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 화. 먼저 인간이 되어라 (13)
이틀 뒤, 인천국제공항 국제선 출구.
나는 뚫어지게 국제선을 탄 관광객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는 게이트를 노려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흘리는 소음들 속에서 오늘 아침 출근과 동시에 내 자리를 찾아온 정지훈 계장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이름 제임스 박. 나이 26세다. 사기, 폭행치사 전과 5범이야. 김상식과는 샌프란시스코의 술집에서 만나 친해진 사이고, 이후 라스베이거스로 함께 와 작전을 짠 모양이다.’
‘제임스 박과 마피아의 관계는?’
‘제임스 박도 예전에 작전에 당해 빚을 진 놈이야. 마피아와 한패라고 하기 보다 자기 빚 탕감을 목적으로 마피아를 돕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검거했습니까?’
‘아니, 대한민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고 한다.’
‘언제요?’
‘네 시간 전에. 바로 인천공항으로 가. 에어 캐나다 713 편이다.’
정지훈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국제선 출구를 노려보고 있는 내 눈에 기억 속에서 본 한국남성이 보인다. 선글라스를 쓰고 베이지 색 바바리 코트를 입고 있다. 그리고 그의 뒤로 비슷한 선글라스에 가죽 점퍼를 입고 있는 근육질의 대머리 백인 남성 셋이 보인다.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니 같은 패거리로 보인다.
나는 내가 읽은 기억을 토대로 상황을 유추했다.
‘빚을 진 김상식이 한국으로 도피하자, 제임스 박을 앞세운 마피아 패거리가 그를 잡으러 온 것이다.’
제임스 박도 피해자라고 했다. 어떡하든 저 남자를 확보해야 한다. 나는 공항경비대에 신분증 보여준 후 말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예, 경위님. 뭘 도와드릴까요?”
“저쪽에 한국인 남성 한 명과 백인 셋 보이죠?”
“예.”
“잠깐 백인들 시선 좀 돌려주세요. 적당히 ID카드 검사 정도라고 하시고.”
“그것만 하면 됩니까?”
“예, 시간만 끌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곧 공항경비대 다섯 명이 백인남성들을 둘러싸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품 속에 손을 넣었다가 막 공항에서 내려 총기를 휴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양손을 든다. 제임스 박은 공항경비대가 일행을 포위했지만 자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눈치채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나는 미리 제임스 박과 가까운 기둥 뒤에 서 있다 이쪽으로 뒷걸음질 치는 그의 뒷목을 잡고 확 끌었다.
“헉!”
“쉿.”
곁눈질로 날 바라본 제임스 박이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경찰입니다.”
“··················..”
“지금 검문 중인 저 사람들. 마피아 맞습니까?”
“··················..”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마피아에게 잡혀 다른 사람들에게 작전을 펴 등 쳐 먹고 사는 지금의 인생에서 구제해 줄 수 있다. 내가 가진 패는 이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제임스 박은 몸부림을 쳐 날 떨어뜨린 후 째려보며 말했다.
“선량한 사람한테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저 사람들 그냥 제 미국 친구들입니다. 요즘 한국여행 붐이 일어서 한국에 가보고 싶다는 친구들 초대해 왔는데 여행 시작부터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뭐지? 너도 피해자라고 들었는데. 저 사람들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거 아니야? 나는 갑작스러운 제임스 박의 반응에 당황했다. 제임스 박은 백인 남성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겁니다. 다 신원 확실한 사람들입니다.”
확실하겠지. 확실한 위조 여권을 가지고 왔을 테니까. 이 방법으로는 안 되겠다. 나는 순간적으로 제임스 박의 손목을 낚아챈 후 수갑을 걸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내 손목에 걸었다. 그러자 제임스 박이 발악을 한다.
“이게 뭣 하는 거냐고!”
지나는 행인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 쪽을 본다. 검문 중인 백인남성들도 이쪽을 보고 있다. 나는 기둥 뒤에 숨은 뒤 제임스 박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가 소리친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지 않습니까!”
나는 제임스 박을 질질 끌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행인들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지나는 공항경비대들이 막아 섰지만 그때마다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며 길을 열었다. 주차장까지 제임스 박을 끌고 와 내 차 조수석에 쑤셔 박고 안전 바에 수갑을 채운 난 차를 빙 돌아 운전석에 탔다.
제임스 박은 여전히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한국 경찰은 원래 이런 식으로 일을 합니까? 이거 이래도 되는 거냐고! 당장 풀어!”
이 사람. 왜 이러는 걸까? 마피아의 손에서 구해주겠다는데. 뭔가 약점이라도 잡힌 걸까? 지금은 알 수 없다. 문제는 이 사람을 오래 잡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회유가 안 된다면 협박을 할 차례다.
“제임스 박.”
“뭐!”
나는 FBI에서 빼돌린 문서를 보여주며 말했다.
“사기, 폭행치사 전과 5범.”
제임스 박이 흠칫 놀란다. 서류에 FBI의 이름이 찍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공식 서류가 아니므로 홀로그램 직인이 없지만 그 부분은 살짝 가렸다.
“그, 그게 뭐! 이미 감옥 다녀왔는데! 그리고 난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야! 당장 미국 대사관 연결해줘! 너 내가 가만 안 놔둬!”
“··················”
제임스 박이 수갑을 마구 때린다.
“놔! 당장 가야 된다고!”
당장 가야 된다? 저 녀석들과 떨어지면 안될 무슨 이유가 있구나. 나는 가만히 발악하는 제임스 박을 보다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갑작스러운 내 말에 움직임을 멈추는 제임스 박.
“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 여기 묶어 두고 아무것도 안 한다고. 그러니 발악할 필요 없어.”
제임스 박의 얼굴이 구겨진다.
“그럴 거면 왜 데려왔냐고! 나 당장 가야 된다니까! 이거 풀어, 이 새끼야!”
나는 검지를 까닥이며 말했다.
“너 미국에서 수배 명단에 올랐어.”
이건 사실이다. 우리 쪽 공문을 토대로 제임스 박을 조사하던 FBI가 제임스 박이 도박사기를 벌였다는 사실을 확인 후 수배전단을 뿌렸기 때문이다. 놀란 얼굴의 제임스 박을 바라본 난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미국 가면 재판 받아야 돼. 그러니 내가 할 일은 따로 없지.”
“무, 무슨 죄목으로?”
“몰라서 물어? 도박 사기.”
“젠장···”
제임스 박은 눈동자를 굴리다 다시 인상을 쓴다.
“그, 그거랑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관이야? 당장 풀어! 난 해야 될 일이 있다고!”
나는 팔짱을 낀 후 운전석 시트를 뒤로 젖혔다.
“어, FBI가 널 데리러 올 때까지 난 여기서 가만히 있을 거야. 지금 비행기 타고 출발해도 20시간은 걸리겠지, 아마?”
제임스 박의 얼굴이 흙빛이 된다.
“2··· 20시간?”
“어, 꼼짝 말고 있어. 난 국제수사협조 공문대로 하는 거니까.”
공문은 개뿔. 우리 쪽에서 보낸 건 있어도 그쪽에서 보낸 건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좋은 협박의 패가 될 것이다. 나는 깜빡 했다는 듯 말했다.
“핸드폰 있지? 너도 경찰 쪽에 줄 있을 텐데 확인해 보던가.”
제임스 박이 급히 안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것이 보인다. 그냥 찍었는데 진짜 줄이 있나 보다. 곧 그의 핸드폰이 울리고 다시 액정을 확인한 그가 인상을 쓴다.
“제기랄!”
마구 몸부림을 치는 제임스 박. 나는 느긋하게 앉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급한 건 오히려 내 쪽이지만 이 싸움에서는 조급함을 보이는 쪽이 지는 거다. 제임스 박은 한참 난동을 피우다 지쳐 불쌍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혀, 형사님···”
“어?”
“제발 저 좀 보내주세요.”
“나가도 어차피 잡혀. 답장 봤을 거 아냐? 수배된 거 맞지?”
“후···”
“그냥 얌전히 있다가 잡혀 가라, 귀찮다.”
“형사님!”
“아, 왜?”
“저 지금 안 가면 큰일 납니다.”
“지금 가도 큰일 나고, 나중에 가도 큰일 나.”
“그게 아니라!”
제임스 박은 잠시 고민하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미국에··· 가족이 있습니다.”
“··················”
그러니까 가족도 있는 놈이 왜 도박에 빠져서 작전을 당한 것도 모자라 무고한 사람들까지 끌어 들여서 같이 당하게 만들어? 제임스 박이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제가 연락두절 되면 그 놈들이 제 가족들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 있다고? 이런 개새끼들. 아, 앞에 있는 놈도 같은 개새끼인 건 마찬가지지만. 나는 잠깐 마음이 움직였지만 억지로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왜 죄를 짓고 사냐? 다 네 책임이지.”
“형사님! 제발 좀!”
나는 눈을 감고 잠든 척을 했다. 제임스 박은 날 어쩌지 못하고 빌기 시작한다.
“형사님, 미국 가서 감옥을 가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가 사라지면 제 가족들이 위험해 집니다.”
음, 완전 개새끼는 아닌 건가? 그래도 지 가족은 지키려고 하네. 남들을 도박의 위험에 빠뜨리긴 했지만 지 가족까지 죽인 김상식보다는 나은 개새끼인가 보다.
나는 실눈을 뜨고 제임스 박을 바라보았다. 간식 바라는 강아지처럼 간절한 눈빛을 한 제임스 박. 나는 그의 가죽 가방을 힐끔 보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걸 준다면 생각해 보고.”
제임스 박은 눈을 크게 뜨며 득달같이 물었다.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진즉 말씀을 하시지! 뭡니까? 뭘 드리면 됩니까?”
“김상식 도박 빚 증명 서류.”
“··················”
“그 새끼 돈 받으러 온 거지? 서류 챙겨서 말이야.”
김상식을 잡으러 왔을 거다. 김상식에게 더 이상 돈이 없다는 걸 알고 왔으니 그의 부모를 협박해서라도 돈을 받아갈 속셈으로 왔을 것이다. 당연히 관련 서류도 챙겨왔을 것이고. 제임스 박은 고민하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주면 풀어 주실 겁니까?”
“어, 바로 풀어준다”
“이 자리에서 바로?”
“어, 약속한다.”
고민하는 제임스 박. 그때 그의 전화기가 울린다. 액정을 보곤 얼굴이 흙빛이 된 제임스 박. 아마 공항에서 헤어진 마피아들의 전화인 모양이다. 그가 다급하게 가방을 뒤져 서류를 꺼내 내민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누운 채로 힐끔 서류를 바라보았다. 원금과 이자를 합해 백만 달러. 12억가량 되는 돈이다. 내 예상보다 많구나.
“진짜 서류 맞아?”
제임스 박은 진동을 울리는 전화 덕에 마음이 급해졌는지 서류 하단을 마구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이 직인 보이시죠? 미국 법률 사무소 직인입니다. 은행 대출이 아니라 법률사무소에서 받은 공증 서류 맞아요. 확인해 보세요!”
나는 핸드폰을 꺼내 서류 사진을 찍은 후 관우에게 확인을 요청한 뒤 다시 벌렁 누웠다.
“기다려, 확인하고 보내줄 테니까. 전화는 받지 그래?”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 긴장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은 제임스 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Jones, it's me. I'm sorry, the bathroom is urgent. I'll be back soon."
제임스 박이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내 전화만 뚫어지게 본다. 십 분이 지나자 관우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어, 관우야.”
-예, 형님. 이거 법률사무소 엄청 유명한 곳이네요. 진짜 서류 맞아요. 근데 이게 도대체 뭐···.
“알았다, 나중에 설명하마.”
전화를 끊자 제임스 박이 얼른 묻는다.
“맞죠? 진짜 서류 맞다고 하죠?”
나는 말없이 수갑 열쇠를 던져주었다.
“가라.”
제임스 박은 얼른 수갑을 벗고 공항으로 뛴다. 잘 가라, 미국 돌아가면 어차피 구속이라 밀항이라도 하고 싶겠지만 가족 살리려면 미국으로 돌아가서 얌전히 감옥 가야 될 거다.
나는 제임스 박이 준 서류를 조수석에 곱게 놓아둔 후 씩 웃었다.
“자, 이제 김상식 구속하러 가볼까? 이번엔 마약수사대가 아니라 강력계 진술실에서 보자, 김상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