는 없고. 이 사람 질문에 담긴 의도를 파악해야 된다. 결정적인 증거를 상부 공유 없이 혼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제일 평범하면서 개연성 있는 흐름이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일단 모른 척 발뺌했다. 정지훈은 손톱으로 소파 팔걸이를 톡톡 치며 날 한참 바라본다.

“도경아.”

“예, 차장님.”

내 속에 있는 연기자의 영혼을 끌어 모아 필사적으로 ‘난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연기를 시전 중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것도 아니고, 믿는다고 해도 설명하기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정지훈은 그런 날 바라보며 관자놀이를 어루만진다.

“나··· 기억 안 나냐?”

뭐가 기억이 안나? 당신 누군지 알아. 종로경찰서 차장, 정지훈이잖아.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건가?

“압니다.”

“내 현재 직함 말고, 인마.”

뭐지?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 이 양반아!

정지훈은 날 바라보고 있더니 갑자기 몸을 틀어 옆모습을 보여준다. 한 손으로 뭔가 문을 여는 시늉을 하는 정지훈이 날 보며 말했다.

“현도경?”

뭐지 이 맥락 없는 대화는? 뭘 하는지 몰라 가만히 있었더니 정지훈 차장이 다시 말했다.

“맞아?”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잇는다.

“강혁 차장님 알지?”

나도 모르게 되묻는 듯 말했다.

“어?”

“알아, 몰라?”

“압니다.”

“차장님이 너 빨리 데려오라고 보냈다. 타.”

이런 것을 데자뷰 현상이라고 불렀던가? 이 대화 분명히 어디선가 했던 기억이 나는데. 정지훈이 이래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쉰다.

“중학교 2학년 남자 놈 태우고 시내 질주하던 형사. 기억 안나?”

내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다. 순간적으로 중학교 2학년 때 겪은 신정희 사건이 스쳐가고, 학교 앞에서 날 태우고 강혁 아저씨에게 데리고 간 젊은 형사의 얼굴과 정지훈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 그때 그···?”

정지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

그때 그 젊은 형사님이 정지훈 차장이라고? 제일 막내 같아 보였는데 그때 형사님들이 총 몇이었더라? 넷이었나? 그럼 아직 다들 현역으로 계실 수도 있겠다. 반가운 마음에 이제라도 하지 못한 인사를 하려던 찰나 내 머리를 스쳐가는 정지훈의 질문 하나.

‘뭘 봤냐?’

이 사람. 조금 전에 분명히 뭘 봤냐고 물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때 취조실에서 내가 상대의 기억을 읽는 것을 목격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의 퍼즐이 맞추어 지고 나니 이상한 점이 하나씩 해결된다. 종로경찰서에 처음 도착한 날. 경위 나부랭이가 첫 출근했다고 계장이나 되는 양반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그냥 인사만 받고 관심 꺼도 되는 날 데리고 굳이 흡연실까지 가서 조언을 해줬던 것. 그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나는 정지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정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음.”

“강혁 아저씨와 아직 밀접하게 지내시는 모양입니다.”

“아니, 이쪽으로 발령 후엔 일년에 한번쯤 따로 술자리 가지는 정도다.”

강혁 아저씨와 딱히 가깝게 지내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도 10년 전에 봤던 꼬마를 한번에 알아봤다고? 정지훈이 손 깍지를 끼며 말했다.

“사실 강혁 차··· 아니, 이제 국가수사 본부장님이지. 그 분께 네 소식을 여쭙긴 그분과 내 격차가 너무 크다. 짬도 안 되는 내가 감히 그분께 뭘 여쭐 자격도 안 되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널 지켜봤다. 경찰대 입학한 것도, 수석졸업을 한 것도 봤다. 네가 군대가기 전까진 쭉 지켜봤지.”

그러니까 왜? 왜 날 지켜봤는데? 내 미심쩍은 눈빛을 본 정지훈 차장이 실소를 짓는다.

“인마, 그때 사건 기억 안 나냐? 네 입장에서는 강혁 본부장님과 대화한 기억이겠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우린 어땠을 것 같아? 갑자기 뚝 떨어진 중학생 녀석이 사건을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말하는데. 그런 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 이 사람은 그때 모든 걸 들었지. 그래, 그걸 봤으면 내 능력에 대해 알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지켜본 것이구나. 정지훈이 주먹을 꾹 쥐며 말했다.

“널 지켜보며 경찰이 되면 정말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강혁 본부장님이 먼저 움직이셨지. 나는 그저 지켜만 보면 됐었다.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넌 결국 이 자리까지 왔고.”

그랬구나. 나는 천애고아라 내 옆엔 수녀님 말고 어른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날 지켜봐 준 사람이 또 있었구나.

“다른··· 형사님들은 어디 계십니까?”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살고 있지. 가끔 모이면 네 이야기를 한다. 그때 그 녀석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직도 남의 과거를 보고 있는 걸까? 라는 질문을 술에 타 입에 털어 넣고는 하지.”

내 능력을 아는 사람들. 다들 어디에, 어떤 자리에 있을까? 정지훈이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어제 강혁 본부장님께 전화를 받았다.”

강혁 아저씨 이야기가 나오자 내 몸이 반응한다. 움찔 놀란 내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무슨 전화 말씀입니까?”

정지훈이 한숨을 쉰 뒤 웃으며 말했다.

“새꺄! 다 아는 새끼가 언제까지 손 놓고 있을래? 알면 적극적으로 도와!! 라고 했지.”

하하, 강혁 아저씨 다운 화법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아버지 같은 사람. 나는 답답했던 기분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진 정지훈의 말에 나는 기분 뿐 아니라 잔뜩 꼬인 이 상황까지 풀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FBI 공조, 내가 받아준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김상식이 도박 빚을 졌다는 걸 확인해 주면 되는 거지?”

“아··· 그건 이미 확인했습니다.”

“음?”

정지훈은 나에 대해 안다. 또한 강혁 아저씨와 밀접하다. 이 사람은 믿어도 된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말했다. 한참 내 이야기를 듣던 정지훈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FBI 문서를 비밀리에 빼돌렸다고? 그것도 재벌의 힘을 빌려서?”

“재벌보다는 피해자 유가족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습니다.”

“유가족이 재벌이지, 인마. 그게 그거잖아, 아오.”

정지훈은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쓰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 짧은 머리 남자 놈을 찾아야 된다는 건데. 이름도 모르고?”

알았다고 해도 잡을 방법이 없었겠지만 진짜 모른다.

“예, 인상착의만 압니다.”

“하, 그럼 무슨 수로 잡지?”

어떻게 잡아야 될까? 기억 속에 뭔가 힌트가 없을까? 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렸다. 정지훈은 내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자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말없이 팔짱을 끼고 기다린다. 김상식이 벤치에서 엄마와 통화를 하던 부분부터 거꾸로 흐르는 기억. 기억 속에 혹시 놓친 단서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필름을 거꾸로 돌리던 나는 맨 첫 기억으로 돌아왔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들렸던 카지노의 백색 소음. 그리고 그 속에서 본 카지노의 이름. 나는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Golden Nugget Hotel & Casino! 거기 CCTV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김상식과 블랙잭 좌석에서 이야기를 나눈 짧은 머리의 동양 남성을 체포하도록 공문요청 부탁드립니다, 차장님!”

불가사의한 일을 목격하고 있는 정지훈 계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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