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7 화. 목소리(Voice) (12)
진술 모니터링실.
일부러 조명을 최대 밝기로 해 둔 취조실에 홀로 앉은 황지영이 불안한 눈빛으로 손톱을 깨물고 있다. 모니터링실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관우가 혀를 차며 말했다.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도 없어 보이는데. 김현우를 살해한 건 약물로 대응 불가능한 상태에서 그랬다고 해도, 낙산대공원까지 시신을 옮길 힘은 전혀 없어 보이는데요.”
관우는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그동안 낙산대공원 CCTV를 다각도로 확인하고 그림자를 분석한 관우는 범인이 리어카 등과 같은 다른 도구 없이 오롯이 시신을 엎고 대공원 정상까지 올라갔음을 밝혀냈다. 비록 발과 그림자만 찍힌 영상이었고, 여러 곳에서 동시에 쏘아진 조명 덕에 그림자가 분산되었지만 데이터 분석 전문가 다운 활약이었다.
소식을 듣고 논산에서 올라온 최영현이 터질 듯한 팔로 팔짱을 낀 채 황지영을 관찰하며 말했다.
“내가 봐도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정황증거 상 그냥 넘어가기도 그렇고. 하, 골치 아프네.”
최영현은 황지영과 대화해 본 적은 없지만 그녀의 집 앞에서 얼굴을 익힌 적이 있다. 형사의 직감 상 상대가 범인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그는 아직도 못 미덥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정황증거 상 황지영을 조사해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최영현이 날 보며 물었다.
“연주는 어디 갔습니까?”
“황지영씨의 정신과 상담의사를 모시러 갔습니다.”
최영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황지영을 본다. 한참 가녀린 여성을 보던 최영현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솔직히 좀 안 됐네요.”
나도 그렇다. 관우도, 연주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녀는 피해자다. 아니, 피해자였다. 이제 그녀는 가해자가 될 지도 모른다. 나는 노트북을 챙기며 이어폰을 꽂았다.
“관우야, 나 들어간다. 1차 진술 받을 테니 연주 오면 바로 콜 해.”
“예, 팀장님.”
진술실로 가 문을 열자, 작은 문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목을 움츠리는 황지영이 보인다. 나는 문고리를 붙잡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까딱 숙였다.
“다시 봅니다.”
“···············..”
나는 겁먹은 눈동자를 떨고 있는 황지영의 앞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그녀에 대한 기본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강압적인 기본조서를 꾸미진 않았다. 그게 피해자였던 그녀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본조서에 황지영의 신상정보를 알아서 입력 후 손 깍지를 꼈다.
“황지영씨.”
내 작은 움직임까지 주시하고 있던 황지영이 놀라며 말했다.
“네?”
내 눈이 가늘어진다. 이게 연기라고? 문득 내 앞에서 부모를 죽이고도 태연하게 환자 연기를 했던 김상식 생각이 난다. 하지만 그 새끼 연기는 다 보였다. 그런데 지금 눈 앞의 황지영은 어떤가? 지금 이게 연기라면 그녀는 성우가 아니라 연기자를 했어야 한다. 연기를 했다면 세계적인 배우가 되고도 남을 것 같다. 과연 그녀는 내 앞에서 고도의 연기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잘못 짚은 걸까? 나는 김현우의 기억 속에 남았던 목소리를 미리 수첩에 적어왔다. 일본어였기 때문에 관우에게 미리 부탁해 적어온 것이다.
나는 수첩을 찢어 메모지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
“이거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황지영이 손을 덜덜 떤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경찰서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이다. 그녀가 메모지를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ヒーローがマントを羽織るのは. 痛くて辛くて苦しんでいる女の子を包んであげる為だ
이 목소리가 아니다. 나는 몸을 내밀며 말했다.
“그거 무슨 대사인지 아십니까?”
황지영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메모지를 바라본다. 긴장 탓에 무슨 대사인지 생각도 못하다가 내가 물으니 기억을 떠올리는 모양이다. 황지영은 금세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알아요.”
“그렇게 읽는 대사 아니죠?”
“··················..”
“성우 학원 다니시니 잘 아시지 않나요?”
“네···”
“좀 더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까?”
“·····················”
나는 황지영을 주시했다. 아마 그녀는 내 기억 속에 있는 목소리를 내진 않을 것이다. 최대한 차갑게 읽으면서도 약간의 변조를 가미하겠지.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비슷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확인만 되면 된다. 나는 메모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목을 가다듬는 황지영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나는 내 예상과 너무나 빗나간 결과에 입을 떡 벌렸다. 황지영은 방금까지 보여주었던 긴장한 표정을 싹 지웠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그녀는 차가운 얼굴과 표정으로 말했다.
"ヒーローがマントを羽織るのは. 痛くて辛くて苦しんでいる女の子を包んであげる為だ.(히어로가 망토를 두르는 것은.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여자애를 감싸주기 위해서야)"
나는 내 기억 속의 목소리와 황지영의 목소리가 완벽히 맞아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게 말이 되나? 그녀가 진범이라면 이렇게 나와서는 안 된다. 물론 황지영은 내가 기억을 읽어내는 걸 모른다. 하지만 자기가 직접 한 말이었기에 심리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방어적 태세를 취해야 한다. 혹시 수술실에 자기가 모르는 CCTV가 있고, 음성이 녹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황지영은 그런 것 따위는 모른다는 듯 김현우의 기억 속에 있는 음성을 완벽히 흉내 내고 있다.
순간 말을 잃고 멍하게 그녀를 보는 나. 황지영은 대사를 읽고 잠시간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다, 꿈에서 깬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다시 목을 움츠린다.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메모지를 둔 황지영이 말했다.
“이제··· 됐나요?”
나는 그녀의 변화를 보며 다시 눈썹을 꿈틀거렸다.
‘단순히 연기를 하기 위해 감정을 바꾼 것이 아니다. 순간적이지만 완전히 딴 사람이 됐다.’
연기자는 연기를 위해 감정을 잡는다. 배우는 감독의 슛 사인이 나오면 완벽히 극 중에 나오는 인물이 되려 노력한다. 황지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연기를 해보라 요구하지 않았다. 단순히 차가운 말투로 텍스트를 읽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그녀는 목소리만이 아니라 표정과 태도까지 달라졌다.
나는 그런 황지영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사건 날 밤에 집에 계셨다고 진술하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네? 네···”
“집에서 뭘 하셨습니까?”
“집에서··· 어··· 잤던 것 같아요.”
“보통 몇 시에 주무십니까?”
“원래는 10시면 잤는데 요즘은 좀 늦게 자는 편이예요. 오빠가 없어서 그런지···”
“그날은 몇 시에 주무셨습니까?”
“아무리 늦어도 1시는 안 넘기는데···”
거짓말을 하는 범죄자들은 특징이 있다. 인간의 신체는 일방적 거짓말을 할 때 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여러 가지 생리적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짓말을 하면서 표정을 통제하려 한다 해도, 찰나의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주 미세한 변화를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다.
실제 경찰대에서는 거짓말을 할 때 나오는 신체적 변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가르치기도 한다. 나는 황지영의 반응을 살피며 내가 공부했던 지식들과 대조하기 시작했다.
먼저 거짓을 말하는 자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 컨택을 피하거나, 정반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눈을 강하게 마주친다. 하지만 황지영은?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힐끔거리고 있다. 이건 여기 불려와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 한결 같이 이랬다. 어린 시절 강력범죄를 겪은 이임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반응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거짓말을 하는 이는 손으로 코를 만지거나, 머리를 가다듬거나, 양말이나 옷을 당기거나, 입술을 문지르는 등의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다.
또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올바른 자세로 허리를 펴고 앉아 있지 않을 때가 많다. 거짓말을 할 때 스스로도 마음 한 켠이 불편하기 때문에 이유 없이 자세를 바꾸거나 꼼지락거릴 가능성이 높다. 황지영은 살짝 허리를 구부린 자세로 위축되어 앉아 있지만 자세의 변화가 없다. 여전히 방어적 태세이다.
만약 그녀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나는 밝혀낼 수 없다.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해야 가능할 텐데 그건 법정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다. 나는 마지막 방법을 써 보기로 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진실을 덮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가 많다. 스스로 그 허구의 이야기를 계속 지어내기 위해 시간을 끌게 되기 때문이다. 대화의 순간순간 찾아오는 침묵의 순간들을 예민하게 포착하면 상대의 거짓말 여부를 좀 더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러한 부분을 포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상대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질문을 한다.’
노련한 거짓말쟁이들은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질문에 대해 사전 연습을 한다. 어떤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미리 고민해 두었기에 당황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이 순간 황지영의 입장이라고 생각해 보자. 나는 마주 앉아 날 취조하는 형사가 무슨 질문을 던질 거라고 예상할까?
‘김유미씨의 단톡 방에서 그녀가 사건 날 야근을 한다는 걸 보고, 인지한 상태였습니까?’
‘사건 날 당신이 집에서 잤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김현우가 입고 있던 애니메이션 코스프레가 나온 만화를 당신도 보셨습니까?’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이 네 가지 질문이 그녀 입장에서 예측할 수 있는 수준의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녀가 예상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질문을 해야 난관을 타계할 수 있다. 무슨 질문을 해야 상대를 당황 시킬 수 있을까? 어떤 질문이 완벽한 그녀의 연기를 흔들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이 사람이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나는 황지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떨리는 눈동자. 가늘게 진동하는 손가락. 긴장으로 하얗게 질린 손. 저런 신체 변화를 과연 연기라는 영역으로 제어할 수 있는 걸까? 어쩌면 나는 정말 헛다리 짚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혼란은 어쩌면 내 마음 속에 그녀가 범인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이어폰에서 관우 목소리가 들려온다.
-팀장님, 연주가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나는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보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편하시겠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황지영이 어깨를 움츠린다. 가엾은 성폭력 피해자는 좁은 방 안에 남자와 둘이 있다는 것만으로 공포에 질려 있다. 또한 상대가 갑자기 움직이는 것도 두렵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실수를 사과하고 취조실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 서 있던 연주가 옆 방을 눈짓한다.
“옆 취조실에 계세요.”
“음, 수고했다.”
옆방에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사람 좋게 생긴 중년의 여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나는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수고스럽게 여기까지 모시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선생님.”
여의사가 명함을 주며 웃는다.
“괜찮습니다, 경찰의 협조 요청이 우선이죠. 여기 제 명함이고요, 저는 정신의학과 전문의 최예림입니다.”
최예림 선생의 명함을 받은 나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실례지만 관리하시는 환자 중 황지영씨의 병명과 상태에 대해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최예림 선생이 입술을 살짝 내밀고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환자 상태에 대해 말씀드리는 건 위법행위입니다만, 그녀가 사건의 중요용의자인가요??”
역시 공부를 많이 한 의사 선생 다운 질문이다. 중요용의자인 경우 수색영장 청구는 불가피하다. 여기서 진술을 거부해도 영장이 나오면 어차피 다시 불려와야 한다는 걸 알기에 하는 질문이다.
“예, 맞습니다.”
최예림 선생이 한숨을 쉰 뒤 말했다.
“황지영 환자는 DID 환자로 장기 치료 중인 환자입니다.”
“DID가 정확히 뭡니까?”
“해리성 인격 장애입니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그건···”
최예림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다중인격 장애라고 부르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