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91화 (91/328)

제 91 화. 목소리(Voice) (6)

황지영의 집에 있던 일본도가 가짜 검이다? 사건이 다시 꼬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당황해서는 안 된다. 나는 팀장이다. 나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황지영씨 댁 수색해서 흉기로 보일 물건이 있는지 확인해.”

-네, 팀장님.

이미 수색영장이 떨어졌으니 법적 문제는 없다. 내 손으로 영장심사를 넣었지만 내심 그녀의 집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기를 빌었다. 수사가 더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도 괜찮다. 어린 마음에 입은 상처가 또다른 사건으로 곪아 터지지 않기를 비는 마음이 더 크다.

황지영의 집에 있는 검이 가짜라는 건 그녀를 용의자로 보아야 하는 가능성이 작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다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그녀의 오빠인 황창수다. 이제 중요해지는 건 그가 훈련소에서 일시탈영을 했다는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군에서 그런 정보를 가져올 수 있을까? 매우 확률이 낮은 일이다.

만약 황창수가 탈영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이 사건은 영영 해결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나는 일단 문자로 관우와 연주에게 황지영씨 댁 수색을 마치면 그녀의 주변인에 대해 조사하라는 지시를 보냈다. 혹여 친한 지인 중에 그녀의 사정에 공감해 대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지시를 내린 나는 바로 논산으로 향했다. 지금 시각은 오후 한 시. 논산에 도착하면 저녁 무렵이 될 거다.

**

휴게소에 딱 한번 들리고 바로 논산까지 내려온 나는 미리 연락을 받고 부대 입구에서 대기 중인 최영현과 합류했다. 최영현은 부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보도블록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앞에 담배 꽁초 산이 있는 걸 보니 상황이 짐작된다.

“아무 것도 안 나온 겁니까?”

최영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직은 없습니다. 확증이 나올 만한 CCTV는 전부 군 소속의 회로라 내주질 않고, 민간이나 관공서에서 설치한 CCTV는 군 기지에서 너무 먼 곳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것이다. 군 기지를 관공서가 감시할 필요는 없으니까. 오히려 근처에 군 기지가 있어 치안이 좋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시간이면 훈련병들이 저녁식사를 하고 개인정비를 할 시간이다. 훈련소는 개인정비 시간에도 갑작스러운 기습훈련을 하곤 하지만, 황창수가 입대한 건 1개월이 넘었다. 훈련소 5주 차에는 대부분 적응을 했기에 기습훈련이 있을 가능성이 적다.

나는 최영현이 넘겨주는 CCTV 회로 지도를 보며 지시를 내렸다.

“만약 탈영을 했다면 일반 도로로 나가진 않았을 겁니다. 정문에 있는 CCTV는 군의 것이겠지만 저쪽 언덕을 넘어서는 민간 CCTV일 확률이 높겠죠.”

“이미 확인했습니다. 언덕 너머 CCTV는 확보했습니다. 아직 확인 전이고요.”

CCTV를 따겠다고 한 건 오늘 오전이다. 아직 회로를 회수할 시간도 빠듯했을 것이니 업무능력 부족은 아니다. 나는 꽤 피곤해 보이는 최영현을 보며 말했다.

“잠은 어디서 잡니까?”

“읍내 여인숙이요.”

모텔이라도 가지, 여인숙이라니. 하긴 빠듯한 수사비로 번듯한 모텔 가서 자긴 힘들 거다. 나는 지도를 말아 넘겨주며 말했다.

“일단 오늘은 숙소 복귀하셔서 회수한 CCTV 확인해 주세요. 식사도 좀 하시고.”

최영현이 지도를 넘겨 받으며 말했다.

“팀장님 방 잡아 드려요? 여인숙이라도 사람이 꽤 많습니다. 미리 방 잡아야 됩니다.”

“아뇨, 전 황창수를 만나보고 바로 올라갑니다.”

“후, 또 장거리 운전하겠군요. 알겠습니다, 고생하십쇼.”

최영현이 떠나고, 위병소에 간 나는 영장을 보여주며 황창수의 대면을 청했다. 군 규율 상 외부 면담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 훈련병이지만, 내무부 공식 문서를 무시할 순 없는지 위병소 직원은 잠시 대기를 요청하고 안에 연락을 한다.

잠시 후, 붉은 모자를 쓴 조교가 절도 있는 걸음으로 대기실로 와 말했다.

“현도경 경위님이십니까?”

“아, 예.”

“476번 훈련병 면담 요청하셨습니까?”

“황창수 훈련병입니다.”

“이쪽입니다.”

조교가 먼저 걷고 나는 뒤따른다. 훈련 5주차라 그런지 꽤 여유 있어 보이는 훈련병들이 보인다. 저 시기엔 이제 내무반 구석에 있는 책장에 꽂힌 책들이 눈에 들어올 시기다. 사실 3주차까지는 정신없이 훈련 받고, 휴식시간엔 개인물품 정리를 하고, 밤엔 자느라 바쁘다.

인간이란 것이 신기해서 첫 1주차는 한 시간을 줘도 이불에 각 하나 못 잡는데, 3주차가 되면 요령이 생겨 1분이면 끝난다. 같은 일을 빨리 처리하니 당연히 휴식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즘은 구타가 없어졌다지만 훈련소는 여전히 훈련을 빙자한 얼차려가 있을 것이다. 그게 받기 싫으면 날래게 움직일 수밖에.

조교가 PX 같아 보이지만 물품은 전혀 없는 빈 간이사무실 문을 열며 말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잠시 후, 두 명의 조교가 황창수를 데리고 온다. 그들은 약간 겁먹은 얼굴의 황창수를 내 앞에 데리고 온 뒤 강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476번 훈련병.”

황창수가 기압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476번 훈련병!”

“착석.”

“착석!”

황창수가 재빨리 앉자, 두 명의 조교가 뚜벅뚜벅 걸어가 문 앞에 서서 열중쉬어 자세로 대기한다. 아무래도 군이다 보니 나가 있으라고 하긴 좀 그렇다. 황창수가 각이 잔뜩 잡힌 자세로 허리를 펴고 있는 걸 본 나는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저 군인 아닙니다. 편하게 앉으세요.”

“···············..”

황창수는 여전히 허리를 쭉 펴고 있다. 하긴 뒤에 호랑이 같은 조교들이 있으니 당연하겠지. 괜히 여기서 풀어졌다가 뒤에서 빠졌다고 기합 받을지 모르니까. 나는 황창수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반응은 매우 자연스럽다. 만약 황창수가 나라고 가정하고 지금 이 상황을 생각해 보자.

내 동생은 7년 전 성폭행을 당하고, 지금껏 정신병원에 다니고 있다.

그 일로 인해 집은 풍비박산이 났고,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다.

경제적인 궁핍함을 간신히 이겨내고 살았지만, 동생은 부양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해 군 입대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경찰이 찾아왔다. 아마 이전에 만난 최영현과의 대화를 통해 7년 전 사건의 범인에게 모종의 일이 생겼다는 걸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황창수의 반응은 단지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조교들 눈치를 보고 있다. 만약 이 사람이 탈영을 해 김현우를 죽였거나, 혹은 동생이 범인이라는 걸 알았다면 과연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아무리 연기를 한다 해도 조교 눈치를 보는 연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황창수를 눈으로 살피다 말했다.

“황창수씨.”

“476번 훈련병!”

“관등성명 안 해도 됩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는 군 관계자가 아닙니다.”

“··················.”

황창수는 여전히 잔뜩 굳어 있다. 그때 뒤에서 조교의 목소리가 들린다.

“476번 훈련병, 관등성명 생략한다.”

황창수가 허리를 펴며 우렁차게 답한다.

“예! 알겠습니다!”

하, 망할 군대. 여전히 멀쩡한 사람을 6주만에 기계로 만드는 구나. 뭐, 자대가서 상병쯤 달면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겠지만.

나는 수첩에 메모해둔 사건 발생일을 펴 보여주며 말했다.

“이 날 뭐 하셨습니까?”

황창수는 수첩을 본 뒤 허리를 바로 편다.

“각개전투 훈련에 임했습니다.”

“이 날 밤에 불침번 서셨습니까?”

“예, 섰습니다.”

불침번을 섰다. 하지만 말이 안 된다. 불침번은 한 시간 간격으로 바뀐다. 요즘은 두 시간 간격으로 바꾸는 부대도 있다고 들었지만 두 시간이라고 해도 논산에 있던 사람이 두 시간 만에 서울까지 올라가 살인을 저지르고 시신에 옷을 입혀 낙산대공원에 두고 다시 내려온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 날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까?”

“예, 없었습니다.”

“혹시 병영 밖으로 나간 적 없습니까?”

“···············.”

내 말이 떨어지자, 문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조교가 날 노려본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논산훈련소의 경계를 우습게 보는 말로 들릴 테니 기분 나쁠 만하다.

“없었습니다.”

무슨 말을 기대하고 질문한 걸까? 당연히 없다고 할 것을. 나는 잠시 황창수를 바라보다 물었다.

“동생이 황지영씨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성격이 어떻습니까?”

“잘못 들었습니다?”

“평소 동생 성격이 어떻습니까?”

“··················”

황창수는 질문의 저의를 생각해 보다 머뭇거리며 말했다.

“도, 동생은··· 유약합니다. 겁이 많고, 어릴 때부터 항상 저만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가 많아져서 잠깐 친구들과 다니긴 했지만··· 그 사건이 있고 나선 항상 저랑 함께 다녔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할 때 눈동자가 떨렸다. 물론 오빠 입장에서도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테니 당연하다.

“사건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 맞습니다.”

“병원비는 어떻게 충당하셨습니까?”

“고등학교 졸업 후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거기서 번 돈으로 냈습니다.”

“동생 분이 지금 일을 안 하고 계시던데. 생활비는 어떻게 냅니까?”

“공장에서 번 돈을 안 쓰고 아꼈습니다. 하지만 그 돈으로 일년도 못 버팁니다···”

황창수의 눈빛이 흐려진다.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이 무척 큰 모양이다. 황창수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동생은··· 그 사건 이후로 사람을 무서워합니다. 아르바이트도 못 하는 아이가 저 없이 어떻게 혼자 있을지 너무 걱정이 됩니다.”

“··················..”

“형사님. 혹시 제 동생 보셨습니까?”

“예, 봤습니다.”

“어제 다른 형사님도 오셨습니다. 혹시 제 동생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뇨, 동생은 건강하게 잘 계십니다.”

“하···”

안심했다는 표정을 짓는 황창수.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 물었다.

“그럼 동생 사건의 범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

수사기밀이다. 이럴 때가 참 곤란하다. 질문은 하되 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식으로 나가면 상대는 기분이 나쁘고, 기분이 나빠진 상대는 비 협조적으로 나오니까.

“죄송합니다.”

“··················”

황창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그럼 제 질문에 옳다, 그르다 답만 주시겠습니까?”

규정대로라면 이것도 불가하다. 하지만 상대는 군이란 밀폐된 장소에 갇혀 있는 피해자의 가족이다. 오죽 걱정이 됐으면 호랑이 조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음에도 질문을 하겠는가? 나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황창수는 조교들이 있는 뒤쪽을 힐끔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동생이 의심받고 있는 겁니까?”

“··················..”

가방 끈의 길이와 명석함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는 황창수. 그는 최영현과 나의 연속 방문에 범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고, 사건에 대한 범인으로 동생이 의심받고 있다는 것을 유추해냈다. 나는 말없이 슬쩍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난 고개만 끄덕였지 절대 말을 해준 건 아니다.

황창수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침을 꿀꺽 삼킨다. 잠시 날 바라보던 황창수가 말했다.

“제 동생은 절대 그럴 수 있는 애가 아닙니다. 지영이는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아이예요.”

그래, 나도 봐서 안다. 그럴 사람으로 보이더라. 나는 단호하게 동생을 변호하는 황창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친구 중에 황지영씨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 친구 중에 말입니까?”

“예, 황지영씨 친구도 좋고.”

“지영이는 친구가··· 아, 학원에서 만난 친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지영이 옛날 사건 이야기를 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친구 이름 아십니까?”

“그게··· 아, 김유미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수첩에 메모를 해 둔 후 물었다.

“황창수씨 주변인 중엔 없습니까?”

동생의 치부다. 웬만큼 친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황창수가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와 형제 같은 사이일 것이고. 사건의 용의자가 될 수 있다. 황창수는 여러 번 눈썹을 파르르 떤다. 반응을 보니 그런 사람이 있긴 한 모양이다. 말없이 기다리자, 황창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현중이라고. 제가 다니는 공장에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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