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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103화 (103/328)

살인의 기억 103화

9. 광기(狂氣)(1)

강혁 아저씨의 청장 취임, 그리고 나의 진급.

당연하지만 떠들썩하게 치른 청장 취임식과 달리 나는 서장이 주체하는 간단한 임명식으로 진급 행사를 끝냈다.

이 순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보육원 수녀님과 아이들이었다.

진급을 해봐야 월급이 폭발적으로 오르는 건 아니다. 경위 초봉에 비해 약 30만 원가량 오르는 월급.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보육원 아이들이 먹을 맛있는 간식을 양손 가득 사가지고 갈 정도는 되니까.

편의점은 비싸니 마트에 들러 세일하는 과자들을 싹쓸이했다. 계산대에 줄을 서니 계산하던 사람들이 다들 힐끔거린다.

하긴, 과자만 30만 원 치 사는 사람 처음 봤겠지. 비교적 가격대가 저렴한 과자들을 사다 보니 짐이 한가득이다.

강혁 아저씨가 준 차가 있어서 망정이지 없었다면 난 엄청난 부피의 과자를 짊어지고 보육원까지 기어갔을 거다.

보육원 앞에 도착해 트렁크를 여니,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경계 어린 눈으로 이쪽을 본다. 아이들과 놀아주던 20대 초반의 여성이 날 보더니 한달음에 달려온다.

“도경이 오빠!”

응? 누구? 보육원에 왜 20대 아가씨가 있는 거지? 나는 잠깐 달려오는 여성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떴다.

“진숙이?”

처음 강혁 아저씨가 보육원에 왔을 때 봉사활동을 왔던 경찰 아저씨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경례를 하자 놀라 울었던 다섯 살 진숙이. 바로 그 아이였다. 나는 반가움에 달려드는 진숙이를 번쩍 안았다.

“야! 진숙아! 진짜 오랜만이다!”

몇 년 만이지? 나는 경찰대 합격 후에 곧바로 보육원을 나갔다. 10년 만에 보는 진숙이는 이제 어엿한 이십 대 초반의 성인이 되어 있었다. 아장아장 걷던 때가 어제 같은데 나도 그만큼 늙은 건가?

진숙이가 날 꼭 안으며 말했다.

“오빠, 진짜 너무한다. 왜 이렇게 안 와?”

“하하, 미안. 근데 너 몇 살이야?”

“스물하나.”

“근데 왜 아직 여기 있어?”

진숙이가 내 손을 탁 치며 눈을 흘긴다.

“난 누구와 다르게 매주 와서 애들 봐주거든?”

“아…….”

좀 미안하네. 그래도 함께 큰 아이들이고, 날 키워준 수녀님들이 계시는 곳인데 내가 너무 격조했구나.

“미안하다.”

진숙이는 날 째려보다 SUV라 트렁크가 훤히 보이는 차 뒤에 한가득 실린 과자를 보고는 배시시 웃는다.

“그래도 빈손으로 오진 않았으니 한 번 봐줄게.”

“하하.”

“들어가자, 수녀님들도 계셔! 오빠 보면 진짜 좋아하실 거야.”

“그래, 애들 몇 명만 데려와 줄래? 짐이 좀 많아서.”

“어! 애들아! 여기 좀 도와줘!”

아이들에게 친숙한 진숙이가 부탁하자, 아이들이 우르르 나온다. 다들 과자 덕분에 기대에 찬 얼굴들이다. 이래서 돈을 벌어야 하나 보다. 아직 애들 입으로 들어가지도 않은 과자였지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흐뭇해진다.

누군가 왔다는 소리에 보육원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두 분. 내게 어머니 같은 분들을 보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었다.

“루이사 수녀님! 로사 수녀님!”

루이사 수녀님은 이제 60대 중반을 넘기는 나이가 되셨다. 그보다 조금 젊은 로사 수녀님도 이제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셨다.

두 분은 날 발견하자마자 달려 나오신다. 특히 루이사 수녀님은 슬리퍼도 신지 못하시고 양말만 신은 채 달려 나오고 계신다.

혹시 발이라도 다치시면 어쩌나 싶어 얼른 달려가자 날 얼싸안는 두 분. 눈물이 그렁그렁한 로사 수녀님이 내게 안겨 말씀하신다.

“우리 도경이.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하하, 잘 지냈어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던데.”

내 농담에 눈물을 글썽이던 루이사 수녀님이 등을 찰싹 때린다.

“나쁜 놈! 다른 애들은 전부 자주 오는데! 제일 늦게까지 응석 부리던 녀석이 제일 안 오고!”

“하하, 죄송해요.”

“나쁜 녀석.”

말은 그리하시지만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두 수녀님.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지겹게 시간을 보내던 보육원 거실. 여전히 TV 한 대와 가구 몇 개가 전부인 보육원 거실에 둘러앉아 모두 과자 파티를 시작했다.

무슨 과자를 이렇게 많이 사왔냐고 타박하시는 루이사 수녀님.

“경찰 월급 박봉이라고 하던데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쓰고 그래?”

“에이, 다 싼 과자예요. 얼마 안 돼요.”

처음 보는 아이들이 많다. 가만, 내가 보육원에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제……. 헐, 나 경대 입학식 하고 온 후에 한 번도 안 왔구나. 진짜 나 나쁜 놈이다. 그러니 진숙이 얼굴도 못 알아봤지. 난 반성해야 된다.

루이사 수녀님은 시종일관 내 손을 꼭 붙잡고 걱정스럽게 보신다.

“경찰 일이 힘들진 않고?”

“위험한 일은 안 하는 거지?”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누가 괴롭히진 않아?”

수없이 쏟아지는 질문들. 꼭 시골에 사시는 어머니가 아들 걱정하는 듯하다. 두 분 수녀님 중에 루이사 수녀님은 특히 진짜 엄마 같은 분이다.

“하하, 괜찮아요. 아참, 저 진급했어요. 이제 경감이에요.”

경감이 뭐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시겠지만 진급이란 말은 아실 거다. 루이사 수녀님은 기쁜 표정으로 웃으신다.

“그래, 우리 도경이. 나쁜 사람들 잡아서 착한 사람들이 빛 속에서 살 수 있게 열심히 하고 있는 거지?”

“…….”

나는 범죄자들을 잡는다. 하지만 그 목적이 선한 이들이 빛 속에서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던 건가?

나는 잠시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목적을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수녀님의 질문에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루이사 수녀님은 그런 날 지그시 바라보며 손을 꼭 잡는다.

“도경아, 사람은 말이야. 직업이 있어야 해.”

나는 수녀님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아시면서. 저 어엿한 경찰이잖아요. 매일 출근하는데 제가 왜 직업이 없어요?”

“직장 말고, 직업.”

“…….”

“도경아, 매일 출근해서 기계적으로 일하는 곳은 직장일 뿐이야. 업(業)이란 말은 내 삶을 걸고 하는 일이다. 단순히 전문기술을 가지고 돈을 번다는 의미의 직업이 아니야. 업(業)이란 한자는 그런 곳에 쓰는 것이 아니야.”

수녀님의 말씀에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가뜩이나 황지영 사건 덕에 머리가 복잡했는데 수녀님을 만나러 와 정말 다행이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예, 수녀님. 꼭 기억할게요.”

“자주 좀 오고, 녀석아.”

“네, 하하.”

평화롭다. 과자를 먹으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잔혹한 범죄 속에 사는 내 영혼을 정화시켜 주는 기분이 든다. 내 손을 잡고 있는 루이사 수녀님의 따뜻한 체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면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품 안에서 전화가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지자, 루이사 수녀님이 손을 놓으신다.

“일 때문이니?”

액정에 떠 있는 관우의 이름. 비번인 내게 전화를 했다면 분명 사건이다.

“죄송해요.”

나는 수녀님께 양해를 구하고 구석에 가 전화를 받았다.

“어, 관우야.”

-팀장님, 비번 날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야?”

-창신동 아파트 단지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지금 출동할 건데 오실 겁니까? 일단 보고는 드리는데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희 팀원들끼리 초동수사 나가겠습니다.

“아니다. 바로 갈 테니 주소 찍어.”

-예, 팀장님.

나는 수녀님에게 사과를 하고 곧장 보육원을 나왔다. 날 따라 배웅을 나온 수녀님들과 진숙이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며.

하지만 괜찮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오래 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운전을 해 사건 현장으로 가는 지금까지도 가슴이 따뜻하다.

* * *

창신동 우장 아파트.

119 대원들과 KCSI 대원들이 벌써 도착해 있고, 아파트 사람들이 바글거리며 구경을 하고 있다.

나는 구경꾼들을 헤치고 나가 폴리스라인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면 폴리스라인은 아파트 현관문 입구에 설치되어야 한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아파트 한 동 전체에 폴리스라인이 설치되어 있다.

나는 라인을 지키는 순경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며 물으려 했지만 여긴 듣는 귀가 너무 많다.

일단 안쪽으로 진입하자, 바닥에 깨진 유리 잔해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또 119 대원들이 어려 보이는 여성에게 산소호흡기를 씌우고 급히 병원으로 출발하는 모습도 보인다.

급히 확인해 보니 얼굴이 피투성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이 여성은 살아남은 모양이다. 그러니 병원으로 후송되는 것이겠지.

나는 유리 잔해가 집중적으로 흩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핏자국이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파트 4층 베란다 창문이 깨어져 있다. 설마 저기서 뛰어내린 건가? 도대체 어떤 현장인 걸까?

나는 아파트 입구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해당 아파트 거주자 외에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하고 있던 순경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물었다.

“현장이 4층 맞습니까?”

“예, 경감님.”

엘리베이터를 보니 11층에 있다. 4층이면 그냥 뛰어올라 가는 편이 빠르겠다.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4층에 올라서자, KCSI 대원들이 현관문 앞부터 사진을 찍으며 진입 중이다.

현장을 확인하고 현장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현관문 밖에 나와 있던 관우와 연주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연주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다. 나는 오만상을 쓰며 현장을 노려보고 있는 연주를 툭 쳤다.

“왜 그래?”

“…….”

연주는 날 힐끔 본 후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말을 삼키고는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린다. 왜 저러는 거지? 설마 아는 사람은 아니겠지?

내려가는 연주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관우가 보인다.

“관우야.”

“예, 팀장님.”

“피해자가 연주 아는 사람이야?”

“아뇨.”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연주의 표정이 저렇다는 건 범죄 자체가 연주가 참기 힘든 범죄라는 뜻이다.

나는 불안한 예감에 눈가를 실룩거렸다.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한 사람. 그건 황지영이었다.

“성…… 범죄인가?”

관우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관우의 반응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모두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황지영 사건을 해결하자마자 또 성범죄라니. 나도 모르게 현관 벽에 등을 기대고 이마를 부여잡았다.

“하…….”

1층에 처음 도착했을 때 119 대원들 손에 실려 가던 여성. 그 사람이 피해자인 모양이다. 얼굴이 피투성이였으니 구타도 있었을 것이다.

또 어떤 짐승 같은 놈이 이런 범죄를 저지른 걸까? 왜 신은 남성에게 이렇게 지독한 성욕을 주었을까? 그리고 왜 여성에겐 그것에 대항할 힘을 주지 않은 걸까?

나는 머리를 울리는 황지영의 목소리들을 애써 지워냈다. 황지영 사건은 해결되었다. 이제 나는 새로운 사건에 집중해야 한다.

“피해자 상태는…….”

잠깐, 관우 녀석이 분명 내게 연락할 때 살인사건이라고 했다. 피해자 상태에 대해 질문하려던 나는 고개를 번쩍 들며 물었다.

“살인사건이라고 하지 않았어?”

관우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 53세 남성과 49세 여성이 살해되었습니다.”

내 눈이 커졌다. 두 명이 살해되고 한 명이 성범죄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싶지 않은 참혹한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관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범인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의 시신 앞에서 딸을…….”

관우의 말을 듣는 순간 내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다.

“이…… 이이……!! 개 같은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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