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 화. 목소리(Voice) (14)
물건을 보관하는 가장 편한 방법은 나만의 공간인 집에 보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번 관우와 연주가 황지영의 집을 조사한 바 있다. 그때 그녀의 집에 있던 일본도가 장식용 가짜 검이란 것을 밝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을 다 뒤져보라 지시했지만 검 비슷한 건 나오지 않았다.
연주 말처럼 학원이나 병원 가는 길에 쉽게 갈 수 있는 지하철 보관함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보관 물품이 진검이다. 생각해 보라. 도검 소지 허가증도 없는 여성이 지하철 보관함에 작은 칼도 아닌 일본도를 보관한다고? 사방의 CCTV가 모두 자신을 찍고 있다는 걸 뻔히 알 텐데 그런 선택을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어디일까?
나는 일단 황지영에 대한 압수수색영장, 체포영장 발부 심사부터 넣었다. 수색영장은 둘째 치고 체포영장이 나오지 않으면 그녀를 구금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가 생기기 때문이다. 검을 찾을 때까지 구금해야 또 다른 인격의 발현으로 인한 2차 살인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먼저 시행한 일이다.
모두 검을 찾으러 나가고 혼자 사무실에 앉아 황지영의 계좌기록부터 다시 확인하고 있는 나. 혹시 제3의 장소를 빌렸을 수도 있으니 기록을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상하다.
“황지영은 가난했다. 병원비 대기도 빠듯한 상황에 일본도를 구입할 돈은 어디서 났을까?”
실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황창수도 자신의 취미욕구를 완전히 발현하지 못하고, 만화잡지와 브로마이드를 모으는 수준에서 멈췄다. 실제 이런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피규어나 애니메이션 관련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1년에 수백 만원의 지출을 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럴 사정이 못된다. 또한 그녀의 방은 거의 비어 있었다. 물론 최예림 선생이 일부러 물건들을 치웠기에 빈 방인 것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그리 비싼 물건들은 없었다고 했다.
그녀의 계좌기록은 정말 별거 없다. 잔액은 16만 3천원.
황창수에게서 매달 10만원 정도를 용돈으로 받는 모양이다. 다행히 부모님이 집은 자가로 남겨주어 집 월세는 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숨만 쉬어도 돈을 쓰는 존재이다. 가스나 전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관리비와 관련된 건 황창수의 계좌에서 나간다. 황지영은 오빠에게 받은 용돈을 모아 학원을 다닌다. 교통카드를 사용한 흔적 외엔 특별히 돈을 쓰는 곳이 없다.
밖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팀원들을 위해 안에서 지원하기 위해 그녀의 기록들을 살펴보고 있지만 기록 상으로 추적할 수 있는 목표를 확정할 수가 없다. 하긴, 그게 가능했다면 연주나 관우가 벌써 찾아냈겠지. 골머리를 싸며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 테이블을 두드린다.
집중하느라 모니터에 기어 들어갈 태세였던 내가 고개를 들자, 정지훈 차장님이 보인다.
“아, 차장님.”
내게 무슨 능력이 있는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정지훈이 영장을 내밀며 말했다.
“자, 영장.”
“감사합니다. 그냥 메일로 보내주셔도 되는데.”
정지훈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인마, 다음부터 영장 심사 넣을 땐 좀 더 증거를 모아. 그거 받느라 내가 죽을 똥을 쌌다.”
“··················.”
사실 좀 걱정했다. 황지영이 범인이란 증거는 없었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내가 믿고 있는 건 오직 하나. 내가 읽은 기억 뿐이다. 정황증거가 아무리 그녀를 가리킨다고 해도 증거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체포영장을 발부 받으려면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힘 써 주셨습니까?”
정지훈이 날 째려보다 실소를 짓는다.
“안 쓰면? 강 본부장님이 날 가만 뒀겠냐?”
웃음이 나온다. 그의 말처럼 정지훈 계장님이 나서지 않았다면 강혁 아저씨가 직접 움직여 주셨을 지도 모른다. 물론 국가수사본부장이 고작 종로 경찰서 강력계 일을 주시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 내가 부탁을 해야 되겠지만.
“감사합니다, 차장님. 그런데 검사는 어떻게 설득하셨습니까?”
정지훈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평소 안면 있는 분이라 나 한번 믿어보라고 설득했지. 그러니 살살해라. 알지? 상대는 성폭력 피해자다. 잘못 건드리면 언론이 벌떼처럼 일어날 거야. 피해자 핍박했다고. 검사가 반드시 주의 주라고 하더라.”
“예, 안 그래도 조심하는 중입니다.”
“그래, 진척은 없고?”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정지훈 계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 말을 듣다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낀다.
“일곱 개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검을 쓰는 인격은 악귀의 검이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인격이고, 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검은 특별한 능력이 있다. 좋아, 그렇다면 반드시 어딘가 검이 있겠네. 잘했다, 흉기를 찾으면 반은 끝나는 거다. 새끼, 많이 컸네? 처음엔 멍청하게 굴더니.”
내가 언제 멍청하게 굴었습니까? 막말로 서울대 나온 녀석들도 사회 초년생 때 병신 소리 듣는 경우가 허다한데 나 정도면 선방했지. 정지훈 계장이 물었다.
“그래, 수색 범위는 정했고?”
나는 팀원들이 조사하고 있는 구역들을 설명했다. 매우 당연한 수색 지역이라 담담하게 듣고 있던 정지훈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괜찮네. 수고해라.”
“예, 살펴 가십시오, 차장님.”
정지훈 차장이 있어서 다행이다. 물론 내게는 누구보다 든든한 강혁 아저씨가 뒷배로 계시지만 너무 멀리 계시다. 정지훈 차장처럼 바로 옆에서 날 믿어줄 사람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정지훈이 어슬렁거리며 복도를 걷다 문득 돌아본다. 날 한참 보던 정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했다.
“야.”
“예?”
“그··· 인격 말이야.”
“황지영의 인격이요?”
“그래, 애니메이션 주인공들 인격이라고 했지?”
“예, 맞습니다.”
“무슨 애니메이션인지는 다 파악됐어?”
“예, 여기 적어 놨습니다.”
내가 수첩을 들어 보이자 정지훈이 그것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럼 거길 파.”
음? 애니메이션? 이건 왜? 순간 머리 속에 물음표가 생겼다. 하지만 나는 곧 정지훈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눈치챘다. 바보 같이! 이걸 먼저 봤어야 하는 건데! 내가 급히 수첩을 펴고 관련 애니메이션을 하나씩 검색하는 것을 지켜보던 정지훈 계장이 씩 웃으며 돌아선다.
“하나 가르치면 둘을 아는 녀석이네. 걱정 안 해도 되겠습니다, 본부장님. 허허.”
정지훈의 칭찬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지금 정신이 없다. 빠르게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의 특색을 살피던 나는 그 중 하나의 검색 결과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괴도(怪盜) 포니 테일!’
일곱 개의 애니메이션 주인공 중 유일한 여성 주인공. 그녀는 도둑이었다. 그것도 악인들의 물건을 훔치는 의적이다. 옛날 애니메이션인지 조금 촌스러운 그림들이 이미지 파일로 떠 있고, 그 아래 애니메이션 명대사가 있는 것이 보인다.
“주님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주세요···?”
애니메이션을 찾는 순간 잃어버린 퍼즐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느껴진다. 황지영은 가난하다. 애니메이션 DVD를 구매할 돈도 부족한 사람이 일본도를 구매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훔쳤구나.”
정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 절도를 하는 주인공.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된 황지영은 물건을 훔쳤다. 처음부터 검을 훔쳤을 수도 있고, 다른 물건을 훔쳐 장물로 판매한 뒤 돈을 만들어 검을 구매했을 수도 있다. 어찌됐건 절도라는 불법적 행위로 얻은 장물은 계좌기록이나 카드사용기록으로 추적할 수 없는 현금으로 거래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기록 상으로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어디 있을까?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자신의 아지트가 있다. 황지영도 그랬을까? 문득 단양사건에서 장진수의 아지트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르다 쾌락을 위해 살인을 한 증거들을 보관하고 다시 그때의 기억을 돌려보기 위해 만들었던 장진수의 아지트와는 달리 그녀는 비참한 처지에 놓인 자신의 인격을 변신시켜 줄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장진수는 시골에 살았지만 황지영은 서울에 산다. 서울에는 시골처럼 아무도 없는 공간이 적다.
그때, 최영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 경위님.”
-팀장님, 접니다. 지금 황지영씨 댁 주변 CCTV 회수해서 분석 중인데 사건일 전후 일주일간 행적을 역 추적 중에 이상한 점이 나왔습니다.
“어떤 점이죠?”
-황지영씨는 학원과 병원만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습니다. 어디 다른 곳에 갔습니까?”
자료를 보는 듯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최영현의 목소리가 들린다.
-황지영씨 댁은 행촌동이고 학원은 동숭동, 병원은 청운동입니다만 사건 전날 그녀가 버스를 타고 서린동에서 내린 것이 포착됐습니다.
서린동? 행촌동에서 동숭동, 청운동으로 가는 동선에서 어긋나 있는 동네다. 나는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에 급히 키보드를 두들겼다. 검색어는 서린동 창고. 나는 검색 결과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여기구나.”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급히 아우터를 입으며 말했다.
“서린동에 프리미엄 공유창고 스토리지라는 곳이 있습니다. 전원 거기로 모이라고 해주세요.”
최영현의 답이 나오기도 전에 전화를 끊은 나는 급히 차를 몰고 서린동으로 향했다. 다들 흩어져 있었기에 아마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할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도착해 보니 이미 관우가 와 있다.
“형님.”
“어, 일찍 왔네.”
“버스 정류장부터 CCTV 회수하고 있었거든요. 영현 선배 전화 받고 보니 바로 앞에 여기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여긴 왜 온 겁니까?”
나는 카운터 직원에게 신분증과 압수수색영장을 보여주었다.
“여기 황지영이라는 분이 맡긴 짐 있죠?”
카운터 직원은 신분증과 영장을 꼼꼼하게 확인 후 PC를 검색하다 고개를 저었다.
“황지영이란 분이 맡긴 짐이 있긴 한데, 주민번호가 다릅니다.”
관우가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어디 봅시다. 어··· 여기 짐 맡긴 황지영씨는 61년생인데요?”
직원은 수색영장에 기록된 생년월일을 눈짓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 같습니다만?”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일까? 혹시 주변에 비슷한 곳이 있는 걸까? 그때 내 머리 위로 최영현의 우람한 덩치가 만든 그림자가 드리운다.
“황창수 이름으로 검색해 봐.”
관우가 아! 그렇지! 하는 얼굴로 직원의 손에서 키보드를 빼앗아 직접 황창수 이름을 검색하고는 반색한다.
“있습니다! 생년월일도 일치합니다!”
나는 갑자기 나타나 바로 일을 해결한 최영현을 돌아보았다. 역시 그의 일선 경험은 도움이 된다. 최영현은 사소한 걸로 생색낼 생각이 없는지 거대한 덩치로 카운터를 막아 서며 말했다.
“황창수 이름으로 빌린 창고와 최근 30일 CCTV 좀 봅시다.”
직원은 최영현의 우람한 몸과 험상궂은 얼굴에 겁을 먹었는지 얼른 열쇠를 들고 뛴다.
“이, 이쪽입니다!”
미로 같이 생긴 창고. 작은 창고는 지하철 캐비닛 두 배만 하고, 큰 창고는 사람 여섯도 들어갈 정도로 크다. 직원이 창고 번호를 확인하며 말했다.
“여기입니다.”
직원이 가리키는 창고. 사람 두 명 정도는 들어갈 크기가 될 듯하다. 직원이 문을 열며 말했다.
“여자라고 이름이 황창수가 아니란 법도 없어서 묻지는 않았는데. 역시 그 여자 이름이 아니었군요.”
남성적인 이름을 가진 여성도 많다. 그런 사람에게 본인이 맞냐 질문하는 건 실례기에 따로 묻진 않은 모양이다. 하긴 친 오빠이니 관련 서류는 철저히 준비해 왔겠지. 직원이 문을 열며 말했다.
“월 5만원부터 35만원 선까지 있는데 이 창고는 20만원입니다. 자 보시죠.”
직원이 먼저 안을 확인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물품. 하지만 직원의 뒤에서 안에 있는 물건들을 바라본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