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08화
9. 광기(狂氣)(6)
김지혜가 흥분해 소리를 지른다.
“전치 3주예요, 3주! 자기 전 여자 친구를 때려서 전치 3주요!”
수녀님이 그랬다.
사람을 때리는 인간은 자기 논리와 말로 상대를 설득하지 못해 떼를 쓰는 어린아이고,
여자를 때리는 인간은 짐승이며.
자기 여자를 때리는 인간은 하느님도 구원하지 못할 악마라고.
순간 나 역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지금 어린 대학생들 싸움에 관여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는 상대가 살인을 저지를 명분이 있는 자인지 확인을 해야 한다.
“권진아 씨가 지현우에게 끌려갔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화가 안 됐어요, 문자도 안 읽고.”
단지 그 이유라고?
정명훈이 눈치를 보다 말했다.
“그때 지혜 말을 믿었어야 됐는데…… 수업 끝나고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지혜가 부탁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하다고. 남자애들 몇 명 모아서 현우 형 자취방에 좀 가 보라고. 저도 걱정이 되긴 했습니다. 워낙 집요하게 쫓아다녔거든요. 몇 명한테는 은밀하게 진아 학교 오면 어디 있는지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음, 김지혜라는 학생 촉이 꽤 좋은 모양이다.
“그래서 집에 갔더니 지현우가 권진아 씨를 구타하고 있었습니까?”
“예…….”
“그래서요?”
“뜯어말렸습니다. 그 와중에 친구들이 형에게 몇 대 맞기도 했고. 근데 우리 쪽은 남자 넷이었어요. 흥분한 형 팔다리를 붙잡고 뒹굴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진정이 안 되길래 진아한테 빨리 도망가라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권진아 씨가 전치 3주라는 건 병원에 다녀왔다는 것이고. 외적으로 구타 흔적이 남았을 텐데요.”
김지혜가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눈 아래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어요.”
전치 3주.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물론 구타가 원인이 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잘못이지만 조그만 멍만 들어도 의사는 전치 2주 판정을 해준다. 3주면 멍이 든 것보다 좀 더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나는 김지혜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 말은. 권진아 씨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외적으로 흔적이 남았다면 부모님이 몰랐을 리가 없는데.”
김지혜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러니까요! 진아 아빠도 진짜!”
응? 여기서 권진아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가 왜요?”
김지혜는 말도 하기 싫은 모양새로 팔짱을 낀다.
“하! 진아 아빠는 원래 학교 선생님이셨어요. 너무너무 부드러운 분이었는데 이럴 때까지 그럴 줄이야. 진아 얼굴을 보고 병원에 데려갔다가 진단서 끊고 그 길로 바로 경찰서로 갔어야 했어요. 근데 진아 아빠는 같이 자식 키우는 사람인데 그래서 되겠냐 하면서 지현우 그 새끼 부모님을 찾아갔어요.”
지현우는 자취를 한다. 부모님은 따로 살고 있을 것이다.
“부모님 집 주소는 어떻게 알고 갔죠?”
“진아가 알고 있었어요. 가끔 집에서 자취 집으로 소포가 오는데 그때 주소를 봤다고 했어요.”
“집이 어디입니까?”
“옥천이요.”
옥천군. 대전시 바로 옆에 있는 곳이다. 이동이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께 뭐라고 했는지 들었습니까?”
김지혜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 아들 잘 타일러서 우리 애 못 만나게 해달라고 점잖게 말씀하셨어요. 아니 이게 말이 돼요? 나 같으면 내 딸이 눈깔 시퍼렇게 멍들어서 오면 노발대발하면서 그 집안 다 뒤집어엎었을 텐데! 그 상황에 점잖게 말을 해요? 그러니 이 사달이 나죠!”
정명훈이 김지혜의 팔을 툭 친다.
“야.”
“뭐!”
“말이 너무 심하잖아!”
“…….”
흥분해서 말했지만 김지혜는 권진아의 부모님이 어찌 되셨는지 이미 아는 모양인지 금세 실수를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다.
“아니…… 그게 너무 답답해서 그만.”
내게 미안할 일은 아니니 넘어가자.
“그래서요?”
“…….”
김지혜는 방금 말실수를 해서 그런지 입을 닫는다. 대신 정명훈이 나섰다.
“그 주 주말에 현우 형이 옥천 집에 불려갔습니다. 아버지에게 단단히 혼이 났는지 씩씩거리며 돌아와서 동아리 애들 중에 친한 애들 불러내서 술을 마셨습니다.”
“정명훈 씨도 그 자리에 계셨습니까?”
“아뇨…… 전 나중에 들었습니다.”
“지현우가 뭐라고 했습니까?”
“술에 잔뜩 취해서 내가 권진아 그년 때문에 학교에서 안 좋은 소문 나고, 동아리 연합 회장도 잘리고, 아버지는 창피하니 학교 그만두고 와서 농사나 지으라고 했다고…… 이게 다 권진아 때문이고, 자기 소문내고 다닌 진아 친구들 때문이라고…… 다 죽여 버린다고…….”
하?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학교 화장실에서 여학생을 구타해 학교에 소문이 퍼지고, 그로 인해 동아리 연합 회장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모든 건 자신이 여학생을 구타했기 때문인데 모든 것을 그녀 탓으로 돌린다고? 이래서 학생들이 찾아온 것이구나.
“또 다른 일이 있었습니까?”
정명훈은 고개를 저었다. 김지혜 역시 다른 이야기는 없다. 대신 몸을 내밀며 말했다.
“진짜 그 새끼 맞아요, 빨리 잡아주세요, 형사님.”
아무래도 다른 학생들 진술을 받고 있는 다른 팀원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할 것 같다.
“일단 알겠습니다, 먼 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모르니 연락처만 주시고, 그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학생들을 일반인 출입 구역까지 안내해 주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최영현과 연주가 사무실에 앉아 있다. 나는 PC를 두들기며 CCTV를 확인 중인 관우에게 물었다.
“나온 거 있어?”
관우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기지개를 켠다.
“일단 이동 동선 따라가고 있는데, 이 새끼 이거 CCTV 위치 보면서 교묘하게 골목길 들락거리네요. 일부러 빙빙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음, 그렇겠지. 아파트 내에 CCTV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일부러 계단을 이용한 놈인데, 자기 이동 동선이 추적당할 수 있다는 생각도 당연히 할 것이다.
최영현이 관우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중간에 옷 갈아입을 수 있으니까 눈 시퍼렇게 뜨고 잘 봐라. 그 집에서도 바지 갈아입고 나왔다며.”
“저만 믿고 계십쇼, 반드시 추적할 테니까.”
일단 저쪽은 시간이 걸리겠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물었다.
“다들 진술 끝났으면 의견들 이야기합시다.”
연주와 최영현이 자기 의자를 엉덩이로 밀고 내 자리 쪽으로 온다. 먼저 연주가 입을 열었다.
“일단 동기는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걸로 일가족 전체를 살해했다고 하긴 모자랍니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일단 지현우 소재 파악을 하고 임의동행은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최영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 역시 아직 지현우가 범인이라고 단정 짓진 않지만 이 상황에서 범행 동기가 가장 강력한 용의자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파티션 너머의 관우에게 말했다.
“관우야.”
“예?”
“지현우 자취방 주소 문자로 보내고, 신상 더 캐봐. 뭐 다른 거 없는지.”
“예, 알겠습니다.”
나는 최영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최영현 경위님.”
“예.”
“즉시 지현우 임의동행으로 데려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연주가 함께 일어나며 말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형사는 팀으로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다. 혼자 다니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대응이 미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둘을 보냈다.
나는 커피를 두 잔 타서 관우 자리에 하나 놓고 내 자리로 돌아오며 말했다.
“지현우 관련 정보 있으면 바로 알려줘.”
“예, 팀장님.”
연주와 최영현이 대전까지 내려가야 하니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관우의 정보를 기다렸다. 한참 시간이 지나자 관우가 입을 연다.
“팀장님.”
“어?”
“그…… 지현우 군대에서 문제 일으킨 거 있지 않습니까?”
“어.”
“박재상 씨 부모님 명의로 법률사무소에 의뢰했다가 취소한 기록이 있습니다.”
“내용 볼 수 있어?”
“잠시만요.”
사실 이걸 보는 건 불법이다. 하지만 관우 녀석이라면 흔적을 남기지 않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걸 합법으로 보려면 오만 서류를 다 보내야 한다. 관우는 몇 분 만에 법률사무소의 자료를 몽땅 긁어와 박재상의 정보를 캐치했다.
“헐…… 전치 16주 후 추가 진단 8주? 뭘 어떻게 두들겨 팼길래 교통사고 난 사람 진단이 나오죠?”
나는 발로 의자를 밀어 관우 옆자리로 갔다.
“박재상?”
“예, 사진은 없는데. 전치 16주 플러스 8주면 24주인데. 이 정도면 후유 장애 남았겠네요.”
이상하다. 사람에게 전치 24주의 상해를 입혔는데 고작 집행유예 1년이라고?
“벌금 없어?”
“예, 박재상 부모가 소송 걸었다가 취소했습니다.”
“합의?”
“기록은 없는데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음, 그러니까 지현우의 부모가 박재상의 부모와 합의를 했다는 건데. 돈이 꽤 많이 들었을 거다. 후유 장애가 남을 만큼 폭행을 했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을 테니까.
나는 모니터를 눈짓하며 말했다.
“지현우 부모님. 뭣 하는 사람인지 알아봐.”
“예!”
이 정도 정보를 알아보는 건 문제도 아닌지 관우는 일 분도 안 되어 말했다.
“옥천에서 과수원 하네요. 토지 면적이 만 평이 넘는 대규모 과수원이었는데 3년 전에 오천 평을 매도했어요. 음…… 지현우 군대 사건이 터질 무렵인 걸 보니 땅 팔아서 합의금 준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별거 없습니다. 그냥 평범합니다. 어머니도 계시고.”
“아동학대 신고 기록은?”
“없습니다. 부모 쪽은 완전히 깨끗해요. 과속 딱지 한 번 안 떼고 산 사람들인데요?”
살인자들의 프로파일을 보면 보통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큰 경우가 많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니 부모가 멀쩡하다고 자식도 멀쩡하라는 법은 없다.
“음, 알았다. CCTV 계속 봐. 어디까지 봤어?”
“여기 동일 마트 들어간 장면까지 봤습니다.”
“마트?”
“예.”
“카드 사용 기록 좀 보자.”
“카드 안 썼습니다. 현금 쓴 모양입니다.”
“음.”
“여기 다시 나오네요.”
들어갈 당시의 모습과 동일하다. 여전히 하얀 바지에 검은 상의, 검은 모자에 큰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있다. 뭔가 샀다면 가방 안에 넣었을 것이다.
“계속 따라가.”
“예.”
뭘까?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든다. 자꾸만 CCTV 속 배관 수리공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던 나. 정체 모를 좋지 않은 촉 때문에 속이 이상해질 무렵, 최영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예, 지현우 임의 동행했습니까?”
-팀장님, 이 새끼 집에 없습니다.
“집 안에 있는데 없는 척하는 건 아니고요?”
-문이 열려 있습니다. 주택 1층에 세 들어 자취하는 거라 집주인이 따로 있는 집인데. 지금 집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수색영장 없긴 한데 일단 대충 뒤져볼까요?
“흔적 안 남게 부탁합니다. 그리고 기다렸다가 지현우 반드시 데려오세요. 어떤 놈인지 모르니 일단 신병 확보해야 됩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지현우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에 다시 불안한 생각이 든다. 다시 한번 CCTV 화면을 본 나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마트 이름이 뭐라고?”
“동일 마트요.”
“거기 전화번호 줘봐.”
“예.”
관우가 보내준 마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자,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종로경찰서 강력 3팀 현도경 경감입니다.”
-네?
“수사 때문에 뭐 하나만 여쭤보려고요.”
-뭘…….
나는 CCTV 화면을 힐끔 본 뒤 말했다.
“오늘 저녁에 하얀 바지에 검은 모자 푹 눌러쓴 남자 왔었죠? 물건값 현금으로 계산하고 간.”
-……아! 기억나요. 그 사람.
“죄송하지만 그 사람이 구입한 물건이 뭡니까?”
아주머니는 기억이 나질 않는지 직접 컴퓨터에 남은 기록을 확인한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한참 들린 후 다시 전화를 받은 아주머니가 말했다.
-칼 샀어요. 집에서 쓰는 부엌칼.
아주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알……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 관우가 물었다.
“뭐 샀답니까?”
“…….”
범인. 지현우인지 아닌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범인이 또 칼을 샀다. 이 새끼, 아직 안 끝난 거다. 아직도 누군가 더 죽일 대상이 있는 거다.
나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
“지현우 핸드폰 추적해.”
“아까 해봤는데 꺼져 있습니다.”
“젠장, 아무래도 이상하다. 난 배관 수리공 쫓아서 바로 마트로 갈 테니. 지현우 동선 계속 보고해 줘!”
“어? 팀장님! 팀장님?”
빨리 잡아야 한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 살해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