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2 화. 목소리(Voice) (7)
야밤에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
나는 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관우야.”
-예, 팀장님.
“황지영씨 댁에서 나온 건?”
-전혀 없습니다. 황지영씨 말로는 일본도 장난감도 오빠 친구가 줬답니다.
오빠 친구? 그래, 황창수는 공장에서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아야 했다. 자신이 군대에 있을 동안 동생의 생활비가 필요했을 테니까. 그런데 황창수의 방에는 애니메이션 관련 물품들이 많았다. 비싼 피규어 같은 건 없었지만 일본 직수입 만화잡지는 꽤 비싸다. 브로마이드야 잡지 속 사은품일 테니 넘어간다고 해도, 꽤 돈 많이 드는 취미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지영이 말한 오빠 친구. 그는 아마 같은 공장에 다니던 지현중일 것이고, 황창수의 방에 있던 물건들은 그가 선물한 것일 확률이 높다.
“이름 지현중. 황창수와 같은 공장에 다닌 사람이다. 황창수의 친한 친구이고,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한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는지 확인해줘.”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고요?
“어, 황창수에게 일본도 장난감을 선물한 친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 그 사람도 애니메이션 팬이란 뜻이군요?
“확인해 보면 알겠지.”
-알겠습니다, 바로 파악해 놓겠습니다. 서로 들어오실 겁니까?
“아니, 지금 올라가면 12시 넘을 거다. 내일 보자. 너도 오늘은 퇴근해.”
-저 CCTV 분석해야 되는데. 황지영씨 댁 주변에서 긁어온 거요.
아, 관우 몫의 일이 그거였지. 이거 미안하게 됐네.
“그래, 미안하다. 부탁 좀 하자.”
-히히, 이게 제 전문인데요, 뭐.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팀장님!
“그래, 수고해라.”
전화를 끊은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고 생각에 빠졌다. 지금 추가 조사가 필요한 사람은 둘. 먼저 황창수의 친구인 지현중이다. 그는 황창수의 형제 같은 사이이며,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 황지영의 학원 친구라는 김유미는 일단 후 순위다. 그녀가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지 여부는 황창수도 모른다. 또한 낙산대공원 정상까지 남성의 시신을 옮겼다는 점으로 볼 때 여성의 근력으로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단 지현중부터 조사한다.”
다음날 오전, 종로 재림섬유 공장.
밤을 새서 CCTV 조사를 한 관우에게 수면 시간을 보장하고 연주와 함께 도착한 공장. 꽤 잘 돌아가는 공장인지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꽤 보인다.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한국인에게 말했다.
“실례합니다, 여기 지현중씨 계십니까?”
목장갑을 끼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장판 같은 것을 옮기고 있던 아저씨가 멀뚱하게 우릴 보며 물었다.
“지현중이요? 알죠, 우리 공장에서 제일 오래된 녀석인데.”
음? 지현중은 황창수와 동갑내기다. 기껏해야 20대 초반일 텐데 제일 오래 됐다고?
“어디 있습니까?”
“안에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지현중의 얼굴을 모르니 일일이 물어보고 다닐 수밖에 없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기를 거듭해 결국 큰 기계 안쪽에서 얼굴에 기름 때를 묻히고 일하는 젊은 남성을 찾아냈다.
“지현중씨?”
좀 뚱뚱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어깨 근육이 좋다. 최영현의 축소 버전이라고 부르면 될 만한 신체조건을 가진 젊은 남자가 고개를 내민다.
“저요?”
“지현중씨 맞습니까?”
“맞는데.”
“경찰입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경찰 신분증을 보자 움찔하는 지현중. 주변 눈치를 본다.
“왜요?”
반응이 이상하다 느끼겠지만, 보통 경찰이 보자고 하면 이런 반응이 일반적이다.
“잠시면 됩니다.”
“··················..”
장갑을 벗어 기계에 올려놓은 지현중이 한쪽을 눈짓한다.
“여긴 시끄러우니 사무실로 가시죠.”
지현중을 따라 사무실로 가자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자가 인상을 쓴다.
“야 인마! 오늘 납품 날인데 왜 사무실로 들어와? 밥 먹을 시간도 없는데.”
지현중을 따라 나와 연주가 들어가자, 남자가 엉거주춤 일어나며 묻는다.
“누구?”
“경찰입니다.”
중년 남자의 얼굴이 굳는다. 김연주가 능숙하게 손사래를 친다.
“불법 외국인 노동자 단속 나온 거 아닙니다, 안심하세요.”
중년 남자는 사장인 모양이다. 계속 눈치를 보던 사장이 말했다.
“그··· 왜 오셨는지.”
나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사장님 말고, 여기 지현중씨께 몇 가지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사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그, 그래요? 그럼 일 보세요. 저는 좀 나가 있겠습니다.”
찔리는 게 많은 양반인가 보다. 도망치듯 나가는 걸 보니. 뭐 상관없다. 사장이 눈짓으로 뭔가 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인다. 아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신호이겠지. 나는 지현중을 앞에 앉힌 후 물었다.
“황창수씨 아시죠?”
“예.”
“친하다고 들었습니다.”
“예, 창수 군대 갈 때 논산훈련소도 같이 갔습니다.”
음, 논산이 옆 동네도 아니고 입대하는 곳까지 동행해줄 정도면 무척 친하겠구나.
“황창수씨 동생, 황지영씨 압니까?”
“·····················”
아는 눈치다.
“아시죠?”
“예···”
“황지영씨 옛날 사건에 대해서도 아시고?”
“·········..예.”
나는 다시 수첩을 열어 사건일을 지목해 말했다.
“이 날 뭐 하셨습니까?”
“일했습니다.”
“밤에 말입니까?”
“밤에는··· PC방에 있었습니다.”
“몇 시까지 계셨죠?”
“야간조라 일이 새벽 두 시에 끝났습니다. PC방에 간 건 아마 두 시 좀 넘은 시간일 겁니다.”
“몇 시까지 계셨습니까?”
“다음 날 오후 출근이라 해 뜨고 나왔습니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고.”
“어느 PC방이었죠?”
“요 앞 상가 지하에 있는 PC방이요.”
나는 즉시 연주에게 눈짓했다. PC방 CCTV를 회수하라는 신호다. 연주는 바로 고개를 까딱한 후 공장 밖으로 나간다. 지현중의 진술은 아마 진실일 거다. 보통 사람이라도 PC방에 CCTV가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바로 들통날 거짓말을 하진 않을 거다. 지현중은 날 빤히 보며 물었다.
“그 새끼, 뒤졌죠?”
“··················.”
나는 살짝 놀랐지만 짐짓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현중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지영이 범한 그 때려 죽일 새끼.”
김현우에게 악감정이 있다? 지현중이 날 노려보며 말했다.
“아까 창수한테 전화 왔었습니다.”
음, 훈련소도 4주가 넘어가면 전화를 하게 해준다. 물론 시간 제한도 있고, 주에 몇 번 뿐이지만 가족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게 해주는 편이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시간에 동생인 황지영이 아닌 지현중에게 전화를 했다고?
지현중이 날 노려보며 말했다.
“창수가 동생 좀 지켜 달라고 울면서 전화 왔습니다. 대충 상황 돌아가는 거 보니까 그 새끼 뒤진 거 같은데. 맞죠?”
“·····················”
“맞죠? 솔직히 말해서 그 새끼가 다시 범행 저지르고 다녔으면 창수나 지영이 찾아가서 요즘 그 새끼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거 못 봤냐고 질문하지, 그렇게 꼬치꼬치 캐 물을 리 없죠.”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다. 이건 지현중이 유추한 걸까, 아님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인 걸까? 나는 가만히 지현중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현중씨가 일본도 모형을 선물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제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는 날 기분 나쁜 얼굴로 보던 지현중이 말했다.
“창수가 하도 갖고 싶어해서 사줬습니다, 사정 뻔히 아는데.”
“어디서 구입하셨습니까?”
“인터넷이요.”
“어느 사이트였습니까?”
“Happy Japan Joy라고 있어요.”
Happy Japan Joy. 관우가 알아봤던 곳이다. 또한 시신이 입고 있던 기모노를 판매하는 사이트 이기도 하다. 나는 가만히 지현중을 바라보며 물었다.
“악귀의 검이라는 애니메이션 아십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애니메이션 이야기 때문일까? 지현중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건 왜요?”
“아십니까?”
“아는데요.”
“황창수씨도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예, 창수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인데.”
둘 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다. 둘 다 용의자가 될 수 있다. 물론 군대에 있는 황창수보다 지현중을 의심하는 편이 더 확률이 높다. 하지만 과연 친구 동생의 일에 분노해 살인까지 대신할 친구가 존재할까? 어린 시절부터 친구 관계도 아니고 공장에서 만난 사회 친구가?
일단 이 사람은 알리바이 증명부터 해야 된다. 그 전까지 용의자로 몰고 가긴 어렵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근래 여행 예정이 있으십니까?”
일어난 날 올려 본 지현중이 물었다.
“왜요?”
“당분간 멀리 가시는 건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현중이 혀를 찬다.
“지금 날 범인이라고 보는 겁니까?”
“오해입니다.”
아, 물론 잠재적 용의자이긴 하지. 확증은 없으니 일단 조사해 볼 가치가 있는 사람 정도다. 나는 다시 한번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공장을 나섰다. 시끄러운 공장을 벗어나 주차장으로 나온 타이밍에 품 안에 전화가 울린다. 관우 녀석이다.
-팀장님, 낙산대공원 CCTV에 뭔가 찍혔습니다.
오! 드디어 뭔가 나오는 건가?
“얼굴은?”
-아··· 그림자만 나왔습니다.
하, 그림자라니. 아니지! 지금은 과학수사가 발전된 시대다. 그림자로 신장을 가늠할 수 있을 거다.
“그 영상 바로 KCSI로 보내서 신체분석해 달라고 해.”
-저··· 팀장님 그게···
“왜, 무슨 문제 있어?”
-직접 보시면···
관우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잡히긴 잡혔는데 애매한 모양이다. 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서로 복귀한다. 한 시간 후에 보자.”
잠시 후, 종로경찰서 강력3반 관우의 자리.
모니터 앞에 바싹 붙어 영상을 바라보고 있는 나. 바로 옆에 앉은 관우가 말했다.
“시간이··· 여기네요.”
영상을 빠르게 돌리다 표기해둔 시간에 멈추는 관우.
영상 속의 장면은 낙산대공원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이다. 바닥은 아스팔트이며, 양 옆에 가로등이 쭉 늘어서 있다. 야경 명소 답게 사람들이 편히 오갈 수 있도록 촘촘하게 설치된 가로등이 무척 밝다.
“원래 새벽 두 시에 가로등을 끈답니다. 그런데 이 날은 근무자가 실수로 조명을 끄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건 우리 쪽에선 호재다. 가로등까지 없었으면 식별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관우가 화면을 4분할해서 각기 다른 각도의 CCTV를 동시에 재생한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관우가 맨 왼쪽 위 CCTV 화면의 아래쪽을 가리킨다.
“여기.”
관우가 가리킨 화면이 잠깐 어두워진다. 그냥 스쳐 간다면 조명이 깜빡했다고 생각할 만한 찰나의 순간이다. 헐, 이걸 발견했다고? 데이터 분석 전문이라고 하더니 진짜인가 보다. 나였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겼을 거다.
관우가 다른 영상을 지목하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
전 영상과 3초 차이가 있다. 여기도 검은 그림자가 잠깐 나왔다 사라진다. 나는 영상을 보고 바로 관우가 지적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림자가 하나가 아니다?”
관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하나입니다. 문제는 가로등이예요. 하도 여러 군데서 환하게 비추니 그림자가 여러 개로 보이는 겁니다. 각도 계산을 해봤는데 이 영상으로 신장 분석은 무리예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상체가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걸 봐서 뭔가를 업고 가고 있다는 것 정도입니다. 아마도 시신이겠죠.”
하, 가로등이 호재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악재가 되었다. 하긴 허술하게 맞춰진 CCTV인데 가로등까지 없었다면 우린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엎친데 덮친다고, 관우와 CCTV를 붙잡고 무엇이라도 잡아내려 애쓰는 동안 PC방 CCTV를 확인하고 온 연주가 말을 보탠다.
“팀장님, 지현중씨. 사건 시간에 PC방에 있던 거 확인했습니다.”
“하··· 몇 시에?”
“새벽 2시 14분에 들어갔고, 나온 건 아침 6시 49분입니다.”
완벽히 범행 시간을 비껴갔다. 노련한 연주가 그 사이에 지현중이 자리를 지켰다는 것을 놓쳤을 리는 없다. 그렇다는 건 지현중이 범인이 아니란 뜻이다. 같은 시간에 낙산대공원에 시신을 지고 올라간 범인이 버젓이 있으니까.
“하, 미치겠네.”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다. 도대체 범인은 어떤 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