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96화 (96/328)

제 96 화. 목소리(Voice) (11)

종로 경찰서 강력계 취조실.

연주와 마주 앉아 있는 김유미가 보인다. 눈썹 위에서 일자로 자른 앞머리에 칼 단발. 20대 초반의 간호조무사는 또래 친구들과 비슷한 화장법과 비슷한 차림새를 한 보통 사람이었다.

“아니, 제가 왜 여기 와야 되는지 설명을 좀 해주세요.”

연주가 노트북을 열고 물었다.

“9일날 밤에 병원에 계셨죠?”

“네.”

“병원 영업시간은 6시까지로 알고 있습니다만 새벽까지 뭘 하셨습니까?”

김유미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6시가 마지막 수술 시간이고요. 수술이 8시에 끝나요. 처치 끝나고 선생님들 퇴근하시는 거 본 후에 정리하면 저희 퇴근 시간은 보통 9시고요.”

연주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날 12시 넘어서 편의점에 다녀오셨다고 하던데.”

“맞아요. 주차장에서 김씨 아저씨도 만났어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게 왜요?”

연주가 노트북 화면을 돌리며 말했다.

“당일 CCTV입니다. 누군가 약 30분간의 영상을 삭제했습니다. 당일 병원에 남아 있던 사람은 김유미씨와 김씨라는 경비원이었고. 둘 중 누군가 영상을 삭제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의심 같은데.”

김유미가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왜 절 의심할 이유예요? 전 CCTV 만져본 적도 없어요. 어떻게 만지는지도 모르고.”

“그럼 당일에 다른 분이 병원에 또 계셨습니까?”

“아뇨? 제가 나갈 때까진 당직실에 있던 김씨 아저씨 말고는 없었어요.”

“당일에 경비실에 들어가신 적은 없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경비실에 왜 가냐는 말이예요. 갈 이유가 없죠.”

모니터실에서 연주와 김유미의 설전을 지켜보고 있는 나. 모니터실 문이 열리며 관우가 들어온다.

“팀장님, 김유미씨 핸드폰 기록 돌렸는데 마약관련 커뮤니티 흔적은 없습니다.”

“삭제한 거 아니고?”

“삭제해도 다 나와요. 그쪽은 접근한 기록이 없고 전부 성형 관련된 거랑 애니메이션 쪽만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예, 정확히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출연 배우들을 검색했던 것 같습니다.”

응? 애니메이션에 출연 배우가 어디 있어? 다 그림 아니야? 관우는 내 표정을 보고 속에 있던 질문을 눈치챘는지 웃으며 말했다.

“성우요, 성우.”

아, 그렇지. 일본 애니메이션은 성우들도 인기가 있다고 들었다. 어떤 성우는 배우들 만큼이나 인기가 있다고 했다. 김유미는 애니메이션의 지독한 팬인 모양이다. 관우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김유미씨 입출금 기록입니다.”

주 거래 은행은 두 개. 계좌도 각기 하나씩 두 개다. 하나는 적금 통장이고, 하나는 월급 통장이다. 월급이 들어오면 당일 날 카드 값으로 월급의 70%가 빠져나간다. 10%는 적금 통장에 넣고 나머지 중 매달 지속적으로 입금하는 이름 하나가 보인다.

“이 사람 누구인지 알아봤어?”

“집 주인이요.”

음, 월세 사는구나.

“차명계좌나 대포통장을 사용할 가능성은?”

관우가 손사래를 친다.

“제가 전에 있던 부서에서 차명계좌 찾는 일 했는데 저 사람은 그런 거 쓰는 부류가 아닙니다. 원룸 월세 사는 세 후 월급 230만원짜리 보통 사람이 차명계좌라니요. 그거 만드는데 얼마가 드는데.”

음, 이쪽 전문인 관우가 그렇다면 아닐 확률이 높겠다. 김유미를 범인으로 확정하려면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먼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마약성분의 약품을 투약하게 해주겠다는 광고성 글을 올린 흔적을 찾거나, 그런 글을 올린 사람에게 접근해 연락처를 준 기록을 찾는 것. 다음으로 투약해준 사람에게서 돈을 받은 증거다. 하지만 둘 중 무엇도 나오지 않는다.

관우가 깍지를 끼고 손을 풀며 말했다.

“하지만 일단 이것만 조사해서는 부족하니, 가족과 친지들 명의 통장까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고. 최영현 경위 연락해서 그만 올라오라고 해.”

“예, 팀장님.”

관우가 나가고 혼자 남은 모니터링실. 다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는 김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날 후기 할인 때문에 확인할 게 있어서 남은 거라고요.”

연주가 물었다.

“후기 할인이 뭐죠?”

“어플 다운 받아서 성형 관련 전후 사진 올리는 게 있어요. 그거 올리면서 병원비 영수증이랑 후기 올려주면 수술비 할인해 주는 이벤트가 있거든요. 고객님 중 한 분이 다른 건 다 올리셨는데 수술 2주 후에 올리는 후기에 사진이 안 올라온 게 있어서 연락 드리고 기다리면서 다른 분들 후기 잘 올라왔는지 체크 중이었어요.”

“집에서 확인해도 되지 않나요?”

“전 집에 가서 일 안 해요. 제가 영업 뛰는 실장도 아니고 원래 이 일도 제 일 아니거든요. 실장 언니가 집에 제사 있다고 부탁하고 가서 남은 거고요.”

“평소에는 안 하시던 일이란 겁니까?”

“네! 전 야근이 제일 싫어요. 언니가 이거 해주면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콘서트 티켓 준다고 해서 한 거예요.”

“평소 안 하시던 야근을 하신 날에 하필 사건이 일어났군요.”

연주가 말을 살짝 꼰다. 김유미가 발끈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사건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잖아요! 무슨 일인지 설명이라도 해줘야 내가 반론을 제시하죠!”

김유미의 목소리. 같은 여자의 목소리들과 대조해도 톤이 높은 편이다. 게다가 뾰족하고 약간 코가 막힌 듯한 목소리다. 비염이 있는 모양인데 내가 기억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너무 큰 차이가 있다. 목소리 변조의 가능성이 있으니 아직 의심을 풀 단계는 아니다.

나는 마이크를 누르고 연주의 이어폰을 통해 말을 전했다.

“잠깐 쉬었다 하자.”

연주가 거울을 힐끔 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난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사람 가둬 놓고 어디를 가요! 나 오후에 학원 시험 있는데!”

“잠시면 됩니다.”

“하···”

연주가 모니터링실로 돌아와 한숨을 쉰다.

“후, 쉽지 않네요. 진짜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모든 정황이 저 여자를 가리키고 있어요.”

나도 같은 생각이다. 나도 기억을 읽지 않았다면 저 여자가 범인이라 확신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취조실에 홀로 앉아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유미를 노려보며 말했다.

“관우 쪽에서 증거 찾고 있는데 아직 커뮤니티 이용기록이나 돈이 오간 기록은 없어.”

“하···”

“일단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정황증거로 일단 영장부터 신청하자.”

연주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네, 영장발부 심사 서류 준비해서 가져올 테니 결재해주세요.”

“그래.”

연주가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그때. 모니터실 안에 있던 김유미가 핸드백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와 연주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을 때. 김유미가 종이를 펴 뭔가 중얼중얼 읽기 시작한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이 총알에 뚫렸을 때? 아니!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아니! 맹독 버섯 스프를 먹었을 때? 아니!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심장이 멎는 기분이다. 방금 김유미의 목소리. 그건 기억 속의 음성과는 다르지만 분명히 남자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보통 사람이 원래 목소리와 저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음색을 낼 수 있는 건가? 연주도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김유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저게 뭣 하는 걸까요?”

“·····················..”

취조실 안에 있는 김유미가 펜으로 종이에 뭔가 체크를 한 뒤 다시 중얼거린다.

“자기 인생에 관해서 너도, 나도 독자는 아니야. 바로 작가지. 결말 정도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잖아?”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목소리가 또 바뀌었다. 이번엔 아주 냉정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어쩌면 기억을 읽은 후 날 혼란스럽게 만든 그 목소리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재빨리 뛰어 취조실 문을 벌컥 열었다.

종이를 보며 뭔가 중얼거리던 김유미가 흠칫 놀라며 날 바라본다.

“왜, 왜요?”

나는 그녀가 쥐고 있는 종이를 와락 빼앗았다. 종이에는 뭔가의 대사로 보이는 텍스트가 나열되어 있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

김유미가 눈치를 보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까 여형사님이 일 보러 간다고 좀 기다리라고 해서.”

나는 종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게 무엇인지 묻는 겁니다.”

김유미는 내가 쥐고 있는 종이를 힐끔 본 후 말했다.

“그게··· 오후에 학원에 중요한 시험이 있어서 연습하고 있었는데···”

학원? 무슨 학원이길래 이런 걸로 시험을 보는 걸까?

“무슨 학원 다니십니까?”

김유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성우 학원이요. 제 꿈이거든요.”

성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성우라면 그 목소리가 이해가 된다. 마치 만화영화의 주인공 같은 미소년의 목소리. 성우라면 충분히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때 열어 둔 취조실 문에서 관우가 나타났다. 그는 말없이 내 뒤에 선 뒤 핸드폰을 내민다. 관우가 보여준 영상 속. 사건 시간에 김유미가 사무실로 들어가는 영상이 보인다. 그리고 새벽 세 시가 되어서 사무실에서 나오는 영상이 잡혔다. 관우가 속삭였다.

“사무실에서는 수술실로 가는 다른 통로는 없습니다.”

즉, 김유미는 범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 범인은 김유미가 사건 당일 야근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이 있으니 경비원이 아직 문을 잠그지 않았을 것이고, 그사이 범행을 저지를 틈을 발견한 것이다.

“김유미씨.”

“네?”

“당일 야근한다는 거 누가 알고 있습니까?”

“어··· 그게.”

“누구와 연락한 적 있습니까?”

김유미는 생각이 나지 않는지 핸드백을 뒤져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더니 화면을 내밀었다.

“여기 단톡 방에 이야기 하긴 했는데.”

그녀가 넘겨준 단톡 방. 오늘 새벽까지 야근을 하게 됐다며 짜증을 냈다가 금방 아이돌 그룹 콘서트 티켓을 받는 조건이라며 희희낙락하는 김유미의 톡이 보인다. 방에 있던 사람들 중 일부가 부럽다는 답을 했다. 자신이라면 이틀 밤도 대신 야근해줄 수 있다며. 어떤 이는 티켓을 팔라고 하기도 한다.

나는 방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톡 프로필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물었다.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어··· 학원 친구들이요.”

머리 속에 벼락이 치는 듯하다. 내 인상이 일그러지자 관우가 물었다.

“팀장님, 왜 그러세요?”

“·····················”

나는 가만히 김유미의 핸드폰을 바라보다 거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연주야!”

연주는 아직 사무실로 가지 않았는지 모니터링실 문을 열고 취조실로 뛰어왔다.

“네!”

나는 연주와 관우를 바라보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황지영씨. 지금 어디 있지?”

연주와 관우, 그리고 김유미까지 내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연주가 놀라며 물었다.

“황지영씨 소재는 갑자기 왜···?”

관우도 거든다.

“팀장님? 갑자기 황지영씨는 왜요?”

나는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머리 속에 처음 황지영을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실례지만, 이틀 전 새벽에 어디 계셨습니까?'

'새벽··· 이요?'

'네,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어디 계셨습니까?'

'집에 있었어요.'

'혼자 계셨습니까?'

'네··· 오빠가 군대 간 후엔 계속 혼자 지내거든요.'

'아무데도 안 나가시나요?'

'아뇨··· 학원 다녀요. 일주일에 세 번이요. 근데 이틀 전이면 월요일이니까 학원 가는 날 아닌데.'

'학원은 언제 가시죠?'

'화, 목, 토요일이요.'

눈을 뜬 나는 떨리는 손으로 황지영의 단톡 방 학원 친구목록을 확인 후 연주와 관우에게 보여주었다.

그곳에 황지영의 이름이 있다.

“황지영씨도 사건 당일 김유미씨의 야근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관우야.”

관우가 놀란 얼굴로 핸드폰을 보다 날 올려 본다.

“예?”

“악귀의 검 주인공 말이다.”

“예.”

“남자야?”

“네, 테츠야 라고···”

“성우는?”

관우가 그게 뭐? 하는 표정으로 답한다.

“토요사키 리에 말씀이세요? 악귀의 검 주인공인 테츠야는 남자 주인공이지만 성우는 여자입니다. 그게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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