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94화 (94/328)

제 94 화. 목소리(Voice) (9)

사람이 발전을 하려면 자기 스스로의 능력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하던데. 나는 아직 내 능력을 잘 모른다. 시신의 기억도 읽어낼 수 있는 거였구나. 하긴, 영덕에선 살해 흉기를 보고 읽어낸 적이 있으니 꼭 대상을 사람으로 규정할 순 없다. 개의 기억도 읽었었는데 뭘.

뚜벅, 뚜벅.

나는 어두운 복도를 걷고 있다. 벽은 하얀색이고 바닥은 회색에 가깝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관리된 복도는 저 멀리 비상구 불빛만이 켜져 있다. 지금 몇 시일까? 스쳐 가는 창문을 보니 다른 건물에도 불이 꺼져 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 아주 늦은 밤인가 보다.

이건 누구의 기억일까? 아, 난 김현우의 시신을 보고 있다 들어왔지. 그럼 당연히 김현우의 기억이겠구나. 나는 이곳에 몰래 들어온 모양인지 복도를 꺾을 때마다 몸을 숨기고 눈만 내밀어 다음 복도를 본다. 아무도 없다. 나는 다시 복도를 걷는다.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철제 문이 보인다. 문고리가 없어 잠시 우물쭈물하던 나는 곧 자동문 버튼을 찾았다.

버튼이 아랫부분에 있어 발로 툭 치자 문이 스르르 열린다. 아주 차가워 보이는 네 개의 방이 두 개씩 양 옆으로 늘어서 있다. 손을 세척하는 곳으로 보이는 세면대가 보인다. 나는 그것들을 그대로 지나쳐 맨 끝에 있는 방으로 갔다. 어두운 방의 불을 켜자, 수술대와 의료기기들이 보인다. 여긴 병원인가 보다.

김현우는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병원 수술실에 혼자 들어왔을까? 가만, 김현우의 직업이 뭐였지? 특별한 직업이 없었는데. 수술실 규모를 보니 종합병원은 아니고, 개인병원 같다. 여기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던 걸까?

나는 차가워 보이는 수술대를 힐끔 본 뒤, 수술실 구석에 있는 CCTV를 바라본다. 누군가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나는 주머니에서 검은 천을 꺼내 카메라 방향으로 서서 천천히 눈을 가렸다. 손을 더듬거려 수술대를 붙잡고 몸을 눕힌 후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자! 하라는 대로 다 했다! 빨리 해!’

뭘 빨리 하라는 거지? 수술대가 너무 차갑다. 괜히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 같다. 이런 늦은 시간에 병원에 혼자 오는 것도 무서운데 수술실에서 눈까지 가리고 누굴 기다리는 걸까? 나는 몸이 약간 떨리고 긴장감에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낀다.

‘빨리 하자고!’

검은 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잠시 후 복도에서 구두소리가 들린다. 나는 움찔 놀라기보다 기뻐하고 있다. 잠시 후 다가올 극한의 희열을 상상하고 몸을 부르르 떤다. 자동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눈은 확실히 가렸습니까?’

특이한 목소리다. 남자 목소리 같긴 한데 뭐라고 할까··· 미소년의 목소리? 마치 변성기가 오지 않은 미성의 소년 목소리 같다. 가끔 만화에서나 들어봤던 목소리라고 하면 옳겠다.

나는 몸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돌려 뒤통수를 보여준다.

‘자, 뒤에 봐. 잘 묶어 놨지? 안 보여, 확실해.’

상대의 발소리가 들리고 내 뒤통수에 묶인 천을 더 단단히 묶는 것이 느껴진다.

‘하, 씨발. 뭐 그리 비싼 얼굴이라고. 이 짓까지 시키는 거야?’

‘싫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시죠.’

‘미쳤냐? 돈을 얼마를 냈는데. 빨리 하기나 해.’

나는 스스로 왼팔을 걷어 올렸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팔 관절에 돋아난 힘줄을 만져본 나는 왼팔을 내밀며 물었다.

‘효과 확실한 거 맞지? 이 밤에 이런 곳까지 왔는데 뿅 가는 거 아니면 죽여 버린다.’

트레이를 끄는 소리가 나고, 도구를 챙기는 소리가 들려온 후 미지의 목소리가 말을 건다.

‘걱정 마시죠. 아마 다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세계를 보실 테니. 아마 당신은 이 경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니다.’

‘하? 나 돈 없다고 무시하는 거냐? 돈 벌어서 또 오면 되지, 뭘. 빨리 놓기나 해.’

‘더 할 말이 있습니까?’

‘없다고! 빨리 해!’

왼팔이 따끔거린다. 주사가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자 마자 나는 신경을 집중했다. 몸으로 들어오고 있는 미지의 물질이 과연 내 기대에 부흥하는 것인지 무척 기대가 된다.

‘으··· 으허허···’

슬슬 몸에 감각이 없어지는 기분.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 이 느낌. 내가 이 느낌을 못 잊고 사는 거다. 이 좋은 걸! 그런데 지금껏 해온 코카인과 달리 정신이 너무 빨리 아득해 지는 기분이다. 신세계라고 하더니 정말이었구나. 나는 점점 몽롱해지는 정신으로 옹알이를 한다.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중얼중얼하는 그때, 미성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스친다.

‘ヒーローがマントを羽織るのは. 痛くて辛くて苦しんでいる女の子を包んであげる為だ.’

응? 일본어다. 몽롱한 정신으로 귓가에 들리는 일본어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는 찰나, 뭔가 차가운 무엇인가가 내 목을 지나간다. 이게 뭐지?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전혀 감각이 없다.

**

세상이 회오리 친다. 찢어지고 조각난 세상들이 다시 하나씩 퍼즐을 맞추고 나는 다시 김현우의 시신이 보관된 냉장고 앞으로 돌아왔다. 어지러움에 순간 비틀거리자, 냉장고를 열어주고 문 옆에 비켜서 있던 연구원이 얼른 내 등을 밀어주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

극심한 어지러움. 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급히 손을 내밀었다.

“제, 제 가방 좀.”

들어올 때 문 옆에 두었던 작은 가방. 연구원은 영문도 모르고 뛰어가 가방을 가지고 왔다.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어떡하든 가방을 뒤져 수첩과 펜을 꺼냈다. 마지막에 들었던 일본어. 나는 일본어를 할 줄 모른다. 조금 전 들었던 일본어는 금세 잊을 것이다. 발음나는 대로 한글로 적어 둔 나는 마지막 글자까지 적은 후에 수첩을 던지고 김현우의 시신이 누워 있는 냉장고를 붙잡았다.

아직도 어지러움이 가시지 않는다. 제길, 이건 도대체 언제 적응될까?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나는 날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 연구원을 무시하고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김현우는 제 발로 찾아왔다. 병원이었지? 규모 상 개인병원으로 보였다.’

김현우를 모종의 방법으로 데려왔다. 말하는 것을 보니 마약을 준다고 꼬신 것 같다. 대가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목소리. 미성의 남자 목소리였으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목소리 같았다. 나는 논산에서 들었던 황창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냐, 황창수는 미성이 아니었고, 지현중은 굵은 목소리였어.’

둘 다 아니다. 범인은 또 다른 남자다. 하, 이걸 어디서부터 파야 되는 거지? 혼란스러운 생각에 잠겨 있던 내게 연구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형사님. 이제 다 보셨습니까?”

중요한 생각 중에 집중력이 깨져 버렸지만 나 때문에 언제까지 여기 서 있게 할 순 없다.

“아, 죄송합니다. 다 봤습니다.”

나는 감사를 표하고 시신 보관실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또 다른 남자. 범인은 누구일까? 정말 상상대로 정의의 사도를 표방하고 있는 미친놈이 나온 걸까? 그때 핸드폰 진동이 느껴진다. 연주의 전화다.

“어, 연주야.”

-팀장님, 김유미씨 신상파악 됐습니다.

김유미. 황지영씨의 학원 친구다. 하지만 기억 속의 목소리는 미성의 남자였다. 하지만 김유미와 연관된 누군가 일수도 있으니 조사는 해야 한다.

“말해줘.”

-김유미, 20세. 고등학교 3학년 때 간호조무사 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종로 관훈동 이기철 의원이란 개인병원에 근무 중입니다.

연주의 말을 듣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개인병원이라고?

“바로 김유미씨 소재 파악해.”

-지금 병원 근무시간이니 거기 있을 겁니다.

“병원 주소 문자로 찍어주고, 거기로 바로 와.”

-뭐 있는 거예요?

“아직 몰라, 일단 병원으로 와. 아! 관우 좀 바꿔 봐.”

연주가 관우를 바꿔준다.

-예, 팀장님.

“관우야, 이거 무슨 말인지 확인 좀 해줘.”

나는 발음기호대로 표기했던 수첩메모를 읽었다. 관우가 알아들을까? 워낙 몽롱한 기억으로 들은 거라 정확하지 않다. 한국어라면 대충 유추하겠지만 외국어라면 정확히 발음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울 것이다.

-어··· 문장이 안 맞긴 한데··· 혹시 팀장님도 악귀의 검 애니메이션 보신 겁니까?

“뭐?”

-그거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이 일본어도 애니메이션 대사구나.

“무슨 뜻이야?”

-‘히어로가 망토를 두르는 것은.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여자애를 감싸주기 위해서야’라는 뜻입니다. 명대사이죠.

히어로가 망토를 두른다?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여자를 감싼다? 뒤에 나오는 여자는 분명 황지영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럼 범인은 황지영을 위한 히어로란 말인가? 제길, 제일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결과다. 이 자식은 자신을 히어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빨리 막아야 한다. 황지영과 같은 피해자는 찾으려고만 한다면 이 대한민국에 만 명도 넘는다. 사건들의 범인들을 모두 죽인다면 우린 희대의 살인마와 조우하게 될 것이다.

“알았다, 바로 병원으로 와.”

-예, 팀장님. 근데 그 대사는 왜···

관우의 질문을 듣는 도중 전화를 끊었다. 설명할 시간도 없지만 설명할 방법도 없으니까. 나는 차에 올라타 연주가 보낸 문자의 주소지로 출발했다. 관훈동이라면 연주, 관우가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겠다.

**

관훈동 이기철 의원.

눈 앞에 앉은 노인이 이기철 의원인 모양이다. 작은 돋보기를 쓰고 내가 내민 신분증을 자세히 보던 의사가 눈을 치켜 뜨며 물었다.

“경찰이 여긴 무슨 일로?”

“여기 김유미라는 간호조무사가 있습니까?”

“유미씨는 왜?”

“몇 가지 여쭈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음.”

“여기 CCTV 설치돼 있죠?”

“있습니다만.”

“수술실 쪽에도 있습니까?”

“예, 복도와 수술실 내부에 있습니다.”

“좀 볼 수 있습니까?”

“영장 가져 오셨소?”

“··················.”

“없습니까?”

“협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장도 없이 수술실 CCTV를 달라는 부탁을 환영하는 병원 관계자는 없을 것이다. 의료소송과 관계된 사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살을 찌푸리는 의사에게 눈치 빠른 연주가 들러붙는다.

“선생님! 저희 의료소송 수사하는 거 아닙니다.”

의사가 연주를 바라보며 눈으로 그럼 무엇이냐 질문을 던진다. 연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른 수사 때문이예요. 와, 근데 생각보다 병원이 깨끗하네요. 사실 우리 언니도 여기서 수술했는데.”

이기철 의원의 눈이 동그래지며 물었다.

“언니가? 어디?”

“코요, 선생님이 코를 그렇게 잘 하신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아, 여기 성형외과였지. 이기철 의원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허허, 내 전문이지. 안면윤곽은 안 받았고?”

“네, 코만 받았어요.”

“어떤 형태로?”

“직반 버선이요.”

“허허, 그거야 말로 내 전문이지.”

안면윤곽은 뭐고, 직반 버선은 또 뭐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연주가 다시 말을 잇는다.

“언니가 그러던데. 후기 잘 써줘서 할인도 많이 해주셨다고.”

“허허, 그래? 우리 실장이 그런 건 또 잘 챙기지. 어디 덧난 곳은 없고?”

“네, 완전 미인 됐어요! 친구들에게도 여기 추천하고 다니던데.”

“허허, 그래?”

이기철 의원의 표정이 완전히 풀어진다. 김연주가 그런 의사에게 말했다.

“절대 의료소송 관련 문제 아니고요, 지금 수사 중인 사건이 있는데 김유미씨를 참고인으로 질문 좀 드리려고 만나는 거예요.”

이기철 의원이 날 힐끔 보며 물었다.

“참고인 조사하는데 CCTV는 왜?”

연주도 내가 CCTV를 요구할 줄은 몰랐는지 날 바라본다. 선뜻 답할 말이 없다. 죽은 자의 기억을 읽었더니 여기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 같다고 할 순 없지 않는가? 연주는 내 표정이 곤란해지는 것을 파악하고 기지를 발휘한다.

“혹시 저희가 찾는 사람이 김유미씨를 만나지 않았는지 확인하려고 보는 거예요.”

이기철 의원이 나와 연주를 번갈아 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봐야지, 나랏일 하는 사람들인데 내가 방해해서 쓰나. 언니한테 홍보 좀 잘 부탁한다고 전해줘.”

“네, 물론이죠! 저도 같이 홍보할게요, 선생님!”

“허허, 그래. 프론트에 전화해 둘 테니 나가면 안내해줄 거야.”

“네, 감사합니다!”

후, 일이 잘 풀렸다. 눈치 빠른 연주 덕에 어려운 산을 넘었구나. 원장의 방에서 나와 프론트로 가는 길. 나는 눈으로 연주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말했다.

“언니가 정말 여기서 수술했어?”

연주가 씩 웃으며 앞서 간다. 킥킥대며 웃는 관우가 속삭인다.

“연주 언니 없어요, 외동딸인데요. 킬킬.”

헐, 순간적인 기지가 아니라 처음부터 거짓말이었구나. 대단하다, 김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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