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04화
9. 광기(狂氣)(2)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같은 분노.
그것은 황지영 사건의 분노에 얹혀 더욱 큰 불길이 되었다. 나는 마음속에 들끓는 불길을 겨우 내리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해자 상태는?”
관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혼수상태입니다.”
“상황 브리핑해 봐.”
관우가 옆으로 비켜나며 말했다.
“직접 들으시죠.”
관우 뒤에 나이 지긋한 경비 아저씨가 무척 당황한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다. 나는 경비 아저씨를 힐끔 보며 물었다.
“최초 신고자이십니까?”
경비 아저씨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난리통인 주변 상황을 보고는 말했다.
“잠깐 상황을 확인 후에 경비실로 가겠습니다. 거기서 대기해 주시겠습니까?”
“아…… 예, 예.”
경비 아저씨를 내려보내고 KCSI 대원에게 발싸개와 장갑을 받아 착용한 나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현장에 발을 들였다.
물론 내가 강력계에 임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현장은 경찰대 시절 숱하게 보았던 사건 현장 사진에서도 보지 못했다. 나는 충격적인 현장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먼저 신발장 바로 앞에 중년 남성이 엎어진 채 쓰러져 있다. 현관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욕실에 여성의 다리가 보인다. 욕실 전체가 피로 물들어 있다. 그리고 방금 언급한 모든 곳에 하얀 가루가 퍼부어져 있다.
나는 제일 앞에 있는 중년 남성의 시신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머리 부분이 패일 만큼 큰 상처가 있다. 둔기로 내려친 것으로 보였는데 한 번 내려친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내려친 것으로 보인다.
또 등 쪽에 여러 번 칼에 찔린 상처가 있다. 남성의 시신에 밀가루로 보이는 하얀 가루가 눈처럼 내려앉아 있다.
나는 일어나 욕실로 갔다. 욕실 전체가 굳은 피로 난장판이 되어 있어 들어가진 못하고 문 앞에 서서 안의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욕실에서 사망한 중년 여성 역시 머리에 큰 상처가 있다. 다만 이쪽 시신에는 칼에 의한 자상이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이곳에도 하얀 가루들이 피와 섞여 범벅되어 있다.
속이 역해 나도 모르게 구역질이 나오려 한다. 나는 입과 코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어떤 썩어 죽일 악마가 이런 짓을 벌인 걸까?
나는 중년 여성의 시신이 있는 욕실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경비실로 가려다 멈칫했다. 다시 현장을 바라보니 피범벅이 된 현장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천장이나 벽에 튄 피가 굳어 있다. 피는 금방 굳으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시신이 흘린 피까지 검게 굳어 있다. 조금 전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사진을 찍고 있던 KCSI 대원에게 물었다.
“저기.”
“예?”
“사건 현장 많이 보셨죠?”
“예, 그렇습니다만.”
나는 욕실을 눈짓하며 물었다.
“사건 발생 시간이 언제로 보입니까?”
KCSI 대원은 잠시 생각해 본 뒤 말했다.
“확실한 건 검사를 돌려봐야 알겠지만 혈액 응고 상태나 시신 상태를 봤을 때 적어도 4일 전에 발생한 일로 보입니다.”
4일? 이상하다. 살아남은 여성이 있다고 했다. 대충 상황을 유추했을 때 여성은 4층에서 베란다 문을 뚫고 1층으로 추락하며 경비 아저씨에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건 발생일이 4일 전이라고? 그럼 생존자가 여기 4일이나 감금당해 있었다는 뜻인가?
피해자는 생존자의 부모일 가능성이 높다. 생존자는 살해된 사람들의 딸. 나는 딸 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물건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가구 위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할 물건들이 모두 바닥에 있다. 액자나 책들도 모두 흩어져 있고 바닥에 핏자국이 있다.
이 핏자국은 다른 자국과 다르다. 상처로 인해 흘러나온 피가 아니라 피 묻은 몸을 이리저리 굴렸을 때 생기는 핏자국이다.
또한 방문 고리 쪽 주변에 집중적으로 핏자국이 있다. 이 역시 피 묻은 손으로 여러 번 문을 여는 시도를 하는 도중에 남은 혈흔으로 보인다.
나는 현장을 살펴본 후 다시 밖으로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관우와 함께 경비실로 가자, 일 층 경비실에서 손을 떨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있던 경비 아저씨가 보인다.
아저씨는 얼른 잔을 내려놓고 일어난다.
“괜찮습니다, 편히 앉아 계세요.”
경비 아저씨는 자신이 당직할 때 눕는 침상을 치워준 후 말했다.
“여, 여, 여기 잠깐 앉으시죠.”
내게 아버지가 있었다면 이분보다 젊을 것이다. 연세가 일흔 가까워 보이는 노인이 자리를 권하니 앉지 않을 수가 없다.
나와 관우가 침상에 앉자, 경비 아저씨는 여전히 진정이 안 되는지 겨우 자리에 앉아 다리를 덜덜 떤다. 나는 최대한 경비 아저씨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진정하시고, 목격하셨던 걸 최대한 자세하게 말씀해 주세요.”
“…….”
여러 번 울대를 꿀렁거리던 경비 아저씨가 입을 연다.
“그게…… 쓰레기 분리수거장 청소를 하고 다시 경비실로 돌아가던 때였습니다…….”
경비 아저씨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을 잇는다.
“가, 갑자기 창문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위에서 뭔가 쿵 떨어지는 겁니다.”
“어디에 떨어졌습니까?”
“아스팔트 바닥이요. 주차장이었습니다.”
떨어진 건 생존자였을 것이다. 4층이니 망정이지 조금만 더 높았다면 낙상으로 사망에 이르렀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었습니까?”
경비 아저씨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4층 사는 여자애였습니다.”
여자애? 어리다는 말인가? 관우 쪽을 힐끔 보자 미리 조사를 끝냈는지 바로 입을 연다.
“19세, 권진아입니다.”
19세? 제길. 고작 열아홉 살 먹은 아이였다고?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다시 경비 아저씨를 보자, 아저씨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그 아이는…… 평소 경비실 앞을 지날 때마다 밝게 인사해 주던 아이였습니다. 그, 그런 아이가 이런 일을…….”
경비 아저씨는 무척 충격이 큰 듯하다. 나는 아저씨가 진정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었다가 말했다.
“추락 당시 권진아 씨 상태는 어땠습니까?”
경비 아저씨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떤다.
“손이 묶여 있었습니다. 바, 발도…….”
“손이 어떻게 묶여 있었습니까?”
“드, 등 뒤로 묶여 있었습니다. 발은 양 발목이 묶인 상태였고…… 알몸이었습니다.”
“…….”
경비 아저씨는 턱을 덜덜 떨며 말했다.
“제, 제가 너무 놀라서 그대로 굳어 있다가 애가 꿈틀거리는 걸 보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서 제 옷으로 애를 덮었습니다.”
“그때 권진아 씨 의식이 있었습니까?”
경비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머리에서 피가 났는데 그래도 말은 했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지, 집으로 빨리 가달라고…….”
경비 아저씨가 핸드폰 통화 기록을 보여주며 말했다.
“일단 바로 119를 불렀습니다. 애가 피를 많이 흘리고 있어서.”
“출혈 부위가 어디였습니까?”
“제일 많은 건 머리였는데 어디를 다쳤는지 온몸이 피였습니다. 특히 사타구니 쪽에 굳은 피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성폭행이라고 생각했구나. 그건 병원에서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경비 아저씨에게 계속하라는 눈짓을 하자 침을 꿀꺽 삼킨 아저씨가 말을 잇는다.
“4층에서 떨어진 애 몸을 함부로 옮기긴 그래서 119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몇 분 지나서 대원들이 오고 애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 제가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현관문 상태는 어땠습니까?”
“벨을 눌렀는데 답이 없어서 문고리를 돌렸더니 그냥 열렸습니다.”
“잠기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예, 그 집은 디지털 도어락이 설치되지 않은 집이었습니다. 열쇠로 문을 여는 집인데…… 그냥 열리더군요. 문고리를 잡는 순간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시 내려가서 1층에서 애를 보고 있는 119대원들에게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애가 4층에서 떨어지자마자 집으로 빨리 가 보라고 했다고 하니 같이 가줬습니다.”
관우가 끼어들어 말했다.
“최초 신고자는 경비 아저씨가 맞고, 시신을 최초 발견 시에는 119대원과 함께했던 것 확인했습니다.”
나는 경비 아저씨를 보며 말했다.
“CCTV 위치 도면 있죠?”
경비 아저씨가 급히 서랍을 뒤져 도면을 꺼낸다.
“여기 있습니다.”
관우가 얼른 도면을 받는다.
“관제센터 어디에 있죠?”
“5단지 뒤편에 있어요.”
관우가 CCTV를 회수하기 위해 움직인다. 경비 아저씨와 둘만 남게 된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권진아 씨 댁은 평소 이상한 점이 없었습니까?”
“어떤…….”
“시끄러운 사건이나, 혹은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뇨, 보통 집이었습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층간 소음 신고 한 번 없었던 집이고요.”
경비 아저씨는 사건의 최초 목격자일 뿐이다. 이 사건은 분명히 참혹한 사건이지만 해결은 의외로 쉽다.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권진아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를 한 뒤 곧장 차를 몰아 권진아가 후송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로비에 오자, 아까 현장에서 자리를 피한 연주가 벤치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권진아를 후송할 때 같이 병원으로 온 모양이다.
“연주야.”
“…….”
연주가 내 인기척을 느끼고 움찔했지만 고개를 들지 않는다. 나는 연주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네 맘 이해한다. 나도 화가 난다.”
“…….”
“황지영 사건이 잊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또 이런 일이 겹치네. 세상 참.”
연주는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다. 여성을 타겟으로 한 범죄. 그것이 그녀를 분노케 하는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의 범죄 현황을 보아도 피해자가 여성인 경우가 많다.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늘 범죄에 노출되는 여성.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분노하는 것이 십분 이해된다.
연주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팀장님.”
“응.”
“이 새끼. 꼭 잡을 겁니다.”
“그래.”
다행이다.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면 이 분노가 그녀의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권진아 씨 상태는 어때?”
“지금 응급실에서 처치 중인데 혼수상태입니다.”
“경비 아저씨 말로는 발견 당시에는 의식이 있었다고 하던데.”
“의사 말로는 낙상할 때 머리를 부딪힌 것으로 보인답니다. 경비 아저씨에게 짧게 상황을 전한 후 곧바로 의식을 잃은 것 같습니다.”
“음, 또 다른 상처는?”
“수차례 강간 흔적이 있고, 몸 전체에 찰과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답니다. 또 열 손가락의 손톱이 전부 부러져 있었습니다.”
손톱이 부러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까 보았던 권진아의 방문을 떠올렸다. 그녀는 방 안에 감금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등 뒤로 묶인 손으로 필사적으로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하는 도중 손톱이 부러졌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사건은 4일 전에 일어났다. 경비 아저씨와 119대원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범인은 없었다.
그럼 권진아는 4일간 방에 감금된 상태였다는 것. 집에는 부모의 시신과 권진아만 있었다. 현관문을 두고 굳이 베란다로 뛰어내릴 이유는 뭐였을까?
범인은 당시 집 안에 있었던 걸까? 권진아가 4층에서 뛰어내린 직후 도망간 것일까?
아니면 아직 범인이 밖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권진아가 앞뒤 생각하지 않고 베란다로 돌진해 버린 걸까?
의문점이 남는 현장이다. 그때 연주가 품속에서 진동을 느끼고 핸드폰을 본다. 문자를 보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린 연주가 씹어 먹을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권진아의 집 세탁기에서…… 반려견의 시신이 나왔답니다.”
내 눈이 커졌다. 연주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죽여서 거기 넣은 게 아니라…… 거기 넣고 돌려서 죽인 것 같답니다…… 이 개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