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93화 (93/328)

제 93 화. 목소리(Voice) (8)

관우, 연주와 함께 CCTV 모니터 앞에 선 나는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황창수는 훈련병, 지현중은 사건 시간에 PC방에 있었다···”

남은 건 황지영 본인과 그녀의 학원 친구라는 김유미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애니메이션의 내용이 진짜라면 이 살인범이 또다른 범죄자를 처단하기 위해 사냥감을 물색 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관우는 황지영씨 학원 친구라는 김유미씨 찾아봐.”

“어느 학원입니까?”

음, 무슨 학원 다니는지는 안 물어봤는데. 관우는 내 표정을 보고 눈치 빠르게 말했다.

“신용카드 기록보면 금방 나옵니다, 제가 알아서 찾아 놓을게요.”

“어, 혹시 김유미씨 전과 있는지도 잘 살펴보고.”

“예, 팀장님.”

“최영현 경위 쪽에선 아직 연락 없지?”

관우 대신 연주가 답한다.

“네, CCTV 분석 중이신 것 같습니다. 아직 특별한 연락은 없고요.”

“알았다, 연주도 관우 쪽 지원해 주고. KCSI에서 뭐 더 찾아낸 건 없어?”

“아직은 없습니다.”

하, 아무래도 직접 가서 김현우 시신이라도 봐야 답이 나오겠다.

“내가 직접 목과장님 만나고 올게.”

“예, 팀장님.”

차를 몰고 KCSI로 가는 길. 머리 속이 무척 복잡하다. 범인은 야밤에 목이 잘린 남자 시신을 업고 낙산대공원 정상까지 올라갔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황지영씨 본인이다. 한데 그녀의 신체 발달 정도를 봤을 때 같은 여성도 들쳐 업기 힘든 근력수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차를 가져간 것도 아니고 온몸이 축 늘어진 시신을 업고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가 시신을 버릴 수 있었을까?

황창수는 훈련병이다. 만약 군에서 해당 시간에 그가 탈영했다는 사실만 인정해 준다면 용의자로 즉시 체포할 수 있다. 하지만 군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탈영했던 장병이 바로 돌아왔다면 쉬쉬하고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외부에 알려지면 부대의 큰 망신이니까 당연한 결정일 것이다. 황창수는 이 점이 밝혀지지 않는 이상 용의자로 볼 수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가 해결되면 바로 용의자가 될 수 있는 입장이다.

다음으로 황창수의 친구 지현중.

살인을 한 사람과 시신을 옮긴 사람이 다르지 않는 이상. 그러니까 공범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지현중은 용의선상에 놓을 수 없다. 사건이 벌어진 시간에 PC방에 있던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황창수와 같은 애니메이션 광이고, 그에게 애니메이션 관련 물품을 선물해주는 등의 의심 가는 점들이 있다. 만약 공범이 존재한다면 일순위로 용의자가 될 것은 지현중일 것이다.

운전대에 올려 둔 손을 까딱이며 KCSI로 가는 내내 한숨을 쉬었다. 더럽게 꼬여 있는 사건이다. 어쩌면 우린 정말 헛물을 켜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 의심했던 바와 같이 만약 황지영의 주변인과 전혀 관계없는 제3자가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한다는 미친 믿음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면? 황지영의 주변을 아무리 파도 나오는 건 없을 것이다.

이번 사건은 다른 사건과 다르다. 피해자가 범죄자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준다고 하기 보다 경찰이 지켜야 할 준법정신 때문에 움직이고 있다. 피해자가 불쌍해서, 범인이 때려 죽일 살인마라서, 반드시 세상에서 격리시켜야 하는 놈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법률 상 범죄자도 인권이 있고, 살해당했을 경우 범인을 반드시 잡아야 하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성범죄자를 죽인 범인을 검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는 문득 든 생각에 스스로 머리를 때렸다.

“미친놈아, 너 경찰이야.”

내가 생각해도 미친 생각이다. 비록 잠시 스친 생각일 뿐이지만 경찰이란 놈이 이런 생각을 하다니.

잠시 후 도착한 KCSI.

미리 전화를 하고 왔기에 바로 목과장의 방으로 간 나는 커피를 들고 보고서를 읽는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형님.”

커피를 마시다 잔을 내려놓고 두 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목과장님. 안아 달라는 건가? 얼결에 그에게 안기자 등을 두드려 준다.

“도경이 왔구나.”

목과장은 영덕 사건 이후 부쩍 친한 척을 한다. 어지간히 조카를 예뻐 했던 모양이다.

“예, 형님.”

“애니메이션 킬러 때문에 왔지?”

“예, 뭐 나온 거 없습니까?”

“음, 어디 보자.”

책상 위에 산더미 같이 쌓인 보고서를 들추는 목과장님. 하긴 KCSI에 할당된 사건은 한 두개가 아닐 테니 저 정도 보고서가 이해된다. 현재 종로경찰서에서 수사 진행 중인 살인사건이 세 건이다. 다른 경찰서에서도 수사 중일 텐데 대체 몇 건의 부검 보고서를 작성하는 중인 걸까? 아마 스무 건도 넘을 것이다.

목과장이 보고서의 중간에 끼워져 있는 노란색 서류철을 꺼내 펼친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읽어 보며 인상을 찌푸린 목과장이 말했다.

“음, 흉기 확인한 거 말고 추가로 말하자면, 범인의 발이 깨끗했다는 것이 있네.”

발이 깨끗해? 목과장이 말을 잇는다.

“뭐, 이것도 사실 경찰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 제3의 장소에서 살해가 이루어졌고, 맨발이던 피해자는 제 발로 그 장소에 걸어오지 않았다는 것 정도야.”

아, 그건 이미 아는 거고. 목과장이 보고서를 자세히 본 후 말했다.

“아, 이게 있네. 피해자 혈액에서 클로로포름(Chloroform)이 다량 검출됐다.”

클로로포름? 마취제의 일종이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마취제인데 보통 손수건에 묻혀 입을 막으면 순식간에 기절한다.

“김현우를 클로로포름으로 기절 시킨 후 살해했다는 거군요.”

“반항의 흔적이 없으니 그렇다고 추측할 수 있지.”

“누군가 김현우를 인적이 드문 어딘가로 유인 후에 클로로포름을 묻힌 손수건이나 거즈로 기절을 시켰다는 건데···”

목과장이 실소를 짓는다.

“우리 도경이, 영화 많이 봤구나?”

“예? 아닙니까?”

목과장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이리 와.”

사무실을 나가 연구실로 간 목과장이 손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자, 여기 손수건이다.”

한쪽에 쌓여 있는 약품 병 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연 목과장이 말했다.

“이건 클로로포름. 잘 봐.”

목과장이 클로로포름을 손수건에 붓는다. 젖은 손수건을 들고 내게 다가오는 목과장님. 설마 그거 내 입에 대려는 건 아니죠? 나는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씩 웃은 목과장이 말했다.

“날 믿어라.”

목과장이 번개처럼 내 뒤통수를 붙잡고 손수건으로 입을 막는다.

“읍! 읍읍!”

놀라 하마터면 목과장님에게 업어치기를 할 뻔했다. 하지만 나는 곧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게 뭐지? 드라마 보면 손수건을 대자 마자 바로 기절하던데. 이건 그냥 휘발유 냄새만 나잖아? 내가 목과장을 보자, 그가 웃으며 수건을 뗀다.

“클로로포름은 휘발성 물질이다. 공기 중에서 빠르게 증발하지. 충분한 양을 묻혔다고 해도 방금처럼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손수건에 묻혀 사람을 기절 시키는 건 그야 말로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제길, 드라마가 사람을 망친다더니. 내가 그 사람이었구나. 어? 그런데 예전에 장진수의 기억 속에선 손수건에 묻힌 약물로 사람을 기절 시켰었는데. 그건 다른 약물인가 보다.

“그럼 어떻게 주입합니까?”

“주사.”

주사? 김현우에게 주사를 놓았다고? 주사를 놓는데 가만 있었단 말이야? 분명히 저항을 했을 텐데 어떻게 된 걸까? 목과장이 보고서를 펼쳐 보여주며 말했다.

“주입량은 1,500ppm이다. 전신마취 수술을 할 때와 비슷한 양이지.”

“다른 외상이 있었습니까?”

“음, 나도 그 부분이 의심스러워서 잘린 머리 쪽을 확인했는데 외상이 없어. 보통 이런 경우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이 외상을 입혀 쇼크를 준 후에 주사하는 건데, 긁힌 자국 하나 없다는 건 좀 이상하지.”

범인이 김현우에게 마취제를 주사했다. 그런데 김현우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면식범이란 걸까? 목과장이 보고서 한 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 마약 전과 있어?”

김현우는 전과 7범이다. 그 중 마약 투약 혐의가 한 건 있었다.

“예, 몇 년 전일이긴 하지만 있었습니다.”

“음, 소량의 C17H21NO4가 검출됐네.”

“그게 뭡니까?”

“코카인(cocaine).”

하, 고인이 된 양반한테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진짜 짐승 같이 살았구나, 이 자식. 잠깐, 몇 년 전에 마약에 관련된 전과가 있었다. 그런데 사망 후에도 몸에서 마약이 나왔다는 건 최근에도 했다는 뜻이다.

“얼마나 나왔습니까?”

“극소량이야, 0.003g.”

“그 정도면 얼마 전에 한 겁니까?”

“음, 적어도 사망 일주일 전이겠지?”

다시 생각해 보자. 범인은 마약 중독자다. 만약 누군가 마약을 준다고 불러냈다면 어떨까? 그럼 얌전히 주사를 맞지 않았을까? 목과장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코카인은 제외해. 만약 누가 마약을 준다고 불러냈다고 해도 코카인은 아냐.”

“왜 그렇습니까?”

“투여 방법이 달라. 코카인은 주사로 투여하지 않는다.”

아, 깜빡 잊었다. 경찰대 시절에 배운 내용인데. 코카인 투여범들을 분석 결과 그것의 흡입방법은 경구 투여가 33%, 흡입이 60~80%, 비강 분사가 25~43%였다.

“다른 마약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습니까?”

“음, 혹시나 해서 필로폰, 아편, 헤로인, 대마초, 대마수지, MDMA, 케타민 반응 검사를 시행했는데 다른 건 없었어.”

범죄에 마약이 관계되었을 가능성 자체를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코카인과 관련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목과장님은 내가 혹시 코카인 밀매업자를 확인하는 시간 낭비를 할까 미리 말해주신 것이다. 목과장이 서류철을 던져 놓으며 양손바닥을 보인다.

“이게 끝.”

“하.”

뭔가 건지긴 한 것 같은데 확실하지가 않다. 하긴, 이 일에 확실한 것이 뭐가 있겠는가? 다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것 투성이다. 그것을 확실하고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일이겠지.

“답답하네요.”

“나도 그렇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돈다. 이 세상에는 해결이 힘든 사건이 많다. 담당사건만 보며 좁은 시야를 가진 나보다 여러 사건을 보는 목과장님 쪽이 이런 경험에 익숙할 거다. 다른 형사들은 이런 진퇴양난에 빠지면 어떤 방법으로 벗어날까?

목과장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나 부검 들어가야 된다.”

“아, 예. 오늘 감사했습니다.”

목과장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답답하지? 이해한다.”

“···············..”

“김현우씨 시신이라도 보고 가.”

“왜요?”

목과장이 웃으며 말했다.

“보통 다른 형사들이 그래. 답답할 때 피해자 시신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당신 억울함 꼭 풀어주겠습니다. 뭐 이런 걸로 마인드 컨트롤? 음, 뭐라고 해야 될까, 아이스 브레이킹? 뭐 그런 걸 하는 거지.”

“··················”

“뭐, 이 경우엔 피해자가 개 잡놈이라 좀 다르겠지만. 어쨌든 할 수 있는 거라도 해봐. 형사들이 괜히 미신 믿는 게 아니다. 그럼 난 가보마.”

하, 김현우 놈 시신 보면 욕이 나올 것 같은데. 그런 놈 시신 본다고 무슨 의지가 다잡아 질까? 그래도 다른 형사들도 한다는데 나도 한번 해봐? 잠시 고민하던 나는 시신 보관실로 갔다. 신분증을 보여주고 김현우의 시신이 보관된 냉동고 앞에 선 나는 연구원이 열어주는 냉장고 옆에 섰다.

장례를 치르면 다시 이어 붙이겠지만 아직은 조사 중이라 여전히 잘린 머리가 옆에 놓여 있는 김현우의 시신. 참혹한 모습이지만 하나도 불쌍하지 않다. 성범죄도 모자라 폭행치사에 마약투여에 강도에.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는 쓰레기였기 때문이다.

“김현우. 넌 개새끼다. 하지만 우린 그런 개새끼의 죽음도 밝혀내야 된다. 그게 내 직업이니까. 말해 봐. 도대체 누가 널 죽였지?”

대답해 줄리 없는 시신 앞에서 중얼거리는 나. 하도 한심해서 웃음이 날 지경이다. 내가 이게 지금 뭣 하는 짓이지?

바로 그때, 세상이 흑백으로 물들기 시작하며 회전을 시작한다.

“시, 시신의 기억도 읽어낼 수 있는 거야?”

내 몸이 검은 세상 속 한 줄기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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