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 화. 먼저 인간이 되어라 (14)
제임스 박의 서류를 토대로 김상식에게 존속살인의 동기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이정호 계장에게 가 수색영장을 발부 받았다. 하지만 재벌 가문 답게 그들이 보유한 변호사는 가만 있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김상식씨는 장남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아버지 재산을 물려 받을 권리가 있는 입장이라는 뜻입니다, 형사님. 그런 사람이 왜 빚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겠습니까? 굳이 논리적인 사고를 하지 않더라도 앞뒤가 전혀 맞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변호사는 역시 변호사다. 테이블을 때리거나, 흥분한 기색 없이 차분하게 말하는 변호사. 나는 변호사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체포되어 취조실에 끌려온 김상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김상식씨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김상식은 여전히 휠체어에 앉아 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여자친구와 낄낄대며 통화하던 녀석이 휠체어를 타고 멍한 얼굴로 정신을 잃은 사람 흉내를 낸다. 물론 저것도 변호사들이 시켰을 것이다. 변호사가 내 시야를 가리며 얼굴을 들이민다.
“마약수사대 쪽에 말씀드렸습니다만, 현재 제 클라이언트는 온전한 정신이 아닙니다. 저에게 말씀해 주시죠.”
나는 실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왜 온전한 정신이 아니죠?”
변호사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화재로 인해 부모님과 조카가 끔찍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홀로 불길 속에서 살아 남았다는 자책감, 한순간에 부모님을 잃은 충격과 공포감 때문입니다.”
나는 변호사가 가리고 있는 김상식의 눈을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변호사가 다시 자리를 움직여 내 시야를 가린다.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이후 진술은 저에게 들으시죠.”
이미 작전을 짜고 들어왔겠지. 좋아, 뭐라고 변명하는지 들어나 보자. 나는 자료를 내밀며 말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활동 중인 마피아 조직원 중 존스 버홀티라는 사람이 미국 법률사무소 슈츠(Suits)에 의뢰한 공증 서류입니다.”
변호사가 서류를 검토한다. 법률사무소 직인이 제대로 찍힌 정식 서류이므로 법적 문제소지가 전혀 없는 문서다. 꼼꼼하게 확인을 마친 변호사가 말했다.
“저희 쪽에서 확인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뭘 확인하죠?”
“이 문서가 진짜인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문서의 진위를 부정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일단 문서 진위부터 파악을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빚을 진 것이 사실이라면 파악이 필요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
변호사는 일단 시간을 끌 목적으로 이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를 수렁으로 몰고 갔다. 변호사는 잠시 김상식과 눈빛을 교환한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김상식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 좀 더 흔들어 보자.
“변호사님에게 진술을 들어야 한다··· 좀 곤란하네요. 변호사님은 평소 김상식씨의 친분관계를 다 알고 계십니까?”
변호사는 인상을 찌푸리고 답한다.
“무슨 뜻입니까?”
“제가 한 인물에 대해 물어야 하는데. 변호사님이 과연 그 인물에 대해 알고 계실지 걱정이 돼서.”
“그게 누구입니까?”
나는 초점 잃은 연기 중인 김상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임스 박.”
김상식의 홍채가 순간적으로 커지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연기를 이어 나가는 김상식이다. 변호사가 끼어 들며 물었다.
“그게 누구입니까?”
나는 서류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김상식씨께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을 소개해준 사람입니다.”
변호사의 표정이 변한다. 똑똑한 사람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 것이다. 지금 나는 김상식이 빚을 졌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으며, 누가 사람을 소개해줬는지, 누구에게 빌렸는지에 대한 증거까지 모조리 확보했음을 고지한 것이다. 변호사는 코를 살짝 찡그린 후 잠시 말이 없다. 나는 변호사를 바라보며 손 깍지를 꼈다.
“변호사님.”
“예.”
“라스베이거스에 가 보셨습니까?”
“예?”
“가 보셨냐고 여쭈었습니다.”
“그게··· 출장 때문에 두 번 가봤습니다만.”
“혹시 Golden Nugget Hotel & Casino 라는 곳. 가 보셨습니까?”
내 입에서 카지노 이름까지 나오자 김상식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포착된다. 초점 없는 눈빛에 경악이 떠올라 있다. 변호사는 내가 갑자기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감을 못 잡다가 김상식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현재 의뢰인의 상태가 극도로 좋지 못합니다. 잠시 취조를 중단하고 주치의를 불러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의도가 매우 뻔하다. 하지만 용의자가 아닌 범죄자라 할지라도 건강 상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의사의 진료를 받게 해주는 것은 법에 명시된 인권 법률이다. 만약 여기서 더 밀어붙였다가 이걸로 걸고 넘어지면 골치 아프다. 나는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부르세요, 의사.”
변호사는 날 노려보다 전화기를 든다. 의사에게 전화를 하려던 그는 날 힐끔 보며 말했다.
“잠시 취조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 드린 바 있습니다만.”
난 팔짱을 끼고 씩 웃었다.
“취조 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변호사가 눈썹을 꿈틀거린다.
“나가 달라는 뜻입니다. 또한 변호사로서 정식 요청합니다. 휴식 시간 중에는 취조실 카메라 및 녹음 장비를 오프 상태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정식 고지로 만약 불법적인 녹취 정황이 확인되면 법정에서 법적 증거로 채택할 수 없음을 고지 드립니다.”
대단하다, 우리 나라 변호사. 그래, 뭐 어쨌건 빚을 진 건 너무나 명백하다. 그러니 이걸 부정해 빠져나갈 방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예, 그렇게 말씀하시면 나가겠습니다. 진술이 가능할 때 다시 불러주세요. 아,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김상식씨는 사건에 중요한 용의자입니다. 진술이 끝날 때까지 병원으로 돌아가실 수 없으니 시간을 끄는 행동은 구류 시간을 더 늘어나게 할 뿐이라는 것. 잊지 마세요.”
변호사는 날 죽일 듯이 노려본다. 이 상황에서도 열심히 연기 중인 김상식을 힐끔 봐 준 뒤 실소를 지으며 취조실을 나서자, 문 앞 복도에 기대 팔짱을 끼고 있는 최영현이 보인다.
“오셨습니까?”
“··················.”
말없이 날 바라보고만 있는 최영현. 잠깐 그가 말할 시간을 주었지만 말이 없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후 모니터실로 향했다. 녹음, 녹화는 하지 못해도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도는 지켜보고 있어야 하니까. 모니터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뒤에서 최영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나는 말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날 노려보고 있던 최영현이 다시 물었다.
“저 새끼 미국에서 빚진 거 어떻게 알았습니까?”
놀랍겠지. 넌 나가서 답답한 마음에 술이나 빨고 있었는데 난 여기까지 수사를 진행시켰으니까. 하지만 저 질문에 진실을 알려줄 순 없다.
“김상식씨 계좌 확인하셨죠?”
“···············..”
“잔액이 얼마였습니까?”
최영현이 날 노려보다 답했다.
“2,360원이었습니다.”
난 문고리를 놓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재벌 집 장남 계좌에 잔고가 2,360원이라는 거.”
“·····················”
최영현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나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확인하셨겠지만 그 계좌에는 김상식씨 어머니 이혜연씨 명의로 주기적인 입금이 있었습니다.”
최영현도 봤을 거다. 그가 슬쩍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내가 다시 말했다.
“그는 미국으로 8개월 단기 어학연수를 갔습니다. 이혜연씨가 입금한 돈은 생활비였습니다.”
최영현이 그게 뭐? 라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그의 앞에 섰다.
“매달 만 달러, 그리고 차를 구매하겠다며 십 오만 달러를 추가 요구했죠.”
최영현은 계좌를 확인했다. 그 액수들이 숫자로 남아 있었기에 내 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선 재벌 엄마가 아들에게 준 용돈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학연수간 학생이 아무리 술집에서 돈을 쓴다고 해도 모든 돈을 다 쓰고 잔고 2,360원이 남은 채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 돈으로 뭘 했을까요?”
최영현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약쟁이 새끼인데, 약 사서 처먹은 거 아닙니까?”
물론 신빙성 있는 이야기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기억을 읽지 않았다면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최영현과 달리 상대의 기억을 볼 수 있다.
“그는 도박에 빠졌습니다.”
“·····················..”
도박 이야기가 나오자 최영현이 팔짱을 푼다.
“근거는?”
나는 주머니 속에서 대출서류를 꺼내 보여주었다.
“미국 법률 사무소, 슈츠의 공증 서류입니다. 빚이 30만 달러나 있군요.”
최영현이 내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 확인하며 눈동자를 흔든다.
“매달 만 달러··· 거기에 차량구입비 15만 달러에 빚이 30만 달러?”
최영현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빚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 금융권이 아닌 마피아의 사채를 썼다는 점을 들어 도박이 아닌가 의심했죠. 아니나 다를까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을 한 증거가 포착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내 말에 논리적 결함이 있는지 다시 한번 체크한 나는 모니터실 방향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이제 됐죠?”
“잠깐.”
“예?”
아직도 의심이 가? 고개를 돌리자 최영현이 심각한 얼굴로 서류를 내밀고 있다.
“이 서류. 어디서 난 겁니까?”
오, 젠장. 그걸 물어볼 거란 걸 왜 생각 못한 거냐? 빨리 답을 생각해 내야 된다. 최대한 당황한 테를 내지 않고 할말을 생각하는 나. 최영현은 그런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그게···”
그때 복도에서 연주가 고개를 쑥 내민다.
“제가 알려드렸어요.”
오, 연주 얼굴이 마치 구세주 같아 보인다. 최영현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확인한 연주가 몸을 드러내며 말했다.
“도박판 짜서 작전 짜는 놈들에 대해 알려 드렸어요. 현 경위님은 제가 알려드린 걸 토대로 김상식에게도 작전이 붙었을 거란 걸 눈치채셨고, 작전 짠 놈을 잡으셨겠죠. 그 서류는 그에게 얻은 것이고. 안 그래요, 경위님?”
최영현이 다시 날 바라본다. 맞냐는 듯 눈짓하는 최영현. 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최영현이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서류를 본 뒤 물었다.
“그럼 이 서류를 준 놈은 어디 있습니까?”
“···············..”
“예? 작전 짰다는 그 놈. 어디 있냐고요?”
제임스 박은 어디 있을까? 음, 아마 김상식이 체포된 상태라는 걸 알았을 거다.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을 확률이 높겠지. 마피아 놈들의 정보력은 엄청나니까 그의 가족도 죽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협박을 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으니 일단 후퇴했겠지.
나는 짐짓 시간을 확인하는 척 손목시계를 본 뒤 말했다.
“지금 시간이면 아마 미국에서 구속됐을 겁니다.”
최영현이 날 노려본다. 자, 이제 뭘 또 물을 거냐? 솔직히 좀 긴장된다. 말로 뭉갤 수 있는 관우와 달리 이 아저씨는 집요하니까. 최영현은 한참 말없이 날 노려보았다. 또 뭘 물어 올지 긴장됐지만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내 꼴이 취조실 안에서 환자 연기 중인 김상식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최영현이 뚜벅뚜벅 걸어 서류를 내민다. 가만히 서류를 바라보다 그를 올려 보니 조금 전과 다른 표정이다. 그는 뒤통수를 긁으며 고개를 숙인다. 무슨 의미일까? 내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자, 머뭇거리던 최영현이 우물쭈물 하며 말했다.
“솔직히···”
응? 솔직히 뭐? 솔직히 못 믿겠다 뭐 이런 거야? 논리적 구멍이 없다고! 그냥 인정해. 최영현이 날 힐끔 보며 말했다.
“관우나 연주에게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실력이 좋다고 하길래 그냥 운이 좋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했는데 뭐? 물어볼 거 있으면 빨리 해. 최영현이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인다.
“추적부터 체포, 증거확보까지. 이건 운이 아니라 실력이네요. 이건 도무지 인정 안 할 수가 없네.”
응? 이 아저씨가 갑자기 뭐라고 하는 거야? 최영현이 계면쩍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완전히 인정합니다. 실력 있으시네요.”
내가 자신의 손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자, 손바닥을 점퍼에 닦은 그가 내 손을 잡고 억지로 악수를 한다. 멋쩍은 얼굴로 손을 마구 흔든 최영현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