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80화 (80/328)

제 80 화. 먼저 인간이 되어라 (15)

모니터실.

취조실 안에서 전화기를 든 변호사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있다. 아마 서류에 대한 진위파악을 지시하고, 그에 따른 새 작전을 짜는 중일 것이다. 최영현은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물었다.

“그러니까, 그 땅콩 뭐시긴가 하는 카지노에서 도박을 했고, 그게 CCTV에 남아서 제임스 박인가 하는 놈을 찾아냈다 이거 아닙니까?”

나는 변호사를 뚫어지게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캬, 미치겠다. 이거 뭐 드라마도 아니고. 수사반장이야, 뭐야?”

“·····················”

최영현이 서류를 흔들며 말했다.

“제임스 박을 찾는 도중 FBI의 정보공유로 그가 한국으로 입국하고 있는 걸 알고 인천공항에서 기다렸다가 체포해서 서류를 뜯어냈다? 이야, 대단하네.”

최영현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내 수사방식이 신기한 듯 자꾸만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조금 전 복도에서 질문했던 것과 같이 의심이 베이스가 된 질문이 아니라 감탄을 배경으로 한 질문이다.

“제임스 박도 인질 잡혀서 작전에 강제 참여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본인이 직접 말했습니다, 바로 돌아가지 않으면 미국에 있는 가족이 위험하다고.”

“오! 그래서 그걸 빌미로 서류를 뜯어냈다?”

“예.”

“대박! 와,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할까?”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는 최영현.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싹퉁머리 없는 모습과 너무 다르다. 그는 실실 웃으며 자꾸만 서류를 만지작거린다.

“솔직히···”

하, 이 사람 그만 좀 솔직해라. 솔직히 라는 말을 몇 번 하는 거야? 최영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신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나도 알아, 이 양반아. 안 좋아하는 테가 팍팍 났으니까. 나도 너 싫어, 이 새끼야. 최영현이 검지로 볼을 긁적이다 서류를 놓고 시원하게 웃는다.

“나 사나이 최영현! 뒤끝은 없는 놈입니다. 그동안 미안했습니다, 시원하게 사과하고 앞으로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돕죠.”

응?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변호사를 보고 있던 시선을 옮겼다. 매번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최영현은 사라지고 시원하게 웃고 있는 생소한 얼굴이 보인다. 이 사람, 진심일까? 사람의 태도가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도 있나? 뭐···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그러죠.”

“사과 받아주는 겁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에이, 남자가. 미안하다니까 그러네?”

“알았습니다.”

“어허! 이번 사건 끝나면 내가 술 한잔 사겠습니다. 남자끼리 술잔 기울여야 친해지지. 내 미안한 것도 있으니 제대로 사죠. 소고기 어때요?”

“··················.”

전생에 소를 못 먹고 죽었냐? 도대체 소고기를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이 양반은? 일단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사건에 집중하자. 나는 다시 변호사를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사건 해결하고 마시죠.”

“오! 좋습니다. 당연히 사건부터 해결이 먼저죠!”

최영현은 손바닥을 비비며 다시 사건 생각에 빠진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함은 남아있다. 최영현은 턱을 괴고 거울 속 변호사와 김상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이제 배우는 무대로 끌고 왔는데, 아직 김상식이 범인이란 증거는 없고.”

옳은 말이다. 김상식이 부모와 조카를 죽였다는 증거는 없다. 심증만 있으며 물증은 전혀 없는 상태이다. 최영현이 다시 중얼거린다.

“저 새끼 하는 태도를 보면 뭐든 연관이 있어 보이긴 하는데.”

최영현이 잠시 생각을 하다 벌떡 일어나 말했다.

“일단 조선족 놈들 중에 사람 죽이고 불 지르는 수법 쓰는 놈들이 있습니다. 밀입국했을 수도 있으니 해양경찰에 협조 구해서 서해 쪽 경비정 쪽에 연락해 보겠습니다.”

“조선족이요?”

“예, 예전에도 이런 사건이 몇 있었습니다. 만약 조선족이 들어왔다면 김상식은 살인교사가 되겠죠.”

형사는 경험이 전부다 라는 말이 있다. 사실 경험 많은 형사들이 공부 잘해 경위로 들어오는 나 같은 사람에게 변명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일선에서 일해보니 확실히 알겠다. 최영현이 없었다면 나 혼자 이런 경우의 수를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다.

“부탁합니다.”

“맡기세요, 아 그리고 또 하나. 조선족 놈들 연결해 주는 국내 브로커를 압니다. 그 새끼들 약점 몇 개 잡고 있으니 브로커 몇 들쑤셔 보면 하나 나올지도 모릅니다.”

오, 그런 줄도 있어? 대단한 인간이었다.

“예, 그쪽도 수사 부탁드립니다.”

최영현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김상식이 살인교사를 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김상식 본인이 살인범이라면 헛다리 짚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건 경위님이 맡아주세요.”

“··················..”

“믿고 갑니다?”

믿고 간다. 원래 최영현은 절대 내게 이런 말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정말 완전히 인정한 걸까?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씩 웃은 최영현이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으하하! 깔끔하게 해결하고 한잔 빨러 가는 겁니다!”

“··················.”

거대한 덩치가 나가자, 홀로 남은 모니터실이 무척 공허하다. 한 사람이 있다 나갔을 뿐인데 꼭 여러 사람이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강혁 아저씨는 내게 팀원들을 모두 내편으로 만들라고 했었다. 연주와 관우는 확실히 날 인정했지만 최영현은 아니었다. 본인 스스로 워낙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경대 출신인 날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했던 자. 하지만 이제 최후의 보루였던 최영현까지 넘어왔다. 뭐, 확실하진 않지만 대충 8부 능선은 넘은 기분이다.

“지금 그게 문제냐···”

홀로 중얼거리는 나. 그래,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모르겠지만 변호사가 서류 철로 입을 가리고 뭔가 말하고 있다. 김상식은 초점 잃은 눈빛 연기를 하며 입술을 달싹인다. 지금도 내가 여기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기에 저런 연기를 하는 것이다. 아마 변호사가 시킨 일이겠지. 이쪽 바닥 일에 빠삭한 인간들이니까.

잠시 후, 논의를 마쳤는지 변호사가 일어나 문을 여는 것이 보인다. 재빨리 모니터실 문을 열고 복도로 고개를 내밀자, 변호사가 눈짓하며 말했다.

“다시 취조 시작하시죠.”

머리 좋은 인간. 신나게 돌린 전화 속 인간들도 변호사들일 것이다. 어떻게 빠져나갈지 궁리했겠지. 나는 다시 취조실로 들어갔다. 여전히 혼신의 연기 중인 김상식을 보고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온다. 변호사는 내 태도를 보았지만 못 본 척 의자를 끌어 자세를 바로 한 뒤 말했다.

“자, 시작합시다. 빨리 하고 병원으로 돌아가야 해서.”

나는 시간을 힐끔 본 뒤 물었다.

“주치의 부르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지금 오고 계십니다.”

“주치의 진료 전에 진술해도 괜찮겠습니까?”

“의뢰인의 상태를 보고 결정한 것입니다.”

“지금은 괜찮나 보죠?”

“아까 보다 낫습니다.”

“여전히 직접 진술은 불가하시고?”

“예, 저에게 말씀하시죠.”

자기한테 말하라고 했던 변호사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속사포 같은 말을 쏘아낸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제 의뢰인은 장남입니다. 재산분할에 대한 헌법이 개정되었다 해도 사망자인 김중권씨에게는 아들만 둘입니다. 재산의 50%를 상속받았을 때 의뢰인이 받을 재산은 500억이 넘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습니까? 그쪽엔 관심이 없어서.”

변호사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상속 재산 500억이 넘는 사람이 고작 빚 30만 달러에 부모를 죽인다는 게 말이 됩니까?”

“글쎄요, 부모님이 빚을 갚아 주지 않겠다고 했다면 어떨까요?”

변호사가 실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보여준다. 핸드폰 속에 서류가 스크린샷 형태로 남아 있다.

“자, 7년 전, 의뢰인이 친구 꼬임에 빠져 피라미드 회사에 빚을 졌을 때 아버지 김중권씨가 빚 3억을 갚아준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건 평소 김중권씨가 아들인 김상식씨께 쓰라고 준 카드의 이용내역서.”

변호사가 핸드폰을 빙글 돌려 내민다. 자세히 보라는 뜻이다. 그의 말처럼 빚을 탕감해준 기록이 있다. 또한 아버지가 줬다는 카드 증빙서류는 매달 8백에서 천 이백 사이의 카드 값이 나온 이용내역이다. 변호사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매달 이 정도의 돈을 용돈으로 쓰라 주시던 분입니다. 고작 30만 달러? 고인이 되신 김중권씨께 30만 달러는 아들 용돈 이상의 돈이 아닙니다.”

변호사가 다시 핸드폰을 가져간 후 갤러리의 사진을 하나 더 찾아 보여준다.

“이건 김중권씨가 아드님과 함께 교회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목사님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선 부자. 아버지는 활짝 웃고 있고 아들은 무표정한 사진이다. 변호사가 물었다.

“아들이 있으십니까?”

“아직 미혼입니다.”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 의뢰인처럼 장성한 아들이 일요일에 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가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아주 사이가 좋은 부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죠. 고작 30만 달러 때문에 자식을 존속살인이라는 이름도 끔찍한 범행의 범인으로 몰고 있다는 걸 고인이 아시면 하늘에서 통곡을 하실 겁니다.”

그래, 맞는 말이지. 그런데 말이야. 김상식의 이모 이정연의 진술과 너무 다른데? 나는 멍한 얼굴을 한 김상식을 바라보았다.

“주변 증언과 다르군요.”

변호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떤 지인입니까? 저희 쪽도 부모님과 아들의 사이가 좋았다는 사실을 증언해줄 여러 증인을 확보해 두었습니다만.”

“증인이요?”

“예, 교회 분들입니다.”

“··················.”

“고인과 십년 이상 한 교회에 다니신 분들이므로 증언의 신빙성은 충분합니다.”

제대로 준비했구나. 변호사라는 존재들. 앞으로도 계속 부딪히겠다. 이런 녀석들을 계속 상대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날 내려 보는 변호사를 가만히 바라보다 무심결에 물었다.

“그런데.”

“예.”

“증인을 왜 확보하셨습니까?”

“··················.”

변호사의 얼굴색이 변한다. 어? 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질문인데 당황하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살인범도 아닌데 왜 그런 증언해줄 사람을 확보해 둔 거지? 변호사가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이 보인다.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다. 이거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인가?

변호사는 순간적으로 눈동자를 굴린다. 머리 좋은 인간이니 빠르게 계산을 마치겠지.

“우리 변호인단은 경찰이 의뢰인을 표적으로 수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미리 대비하는 차원에서 증인을 확보한 것입니다.”

음, 그러니까 당신 말은 너희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우리도 이렇게 준비했다? 허, 변호사라는 게 원래 이렇게 말장난 하는 직업이었나?

“그래요?”

“예.”

뭐, 됐다. 겨우 이런 걸로 뭘 걸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방금 변호사의 반응을 보니 심증이 일어난다. 김상식은 반드시 이 살인사건에 연관이 되어 있다. 직접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든 혹은 최영현의 말처럼 살인교사를 했든 분명히 뭔가 있다.

팔짱을 끼고 김상식을 노려보는 날 가만히 바라보던 변호사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김상식씨를 용의자로 놓고 수사를 하실 생각이라면, 증거를 제시하십시오.”

이제 첫 번째 용의자 심문인데 벌써 무슨 증거가 있다는 거야? 심문해 보고 수사를 해야 증거가 나오지, 이 아저씨야. 변호사가 따지듯 물었다.

“고인이 되신 김중권씨와 이혜연씨는 전신에 무수한 자상을 입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흉기를 찾으셨습니까? 흉기에서 의뢰인의 지문이나 DNA가 검출됐습니까? 어떤 근거로 의뢰인을 용의자로 두고 수사하는지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입에 기관총을 단 거냐? 숨 좀 쉬고 말을 해, 이 양반아.

나는 김상식을 노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찾아 낼 겁니다.”

변호사가 와락 인상을 구긴다.

“언제 찾아내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럼 그때까지 우릴 여기 구금하겠다는 겁니까? 정식으로 요청···.”

변호사의 말이 점점 느리게 들려온다. 심증이 일어나는 순간 눈 앞에서 연기 중인 김상식이 범인이거나, 혹은 살인교사를 했다는 확신이 들자, 나는 가져보지 못한 부모와 고작 열 두 살 먹은 조카까지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고통이라는 화상을 입혀 죽게 만든 이 남자에게 불 같은 악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내 앞에서 떠들어 대는 변호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점점 느리게 들린다. 좁은 진술실이 점점 흑백으로 물들어 간다. 나는 끝까지 연기 중인 김상식을 노려보며 입술을 핥았다.

‘그 증거. 지금 당장 찾아 줄게,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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