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81화 (81/328)

제 81 화. 먼저 인간이 되어라 (16)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익숙한 노란 불빛이다. 그리고 타일. 고시원에 사는 나는 상상할 수 없는 고급 타일이다. 바닥이 까칠까칠한 것이 무척 기분이 좋다. 하지만 나는 지금 멋진 샤워실을 감상할 겨를이 없다. 나는 숨을 헐떡이고 있기 때문이다.

‘헉, 헉···’

나의 샤워 시간은 이렇지 않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따뜻한 물에 씻어 보내는 샤워시간 따위가 아니다. 나는 무언가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고 초조하다.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나와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지만 내 손은 무척이나 차갑다. 옷을 벗기 위해 손이 내 몸을 스칠 때마다 시신의 손이 몸을 스치는 것처럼 오싹하고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나는 허리를 숙여 바지를 벗고, 맨투맨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나는 집에 있었던 모양이다. 추운 겨울임에도 맨투맨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었던 걸 보니.

‘헉, 헉···’

나는 계속 숨을 헐떡인다. 옷 하나 벗는 것이 뭐 그리 힘들다고 이렇게까지 심박수가 올라간 걸까? 시야가 아래로 내려간다. 팬티를 벗어 발목에 건 후 발을 움직여 발목에 건 팬티를 내던진다. 날아간 팬티가 벽에 부딪힌 후 젖은 바닥에 떨어졌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순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인다. 상기된 얼굴, 악독한 눈빛. 나는 순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움찔했다. 급히 손을 뻗어 거울장을 열어 버리자, 비추던 얼굴이 사라진다.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기 싫은 걸까? 나는 알몸으로 세면대를 잡고 잠시 숨을 돌렸다.

세면대 속에 번져 있는 작은 물방울들. 다행히 내 모습을 반사하지 않는 물방울들을 물끄러미 보며 숨을 돌린 나는 크게 호흡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는 화장실 변기 위에 놓아둔 신문지 뭉치를 들어 거칠게 뜯었다. 길다란 무엇인가가 신문지에 똘똘 말려 있다.

거칠게 찢어버린 신문지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에 젖어 바닥에 눌러 붙었지만 나는 발로 그것들을 휘휘 밀어 치워 버렸다. 젖은 신문지들이 찢기며 바닥이 더러워진다. 그리고 마침내 꽁꽁 싸여 있던 신문지 속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칼이었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식칼이다. 이 칼은 주방에 있던 칼이 아닌 모양이다. 굳이 이렇게 똘똘 감아 놓은 것을 보니. 나는 가만히 칼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예기를 번뜩이는 칼을 이리저리 돌려본 나는 다시 세면대를 붙잡았다. 또 다시 숨이 차오른다.

‘헉, 헉···’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긴장, 흥분, 그리고 분노. 세 가지 감정이 내 몸을 지배하고 있다. 나는 알몸으로 샤워실 문을 조용히 열었다. 맨발이라 젖은 바닥에서 묻은 물기 덕에 화장실 앞에서 미끄러졌지만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나는 화장실 문 앞에 있는 시트에 대충 발을 닦고 주변을 보았다.

보통의 방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창문 하나 없다. 여긴 지하실인 모양이다. 나는 오른손에 잡고 있던 칼을 고쳐 쥐고 천천히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나는 여전히 알몸이다.

계단의 중간쯤 올라오자, TV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만화영화 소리인 것 같다. 나는 지하실 문을 살짝 열고 새어 나오는 빛의 틈에서 눈을 내밀었다. 이 문을 열면 거실. 하지만 거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누군가 TV를 틀어 놓고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소리를 죽이고 문을 연 뒤 거실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역시나 TV가 켜져 있었고 소파에 어린 아이가 옆으로 누워 잠들어 있다. 나는 순간 칼을 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어린 아이를 죽이려는 건가? 나는 한참 알몸으로 서서 소파에 잠든 아이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안방에서 두런두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청각을 돋구어 집중하니 두 사람의 대화소리가 들려온다.

‘여보, 아무리 그래도 자식인데. 너무 심했어요.’

여성의 목소리다. 나는 처음 듣는 목소리지만 어쩐지 익숙하다. 그리고 뒤를 이어 무척 화가 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심하기는!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해. 오냐오냐 하면서 사랑으로 키운다고 올바르게 잘 클 것 같아? 부모라는 작자가 애 야단 칠 때는 쳐야지!’

‘그래도 여보. 상식이가 벌써 서른이 가까워졌어요. 이제 다 컸다고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이제 곧 서른이나 먹은 놈이 아직도 부모한테 용돈이나 받아쓰고. 뭐? 빚이 있어? 내가 한 달에 용돈을 얼마나 주는데. 나 때는 말이야, 한달 용돈 같은 게 어디 있어? 난 그 나이에 벌써 당신과 결혼을 했다고.’

‘그건 옛날 일이고 요즘 애들이 다 그래요. 당신이 이해 좀 해요.’

‘안돼! 오늘부터 저 녀석 용돈 주지 마. 내 알아보니 미국에서도 나쁜 친구 사귀어서 도박판을 전전긍긍 하고 다녔어. 당신이나 나나 저 놈 인생을 망친데 일조를 한 거야.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자식 새끼 사람 만들 기회는 아직 있다고.’

‘당신! 지금 우리 상식이가 인간도 아니란 말이예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럼? 제 손으로 돈 한푼 벌어본 적 없이 자라 도박이나 하고, 약이나 처 빨고. 저게 사람 새끼야? 상원이 녀석이랑 너무 비교되잖아!’

‘여보! 자식끼리 비교하면 어떡해요? 상식이가 들으면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어요?’

‘당신이 사사건건 그렇게 상식이 놈을 비호하고 나서니까 애가 점점 더 삐뚤어지는 거야. 당신은 가만히 있어. 이번 기회에 이놈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을 테니까. 어학연수를 마치지도 못하고 돌아와 한다는 소리가 뭐? 아빠 빚 좀 갚아 주세요? 이런 한심한 놈을 봤나.’

엿듣고 있던 내 오른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어릴 때부터 이랬다. 저 인간은 뭐든 자기 마음대로 자식을 휘두른다. 나는 그가 하라는 공부를 했고, 가라는 학교를 갔다. 자기 못 이룬 꿈 이룬답시고 내게 미래를 빼앗아갔다. 나도 하고 싶은 게 있었다. 모든 게 저 악마 탓이다. 지금의 내 삶이 시궁창인 것도. 앞으로 당신에게 다가올 미래도. 전부 당신의 탓이다.

긴장으로 차가워졌던 손에 온기가 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긴장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말을 훔쳐 들으며 내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가 긴장을 잡아먹은 것이다.

나는 알몸으로 칼을 들고 조금 열려 있는 안방 문을 발로 찼다. 문이 벌컥 열리며 침대에 앉아 있던 여자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사, 상식아···?’

창가에 서 있던 남자가 눈살을 찌푸린다.

‘다 큰 녀석이 알몸으로 그게 뭐하는 짓이냐? 당장 옷 입지 못해? 이 녀석이 편하게 있으라고 지하를 내줬더니 거기서 약을 했나, 야밤에 이게 뭣 하는 짓이야?’

씩, 씩··· 내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꼭 눈가에 피를 뒤집어 쓴 사람처럼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붉어진다.

‘끄···. 끄아아아아!!!!!!!!’

‘사, 상식아!!!’

나는 알몸으로 커튼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달려 들었다. 칼을 거꾸로 들고 그의 가슴팍을 찌르려 했지만 그 자는 넘어지며 내 손목을 꽉 잡았다.

‘이! 이이이!!’

‘끄아아아아!!’

나는 무거운 내 몸무게를 최대한 활용해 그를 짓눌렀다. 칼 손잡이 부분을 가슴에 대고 있는 힘껏 무게로 누르자, 칼이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끄, 끄르르륵!!’

‘상식아!!!’

여성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하지만 지금 나는 온통 붉어진 세상에 홀로 서 있다. 피가 울컥울컥 솟구쳐 내 뺨에 묻었지만 상관없다. 나는 몸을 버둥거리며 그의 몸을 더욱 눌렀다. 칼을 비틀자 그의 몸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작아진다. 내 손목을 잡은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있는 힘껏 칼을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나는 솟아오르는 핏물이 꼭 내 인생 같이 느껴졌다.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새가 힘껏 날개를 펼치는 형상과도 같은 핏물들.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이 해방감을 만끽하고 싶다.

다시 한번만 더.

나는 칼을 높게 들었다가 찍었다. 그러자 또 새의 형상을 한 핏물들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한번만 더. 푹 소리가 날 때도 있고, 뼈를 스치며 칠판 긁는 소리가 날 때도 있었지만 상관없다. 솟구치는 핏물들이 날 자유롭게 해줄 테니까.

어느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귀에 꽂힌다.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지금의 날 방해하지 마. 한번만 더 방해하면 네 입도 찢어버릴 거야. 난 분명히 경고했어.

‘사, 상식아! 제발! 제발 그만!’

몇 번이나 찔렀을까? 스무 번까진 숫자를 셌는데 그 후로는 모르겠다.

‘상식아, 정신 차려, 제발! 엄마 좀 봐, 내 아들! 엄마 얼굴 좀 봐!’

조용히 해. 지금 날 방해하지 말라고 했어. 난 칼을 높이 들어 복부를 쑤셨다. 하지만 피가 솟구치지 않는다. 새의 형상을 닮은 핏물들이 꼭 자유롭게 살 내 미래 같았는데. 이제 더 나올 피가 없는 걸까? 나는 칼 손잡이를 놓고 시야를 가리는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피에 절여진 손으로 머리를 만지니 끈적한 느낌이 든다.

‘킥··· 킥킥···’

내 나이가 몇이더라? 눈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이 개새끼에게 붙들려 내가 하고 싶은 거 못하고 산 세월이 몇 년이더라? 강한 해방감이 든다. 이 새끼만 없다면 난 살 것 같다. 나는 천천히 몸을 숙여 죽은 남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마.’

그때 또 다시 뾰족한 음성이 귀를 때린다.

‘상식아아아아!!!!!!!’

‘씨발, 시끄럽다고! 시끄러워! 몇 번을 말해, 이 년아!’

나는 남자의 복부에 꽂힌 칼을 뽑아 뒤로 휘둘렀다. 하지만 칼에 걸리는 것은 없었고 피 때문에 미끄러워진 바닥 때문에 시신의 옆에 고꾸라졌다. 바닥을 가득 적시고 있는 피 웅덩이에 온 몸이 젖어 버렸다. 씨발, 이게 다 저 목소리 때문이다. 나는 벌개진 눈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침대 위, 잠옷을 입은 여자가 침대 끄트머리까지 물러나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지.’

‘사, 상식아.’

‘닥쳐! 조용히 해! 조용히!’

나는 여전한 알몸에 피범벅을 한 몸뚱이로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아악!’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의 배를 칼로 쑤셨다.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 울컥하며 피가 솟구친다. 이것이다! 또 다시 핏물이 새 형상을 하고 있다. 내 자유의 상징. 내가 보고 싶었던 그것.

‘사, 상식아···’

‘낄낄···’

다시 한번 더. 난 저게 꼭 다시 보고 싶어. 나는 칼을 뽑고 그녀를 발로 차 침대에 눕혔다. 앉아 있는 것보다 누워 있는 쪽이 피가 더 잘 튀니까. 침대에 누워 배를 부여잡고 있는 여자. 나는 그녀의 복부에서 튀는 피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침대에서 뛰어내려 그녀의 옆에 섰다. 바닥의 피가 하도 미끄러워 여러 번 기우뚱했지만 괜찮다. 저걸 볼 수만 있다면.

나는 칼을 높이 들어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내리쳤다. 하지만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몸이 기우뚱하는 바람에 애꿎은 허공만 쑤셨다. 굉음과 함께 바닥에 쓰러진 나. 짜증이 솟구친다. 저놈의 할아범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다. 바닥이 이 모양인 건 다 저 영감 때문이다. 죽어서도 도움 안 되는 영감.

나는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노력했다. 하지만 피로 물든 내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여러 번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던 그때. 나는 어느 순간 오른쪽 다리에서 느껴지는 강한 고통에 급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붉은 눈. 피 흘리는 여자가 내 오른쪽 종아리를 물어 뜯고 있다.

‘놔, 놔! 놔 이 년아!’

‘끄으으으으으!!!!!!!!!!!’

사력을 다해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어찌나 강하게 물었는지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다.

‘으아아! 씨발, 놔! 놓으라고!!’

‘끄아아아아아!’

나는 결국 발로 그녀의 얼굴을 차 버렸다. 벌렁 나자빠진 여자.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잠시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에 벌떡 일어났다. 침대 위에 내던져진 칼을 꽉 붙잡은 나는 내게 걷어 차이고 벽에 부딪혀 정신을 잃은 여자 앞에 알몸으로 섰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내 손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그녀를 바라본 내가 나직하지만 치가 떨리는 분노가 가득한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다 너희들 때문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