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8 화. 목소리(Voice) (13)
한 사람 안에 둘 이상의 각기 다른 정체감을 지닌 인격이 존재하여 행동에 전적인 영향을 끼치는 정신질환.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 질환은 사실 매우 희귀한 질환이다. 최예림은 놀라는 날 보며 말했다.
“형사님도 잘 아시겠지만 황지영씨는 13세에 매우 충격적인 범행을 겪었습니다. 자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의 유아나 청소년기에 극한의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면 뇌가 정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방어적으로 그 사건이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 같은 몸 속의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는 케이스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혼자 두고 온 황지영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충격적인 사실과 황지영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리며 물었다.
“그렇다는 말씀은 황지영씨 속에 두 개 이상의 자아가 있고, 가끔 다른 사람의 인격이 튀어나오기도 한다는 뜻입니까?”
최예림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꼭 다른 자아가 사람이라 규정할 순 없습니다. 동일 질환의 환자들은 자기 속에 있는 자아들의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고 말합니다. 어린이, 반대의 성별, 청소년 특성을 가진 자아들이 흔히 발견되고, 심지어 인간이 아닌 동물, 요정, 악마의 자아도 발견됩니다.”
악마의 자아가 나오기도 한다고?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특별한 발동조건이 있는 겁니까?”
나는 악의(惡意)를 원동력으로 상대의 기억을 읽는다. 그녀에게도 다른 자아가 나올 때 발동원리가 있지 않을까? 최예림 선생이 답한다.
“환자들은 본인의 머리 속 내부 세계 안에 다른 자아들이 존재하고, 내부 세계에는 자아들이 사용하는 각자 방이나 공간이 존재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특정 자아가 나오고 싶을 때 몸의 통제권을 가져간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발동 조건 없이 특정 자아가 스스로 나오고 싶을 때 나온다는 말씀입니까?”
“네, 대부분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 물론 예외 케이스도 있습니다. 황지영씨도 예외 케이스였죠.”
“혹시 한 인격이 활동할 때 다른 인격이 기억을 잃을 수 있습니까?”
최예림 선생이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1번 인격이 활동한 내용을 2번 인격이 전혀 모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신체능력도 변화합니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신체 능력이 변해요?”
“네, 예를 들면 근력을 들 수 있습니다. 나는 여성이지만 내 또 다른 인격이 남자인 경우 심리적 영향이 신체에 영향을 미쳐 초인적인 근력을 내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지속적일 수 없으며 일시적인 것입니다.”
하··· 이거였구나. 이것이 시신을 낙산대공원 정상에 올려 둘 수 있는 이유였구나. 또한 내가 황지영에게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던 이유도 이것이구나. 지금 취조실에 있는 황지영의 인격은 다른 인격이 한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인격은··· 두 개 이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지영씨도 그렇습니까?”
“환자들 중 50%는 10명 이하이지만, 한 남자에게 무려 24명의 인격이 들어있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황지영씨 사례에서는 일곱 개의 인격이 발현되었습니다.”
“일곱 개··· 어떤 인격이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최예림 선생이 한숨을 쉬며 수첩을 연다. 황지영에 대해 기록해둔 부분을 편 그녀가 자료를 보며 말했다.
“황지영씨는 특이한 케이스였습니다. 일곱 개 모두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애니메이션···”
“네, 어떤 때는 밀집 모자를 쓰고 팔이 늘어나는 선장이 되기도 하고, 악마에게 몸을 빼앗기고 갑옷에 영혼이 갇힌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소년이 되기도 하죠.”
“··················..”
“저는 황지영씨를 장기간 치료하고 연구하며 한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무슨 결론입니까?”
최예림이 수첩을 덮으며 말했다.
“황지영씨 본인의 원래 인격을 제외한 모든 인격이 자신을 위협하는 악(惡)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인공이었으며, 일곱 개 중 여섯 개가 남성의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남성의 인격. 그것은 황지영이 겪은 범죄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된 것일 확률이 높다. 최예림 선생이 날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황지영씨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건 그녀의 질환 때문입니다. 그 부분을 꼭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필요하다면 법정 증언도 하겠습니다.”
황지영은 사람을 죽였다. 그것이 자신 안의 다른 인격이 저지른 일이라 하더라도 그녀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그녀가 겪었던 극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의 일환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가 법정에 섰을 때 이러한 부분에 대해 꼭 어필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그녀가 범인이란 것부터 밝혀내야 한다.
“물론입니다. 반드시 보고서에 기록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선생님. 황지영씨를 어떤 방법으로 치료를 하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최예림 선생은 내가 황지영을 감싸는 듯한 발언을 하자 안심한 표정으로 협조적인 태도를 취한다.
“황지영씨의 방에 있는 물건들을 치웠습니다.”
응? 물건들을 치워? 문득 황지영의 방이 떠오른다. 애니메이션 브로마이드와 만화잡지가 잔뜩 쌓인 오빠의 방과 다르게 침대와 화장대, 장롱 하나가 끝이었던 단출한 방. 인격 속에 무려 일곱 개의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살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없는 방이었다. 그런데 그게 의사 선생님이 치료의 일환으로 처치해둔 것이었다고?
“방을 치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최예림 선생이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황지영씨의 경우, 희귀하게 인격이 발현되는 조건이 확인됐습니다. 아주 높은 확률로 인격이 모습을 드러내는 원인이 물건인 경우였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보았을 때 그에 맞는 인격이 튀어나오는 거죠.”
어떤 물건을 보았을 때 인격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어떤 겁니까?”
최예림 선생이 눈을 감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일 먼저 치운 건 황지영씨 부모님의 사진이었습니다. 액자, 앨범 모두 치웠죠.”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녀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모두 김현우가 저지른 사건 때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건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딸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사력을 다해 일하다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가장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발버둥치다 병을 얻어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황지영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런 사건을 겪지 않았다면 부모님이 그런 인생을 살다 돌아가시지 않아도 됐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방에 아무것도 없었군요.”
“황지영씨 댁에 가 보셨습니까?”
“네.”
“제가 처음 황지영씨 댁에 갔을 때는 방 전체가 애니메이션 관련 물품으로 가득했습니다. 황지영씨 내부에 있는 인격이 애니메이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고 오빠의 협조를 얻어 방을 치운 것이죠.”
그랬구나. 애니메이션 관련 물품을 보았을 때 주인공의 인격이 나올 수도 있기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이구나. 가만. 애니메이션 관련 물품? 나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질문을 토해냈다.
“황지영씨의 인격 중 애니메이션 ‘악귀의 검’ 주인공도 있었습니까?”
최예림 선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수첩을 연다.
“네, 있습니다. 테츠야 라고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머리 속의 정보가 순식간에 퍼즐로 이어진다. 나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협조 감사합니다. 혹시 더 여쭤볼 것이 있으면 전화 드려도 될까요?”
최예림 선생은 내가 뭔가 잡아냈다는 것을 눈치 채고 고개를 끄덕인다.
“네, 물론입니다. 단, 제 도움은 언제나 황지영씨를 위한 것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괜찮다. 황지영을 위한 것. 그건 그녀의 범죄를 은폐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녀가 치료를 요하는 환자라는 것을 법정에서 증언하겠다는 뜻이다.
“감사합니다.”
진술실에서 빠져나오자, 복도에 최영현, 관우, 연주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최영현이 팔짱을 끼고 물었다.
“뭐 건진 거 있습니까?”
나는 최영현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만약 황지영이 검을 보았을 때 테츠야의 인격이 나온다고 가정한다면?’
검. KCSI가 밝혀낸 일본도 YK84를 찾아내야 한다. 지금 저런 상태의 황지영에게서 자백을 받기는 무리다. 그녀의 자백 없이 범인으로 확정하기엔 증거가 모자란다.
“관우야.”
“예, 팀장님.”
“악귀의 검 애니메이션 말인데.”
“예, 왜요?”
“제목이 악귀의 검이라면 검 자체에 뭔가 능력이 있는 거냐?”
관우는 애니메이션 광 답게 내용을 꿰차고 있다.
“물론입니다. 악귀를 처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집단이 있고, 그들에게는 악귀를 퇴치할 수 있는 능력이 깃든 검이 있습니다.”
“다른 검으로는 못해?”
“네, 못해요. 애니메이션에서 정확히 한계를 지었습니다. 에피소드 중에 자기가 질 걸 예상한 악귀 한 마리가 주인공에게 죽기 전에 자기 칼로 스스로의 목을 베어버린 일도 있었거든요.”
최영현이 물었다.
“자살하면 어떻게 되는데?”
관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사람이 아니라 악귀입니다. 악귀의 검으로 죽이지 않으면 악귀는 다시 살아납니다. 자기 칼로 자살을 해도 죽을 수 없죠.”
최영현이 혀를 찬다.
“하! 뭐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다 있냐?”
관우가 인상을 구긴다.
“인기가 얼마나 많은 애니메이션인데요. 지금 서양권도 난리 났습니다. 극장판이나 2기 개봉을 기다리는 팬들이 엄청 많아요.”
최영현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다.
“쯧쯧.”
남의 취미를 한심하게 보는 최영현은 분명 틀린 행동을 하고 있지만 지금 내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반드시 악귀의 검으로 처단해야 죽는다?”
최영현의 태도에 은근히 화가 나 있던 관우가 이를 갈며 말했다.
“예, 맞습니다. 그런 검이 있으면 나부터 쓸 텐데.”
관우가 최영현을 검으로 베는 시늉을 한다.
“악귀야 물러가라.”
최영현이 관우의 뒤통수를 때린다.
“오타쿠 새끼.”
“아! 좀! 때리지 말라니까!”
연주는 유치한 싸움을 하는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쉬다 내게 물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으세요?”
나는 그제야 최예림 선생과의 상담 내용을 팀원들과 공유했다. 싸우다 말고 내 이야기에 집중했던 최영현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음··· 그렇다는 건 황지영이 악귀의 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흉기가 어디인가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있는 거네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관우가 얼른 거든다.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인격장애로 몸 속에 테츠야의 인격이 숨어 있다면 악귀의 검을 소중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연주가 손가락을 튕긴다.
“그럼 악귀의 검부터. 아니, 사건의 흉기부터 찾으면 되겠네요. 거기서 김현우의 DNA와 황지영씨 지문이 나오면 끝입니다.”
목표가 정해졌다. 물론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명확한 목표를 갖고 움직이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나는 황지영이 들어가 있는 취조실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모든 팀원이 황지영씨의 칼을 찾는다.”
정상적인 수사방식이라면 자백을 받고 흉기의 위치를 알아내야 하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현재 황지영씨의 인격은 칼이 어디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최영현이 얼른 말했다.
“난 황지영씨 집 주변 CCTV 회수하러 간다. 관우는 대기하고 있다가 CCTV 분석부터 시작해.”
연주가 볼펜과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전 황지영씨 자택에서 병원, 그리고 학원까지의 동선을 따보겠습니다. 지하철 보관함 등을 이용할 수도 있으니 싹 조사해 오겠습니다.”
모두가 날 바라본다. 나는 세 사람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들 부탁합니다.”
세 사람이 빠르게 사라진다. 홀로 남은 나는 황지영이 있는 문 닫힌 취조실을 노려보았다.
“검을 찾아서 들이밀면. 당신 안에 있던 그 인격을 만날 수 있겠지. 그리고 그녀는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