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1 화. 목소리(Voice) (16)
황지영의 차가운 목소리. 그녀에게서 들려오는 일본어. 나는 일본어를 몰라 이어폰을 통해 전해지는 관우의 실시간 통역으로 의미를 전달받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인격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새로운 인격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아침에 눈을 떠 울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은 참으로 비참할 것이다. 언제나 기억나지 않는 꿈은 아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꿈일 것이다. 그녀는 매일 반복적으로 그날의 악몽을 꾸고 있을 것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잡고 싶지 않은 범인이다.
“황지··· 아니, 테츠야.”
“···············.”
황지영이 차가운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당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었던 김현우는 이미 죽었습니다.”
한국어로 말했지만 황지영은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わかる、私は殺した.(안다, 내가 죽였다)”
관우의 통역을 전해 들은 나는 슬픈 눈으로 말했다.
“또 누군가를 죽일 생각이었습니까?”
“························.”
“당신을 괴롭힌 도깨비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당신은 또다른 도깨비를 찾고 있었던 겁니까?”
황지영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눈가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失っても、失っても、生きていくしかないです。どんなに打ちのめされようと.(잃어버려도, 잃어버려도, 살아갈 수밖에 없어. 얼마나 쓰러진다고 하더라도)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실시간 통역을 하던 관우가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황지영씨 한국어 할 줄 알 텐데. 아무리 다른 인격이 들어와 있다지만 지금 팀장님 말을 다 알아듣고 대화 중 아닙니까? 빨리 환상이란 걸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최영현이 팔짱을 끼고 있다 관우의 뒤통수를 툭 때린다. 관우가 돌아보았지만 최영현은 아무 말없이 취조실만 바라보고 있다. 관우가 뒤통수를 만지며 눈을 흘긴다.
“왜 때려요?”
“··················”
최영현 대신 연주가 나서며 말했다.
“바보 같은 놈아.”
관우가 연주 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
연주가 최영현을 힐끔 본 후 취조실 안을 눈짓하며 말했다.
“팀장님은 법정 증거를 쌓고 있는 거야, 지금.”
취조 영상은 당연히 재판장에게 전달된다. 그걸 모를 관우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재판장님이 일본어 못하시면 또 번거롭게 번역하면서 보시게 되는데. 차라리 빨리 지금 인격이 환상이란 걸 깨우쳐 주고 한국어로 진술 받는 쪽이 낫다 이 말이지, 내 말은.”
연주가 관우의 뒤통수를 빡 소리 나게 때린다.
“힉!”
너무 세게 맞아서 인지 고개를 푹 숙였던 관우가 열 받은 얼굴로 고개를 들자, 연주가 취조실을 눈짓하며 말했다.
“팀장님은 지금 법정에서 황지영씨가 다중인격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증명하시려는 거야, 생각을 좀 해, 인마.”
관우가 놀란 눈으로 취조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황지영씨가 범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자백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그런 건가?”
연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팀장님은 황지영씨를 보호하려는 거야. 살인을 했지만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했다는 점을 재판장님께 전달하려는 거지.”
“아···”
관우가 자신의 실수를 깨우치고 뒤늦게 뒤통수를 긁는다.
다시 취조실 안. 방금 모습을 드러낸 황지영의 또다른 인격은 이곳이 어딘지 모르는 듯 주변을 쓱 바라 보다 말했다.
“これはどういう状況だ? そろいもそろって.(이건 무슨 상황이지? 모두 웃긴 낯짝을 하고서)”
그녀 앞에는 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는 거울 뒤에 있는 팀원들이 보인다는 투로 말한다. 아마 그녀의 기억 속에 저 뒤에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영상물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지영씨.”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눈썹을 꿈틀한다.
"なぜ私をその名前で呼ぶのですか?(왜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당신이 그녀이니까.”
“··················..”
“이제 그만 나오세요.”
황지영이 혼란스러운 눈빛을 한다.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 진짜 인격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일본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한국어로 답했습니다. 당신은 한국어를 할 줄 아십니까?”
황지영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나는 몸을 내밀며 말했다.
“지금은 다이쇼 시대(大正時代)가 아니라, 2022년입니다.”
황지영의 눈동자가 좌우 진자 운동을 한다. 그 움직임은 점점 격렬해진다. 나는 황지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은 황지영을 괴롭힌 도깨비, 김현우를 처단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인격은 황지영씨의 일부분입니다. 당신이 곧 황지영씨 본인입니다.”
황지영이 벌떡 일어난다. 하지만 날 공격하거나,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진 않는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가슴을 내려보며 중얼거리고 있다.
"あんたは悔しくないわけ?(너는 분하지 않은 거야?)"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걸까? 황지영이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고함을 지른다.
"悔しい、悔しくって死にそう.(분해, 분해서 죽을 것 같아)"
그녀의 가슴이 들썩이며 숨이 가빠지는 것이 보인다. 자신의 내면을 노려보던 황지영이 외쳤다.
"やめて欲しけれりゃ立て!! なりてえもんちゃんと見ろ(그만하길 원하면 일어서! 되고 싶은 것을 똑바로 보라고!)"
관우가 전해주는 통역을 들으며, 나는 지금 황지영이 내면에 숨은 진짜 황지영과 싸우고 있음을 눈치 챘다. 나는 내면에 있는 그녀를 도와 주기로 했다.
“황지영씨.”
황지영은 여전히 일어나 자신의 가슴을 내려보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나는 그녀의 속에 있는 황지영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당신에게는 일곱 개의 인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당신이 겪은 지옥과 같은 사건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낸 인격입니다. 최예림 선생을 아시죠? 아마 당신은 그 선생을 믿을 겁니다. 아주 장시간 함께 치료를 해왔으니까요. 당신이 원한다면 선생에게 진실을 듣게 해주겠습니다.”
황지영이 붉게 충혈된 눈을 든다. 무척 분노해 있는 얼굴이다. 하지만 저건 진짜 황지영의 표정이 아니다. 나는 무시무시한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무시하고 말했다.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인격이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사람을 약으로 기절 시킨 후 일본도로 목을 잘라내고 야밤에 공원 정상에 시신을 가져다 두었습니다.”
황지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리고는 가슴이 아픈지 몸을 살짝 움츠리는 것이 보인다. 나는 그런 황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멈추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의 일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누구도 당신을 욕하지 않을 겁니다.”
황지영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 진다. 내면에서 강력한 무엇인가 꿈틀거리고 있다. 황지영은 온몸을 사시나사 떨 듯 벌벌 떨다, 어느 순간 잠잠해지며 고개를 푹 떨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가운 미소년의 목소리가 울린다.
"残念超上手いの(유감이야)"
황지영의 고개가 툭 떨어진다. 나는 그녀의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비록 내가 도왔다고 하지만 내면 속에 숨어 있던 황지영의 인격은 내 말을 모두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처음으로 자신의 자력으로 또 하나의 인격을 밀어내고 나왔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적응할 수 있도록 기다려줘야 한다.
가만히 서서 고개를 떨구고 있던 황지영.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테이블 끝에 눈물 방울이 하나씩 떨어진다.
“흑··· 흐흑···”
드디어 황지영의 인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과 달리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사실을 깨달은 채로. 나는 의자에 걸어 두었던 코트를 가지고 가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이제 끝났습니다, 앉으시죠.”
“··················..”
황지영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점에서 나는 황지영의 본래 인격이 얼마나 착한 인성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끔찍한 악몽을 남긴 추악한 범죄자를 죽였다. 어떤 사람에겐 그 사실이 통쾌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황지영은 다르다. 비록 자신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준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이 어마어마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코트를 걸친 그녀의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성폭행 피해자. 나의 위로가 그녀에게 또다른 상처가 될 수 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옆에 서서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황지영은 30분이나 그 자리에 선 채 흐느끼다 자리에 앉으며 눈물이 번진 얼굴을 닦았다. 날 가만히 바라보던 황지영이 슬픈 미소를 짓는다.
“고맙습니다, 형사님.”
“··················.”
“날 멈추게 해 주셔서.”
나는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고시원 뒤 포장마차.
내 앞에 손도 대지 않은 우동 한 그릇과 빈 소주병 두 개가 굴러다니고 있다. 나는 경찰이 된 후 처음으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을 겪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악의가 생기지 않는 범죄자. 또 다시 이런 범인을 만난다면 난 그때도 그를 잡을 수 있을까?
무뚝뚝한 포장마차 주인장이 고등어 구이 접시를 내 테이블에 툭 던지듯 놓는다. 술에 취해 벌건 눈으로 한 곳만 노려보던 내가 주인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제가 시킨 거 아닙니다, 잘못 주셨습니다.”
“·····················”
주인 아저씨는 어쩐지 답이 없다. 내가 그를 올려보자 무뚝뚝한 얼굴의 아저씨가 말했다.
“서비스.”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서 가버리는 아저씨. 나는 가만히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실소를 지었다. 이게 저 아저씨의 위로 방법인가 보다. 마음은 고맙지만 지금은 입맛이 전혀 없다. 방금 막 구웠는지 아직 껍질이 지글거리는 고등어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나. 그때 나무 젓가락 한 쌍이 고등어 구이의 등 부분에 푹 꽂힌다. 두툼한 살점을 잡아 가는 젓가락.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식으면 맛없어, 인마.”
고등어 살점을 입으로 넣는 남자. 나는 그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났다.
“아저씨···”
강혁 아저씨다. 평소처럼 점퍼를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타난 아저씨. 외관으로 보기엔 영락없는 동네 백수 아저씨 같은데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 국가수사본부장이다. 눈물이 났지만 다 큰 어른이 울 수는 없다. 나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예요?”
“뭐, 그냥. 아저씨!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쇼!”
아저씨는 말없이 새로 나온 시원한 소주로 잔을 채운다.
“넌 더 먹지 말어, 인마. 지금도 충분해 보인다.”
“···············..”
아저씨가 소주를 들이킨 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걸 먹은 사람처럼 미간을 좁힌다.
“크, 난 아마 관 뚜껑 닫을 때도 소주병 끼고 들어갈 거야, 안 그래?”
“·····················”
아저씨는 말없는 날 보며 끌끌 웃는다.
“새끼, 이제 걷기 시작한 놈이 세상 다 산 놈처럼 굴기는.”
그래, 경험 많은 아저씨는 나보다 훨씬 많은 일을 겪었을 거다. 더 참혹한 일도. 더 불쌍한 일도. 아저씨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시선 속에 질문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아저씨가 다리를 꼬며 말했다.
“인생 힘들어? 인생 제대로 살아봤냐? 스무 살까지는 네 인생이 아니다. 네 주변 어른들의 인생이지. 도경이 네 경우라면 수녀님이 주는 밥 먹고, 수녀님이 주는 옷 입고 살았지. 그게 어떻게 네 인생이냐, 네 주변 어른들의 인생이지.”
부모님이 있었다면 부모의 인생이었을 거다. 내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강혁 아저씨가 날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갓난 아기가 걷게 될 때까지 삼만번이나 넘어져야 한다. 스무 살부터 네 인생이라면 넌 스무 살부터 삼만번을 넘어져야 겨우 걸음마를 떼는 거야 그렇게 십년쯤 살면 이제 겨우 네 인생을 사는 거고, 그렇게 또 십년을 살고 마흔이 되고, 또 십년을 살아야 쉰이 되는 거다, 이 어린 놈의 새끼야.”
거친 말투 속에 숨은 따뜻한 마음.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아저씨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나무 같다. 그만 마시라던 말과 다르게 내 잔을 채워준 아저씨가 말했다.
“그러니까, 인마. 한번 자빠졌다고 울지 마라. 아직 이만 구천 구백 구십 구 번 더 넘어져야 되니까.”
솔직히 고맙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 대신 농담이 나간다.
“저 안 넘어졌는데. 저 범인 잡았거든요?”
아저씨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인마, 왜 똥 닦다 손에 똥 묻은 얼굴로 술을 처 마셔?”
“하하하!!! 뭐야, 더러워.”
“더럽기는 인마! 손에 똥 묻어 봤어? 살인시간 수사하다 보면 현장에 똥 싸지르고 가는 미친 놈이 얼마나 많은데! 너 그거 조사 다 해야 된다? 얼마나 기분 더러운지 모르지?”
“푸하하! 정말이요?”
내 곁에 아저씨가 계셔서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