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 화. 먼저 인간이 되어라 (17)
믿을 수 없는 기억.
악마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나는 극심한 어지러움도 잊고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게 김상식을 바라보았다. 소름 돋는 강간마의 기억을 읽은 후 나는 구역질을 했었다. 하지만 이 기억은 내게 구역질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살인의 순간.
분노에 정신을 맡긴 살인마의 기억. 나는 영혼이 썩어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내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이 악마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속에 있는 말이 나왔다.
“이 개 같은 새끼가···”
변호사가 눈을 번뜩이며 벌떡 일어났다.
“지금! 제 의뢰인에게 욕을 하신 겁니까!”
나는 김상식을 노려보다 변호사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잠깐 이성을 잃었다. 그래, 그럴 만한 기억이었다. 이 개새끼가 범인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분노에 정신을 잃으면 난 눈 앞의 개새끼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다. 나는 호흡을 하며 김상식에게서 눈을 돌렸다. 계속 저 자식을 보고 있으면 당장 아가리 뼈를 뽑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어나 나를 노려보고 있는 변호사가 보인다.
“혼잣말이었습니다.”
변호사가 눈썹을 꿈틀거린다.
“뭐요?”
나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혼잣말이었다고요.”
“앞 사람이 다 들리게 하는 혼잣말도 있습니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앉으시죠.”
변호사는 날 노려보며 경고한다.
“다시 한번 더 욕설을 하시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습니다.”
“그럴 일 없습니다, 앉으시죠.”
변호사는 한참이나 날 노려보다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이야기 마무리 하죠.”
“잠시 신체를 좀 보겠습니다.”
변호사가 눈을 찡그린다.
“마약혐의에 대해서는 모두 인정했습니다만.”
“··················.”
변호사가 날 째려보다 김상식의 소매를 걷었다. 팔뚝에 여러 개의 주사 바늘 멍이 보인다.
“됐습니까?”
변호사는 어차피 마약에 대해서는 인정했기에 거리낌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당당하다. 나는 김상식의 팔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팔 말고.”
변호사가 이를 악물었다.
“발등 쪽으로 투여한 적은 없습니다.”
“발등 말고.”
“그럼 어디를 보겠다는 말입니까? 설마 인권에 대해 모르시는 분도 아닐 텐데. 발가벗기라도 하라는 겁니까? 또, 마약투여에 대한 모든 것을 인정한 마당에 왜 신체검사를 하겠다는 겁니까?”
“··················.”
“말을 해요, 말을! 어디를 보겠다는 겁니까!”
“종아리.”
내 말이 떨어지자 김상식의 눈이 커진다. 변호사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 팔을 걷는다.
“종아리? 그게 도대체 왜요?”
“···············”
나는 김상식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는 지금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다. 아무리 연기 중이지만 초점 없는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변호사는 답 없는 날 노려보다 혀를 차며 소매를 걷는다.
“빨리 보여주고 갑시다.”
변호사가 허리를 숙여 김상식의 왼쪽 다리를 붙잡는다. 잠시 움찔했지만 순순히 다리를 내주는 김상식. 변호사가 김상식의 왼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후 바지를 걷으려 한다.
“참나, 별.”
“잠깐.”
내가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멈추자, 변호사가 인상을 쓴다.
“보여 달라고 했지 않습니까? 또 뭡니까?”
나는 김상식을 가만히 바라보며 눈짓했다.
“오른쪽 종아리를 봅시다.”
“허! 이 사람이 도대체! 좋습니다, 그거 보여주면 보내 주는 겁니까?”
“봐야 알겠죠.”
“나랑 지금 장난 칩니까?”
“아무것도 없으면 보내 주겠습니다.”
“약속한 겁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변호사가 허리를 숙여 김상식의 오른쪽 발목을 붙잡으려 한다. 그러자 정신이 없다던 김상식이 다리를 움직여 그의 손을 피하는 모습이 보인다. 변호사가 다시 오른쪽 발목을 잡으려 하자 김상식이 다리를 쭉 벌려 손을 피한다.
변호사가 고개를 들어 김상식을 바라본다.
“김상식씨?”
“···············..”
김상식은 여전히 고개를 모로 꺾고 연기 중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연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공포에 질린 눈빛이다. 변호사가 도대체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김상식을 살피느라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연주의 얼굴이 보인다.
“저, 진술 중에 죄송합니다.”
연주 목소리에 김상식에 대한 집중력이 깨진 내가 고개를 돌리자, 연주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밖에 김상원씨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최 경위님이 자리를 비우셔서 제가 모셔 왔습니다.”
김상원? 그게 누구··· 아, 김상식의 친동생이자, 중국에서 한의학 유학 중인 그 사람. 하필 왜 지금 온 거야?
“어, 진술 끝나고 면담 시간 주겠다고 해 줄래?”
연주가 곤란한 얼굴로 돌아본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서 얼굴 하나가 쑥 튀어나온다. 김상식과 무척 닮아 겉모습만 보아도 서로 형제임을 알 수 있는 남자. 나이 차이가 꽤 나는지 앳된 얼굴의 남자가 취조 중인 김상식을 바라보고 있다.
김상원이 날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형사님.”
김상원의 목소리가 들리자, 김상식의 눈이 커진다. 눈을 뒤룩뒤룩 굴리기도 하고, 당장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역력해 보이지만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날 의식해서인지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꼭 지금이어야 됩니까?”
“잠깐만, 물어볼 말이 있어 그럽니다.”
하, 그래. 어차피 김상원의 오른쪽 다리만 확인하면 된다. 지금 죽이나, 좀 이따 죽이나 그게 그것이겠지. 나는 내 옆자리의 빈 의자를 눈짓했다.
“앉으세요. 변호사님? 괜찮겠습니까?”
아무리 변호사라도 친형제의 접견요청을 막을 권리는 없다. 변호사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김상원은 형을 노려보며 천천히 테이블을 빙글 돌아 내 옆에 앉았다. 그는 한시도 형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나는 약간 몸을 뒤로 젖혀 물러나 있다. 김상원은 한참 말없이 형을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정말··· 형이야?”
“··················”
“진짜 형이··· 엄마 아빠를 죽인 거야?”
“··················”
변호사가 몸을 내민다.
“김상원씨. 지금 형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저에게...”
“넌 가만히 있어, 이 쓰레기 변호사 새끼야!!!!!!”
변호사가 움찔 놀란다. 음, 경찰 앞에선 그렇게 고 자세였던 양반이 재벌 앞에선 고양이 앞에 쥐네. 이걸 지켜보는 맛도 나름 괜찮다. 소리를 버럭 지른 김상원이 김상식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형과 말하고 있어. 넌 빠져.”
변호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러나는 모습이 우습다. 김상원이 형을 노려보며 말했다.
“직접 말해. 진짜 형이 그랬어?”
“··················.”
“이모한테 다 들었어. 미국에서 빚도 졌다며. 아버지께 또 갚아 달라고 했던 거야?”
‘··················.”
“몇 년 전에도 그랬잖아. 도대체 아버지가 형이 친 사고를 몇 번이나 수습해 줬는지 기억이나 해? 이번에도 수습해 달라고 조르다 안 되니까 결국 죽인 거야? 진짜 그런 거야?”
필사의 연기 중인 김상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 쳤다.
“아니야! 내가 안 죽였다고!”
취조실에 적막이 흐른다. 김상식에게 연기를 지시했던 변호사가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보인다. 난 그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실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눈짓했다. 다 녹화되었다는 뜻이다. 변호사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인다. 얼른 품을 뒤져 전화기를 찾는 변호사. 하지만 그는 쉽게 자리를 비우지 못했다. 당장 이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논의를 해야 하는데 김상식을 혼자 두고 나가는 건 불안하다. 그렇다고 친동생의 접견을 중단해 달라 요청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진퇴양난에 빠진 변호사 모습을 보는 건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재미 있는 구경거리다.
김상식은 흥분해 소리를 질렀지만 뒤늦게 자신이 실수했음을 눈치채고 주춤거린다.
“그, 그게···”
나는 처음부터 그가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전혀 놀랍지 않다. 나는 팔짱을 끼고 김상원을 눈짓했다.
“괜찮으니 계속 말씀 나누시죠?”
김상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동생을 본다.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버릇없는 동생을 보고 분노가 끓어오르는 모양이지만 현재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는지 금세 눈물을 뚝뚝 흘러내린다.
“나··· 나, 진짜 아니야, 상원아. 흐흑···”
와, 영화 감독님들. 이 새끼 배우로 좀 데려가세요. 이 새끼로 영화 찍으면 오스카 상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김상식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소매로 눈가를 훔친다.
“나, 나는··· 그날 지하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어. 뭔가 타는 냄새도 나고 너무 더워서 눈을 떴는데··· 1층이 엄청 밝았어. 그, 그래서 올라가 봤는데··· 어흐흐흑!”
김상식은 김상원의 손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김상원이 빠르게 손을 뒤로 뺀다. 허공을 붙잡은 김상식의 눈빛에 순간 분노가 일었지만 금세 정신을 다잡은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1층에 올라갔더니 이미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있었어! 엄마, 아빠! 하고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어.”
김상원이 치를 떨며 말했다.
“안방에 가보긴 했어?”
“그, 그게! 안방에 가려고 했어! 그런데 부, 불이!”
김상식은 그때를 회상하는 듯 몸을 바들바들 떤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불길이 앞길을 막았어. 나, 난··· 무서웠어. 그래서 결국 도망친 거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난 절대 부모님을 죽이지 않았어.”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듯, 꼭 믿어 달라는 듯 간절한 눈빛으로 동생을 보는 김상식. 김상원은 이미 이정연 이사에게 들은 말로 심증을 굳혔는지 가만히 형을 노려보다 말했다.
“그럼 증명해 봐.”
김상식이 얼른 답했다.
“그래! 뭐든 물어봐. 다 증명할 수 있어!”
김상원이 옆에 있는 날 돌아본다.
“형사님.”
“예.”
“본의 아니게 밖에서 대화를 들었습니다.”
“·····················.”
“형 다리를 보면 뭔가 알 수 있는 겁니까?’
김상식이 움찔 놀라는 것이 보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리에 뭐가 있습니까?”
변호사, 김상식, 김상원을 비롯한 연주까지. 모두가 날 바라본다. 나는 가만히 김상식을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내 입이 벌어지자 김상식은 지옥의 사자가 말을 거는 듯 공포에 점철된 눈빛이 된다.
“어머니, 이혜연씨가 만든 인교상(人咬傷)입니다.”
김상식이 엉거주춤 서 있다가 화들짝 놀라 뒤로 마구 물러난다.
“히이이익!!!”
형의 반응을 본 김상원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인교상이 뭡니까, 형사님?”
“사람에게 물려서 생긴 흉터를 말합니다.”
“그게 사건을 밝힐 자료가 됩니까?”
“어머니 치열과 비교하면 됩니다.”
“···············..”
나는 놀라 멍한 얼굴이 되어 있는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만약 김상식씨 몸에 그것이 있다면 미리 병원을 구워 삶아 화상 외에 다른 상처가 없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병원과 그를 사주한 변호사 집단도 구속 가능합니다.”
변호사가 흠칫 놀란다. 핸드폰을 잡고 있는 손을 바르르 떠는 변호사. 반응을 봐서 그는 김상식의 몸에 인교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다. 아마 이 변호사의 윗사람은 알고 있겠지. 하는 짓을 보니 말단 변호사 같은데 잘못 걸렸다.
김상원은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을 해본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변호사를 노려보았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집안 일이니 변호사는 물러나.”
변호사는 침만 꿀꺽 삼키며 가타부타 말이 없다. 그러다 전화기를 들고 부리나케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윗사람에게 전화로 상황을 알리려는 것이겠지. 김상원은 변호사가 뛰어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벽에 등을 붙이고 있는 수갑 찬 김상식의 앞에 섰다.
한참 형을 노려보던 김상원이 말했다.
“다리. 보여줘.”
동생을 바라보고 있는 김상식의 눈에 공포가 떠오른다. 김상원이 그런 형을 주시하며 말했다.
“증명··· 할 수 있다고 했잖아? 보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