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109화 (109/328)

살인의 기억 109화

9. 광기(狂氣)(7)

이화동 동일 마트 앞.

나는 마트 앞에 주차된 작은 배달용 트럭 옆에 차를 세우고, 마트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규모가 있는 마트이긴 하지만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가 아니기에 쇼핑 중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곳.

카운터에 있는 아주머니는 잠시 계산하는 사람이 없는지 날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얼른 신분증을 꺼내며 말했다.

“조금 전에 전화드렸던 경찰입니다.”

“아? 아까 모자 쓴 사람 물어보셨던?”

“네, 전화받으신 분입니까?”

“네, 맞아요.”

“그 사람 얼굴 보셨습니까?’

“음…… 모자를 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계산할 때 얼굴을 보긴 했어요.”

나는 관우가 핸드폰으로 전송해 준 지현우의 사진을 내밀었다.

“혹시 이 사람입니까?”

아주머니는 알쏭달쏭한 얼굴로 핸드폰을 받아 자세히 본다.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신경 써서 보지 않았다면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신상명세에서 본 신체 특징을 말했다.

“키는 180㎝ 정도고, 몸무게 86㎏의 건장한 체격입니다.”

“어…… 비슷한 체격이었던 거 같아요. 잠깐만요, 김 씨 아저씨!”

야채 코너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덩치 좋은 30대 남성이 고개를 든다. 아주머니가 손짓하자 날 힐끔거리며 다가오는 아저씨.

아주머니가 물었다.

“아저씨 키 얼마예요?”

“저…… 182㎝인데.”

“맞네. 계산할 때 아저씨가 야채 코너 당근에 바코드 안 붙은 거 있다고 계산대에 왔었거든. 그때 그 사람이 김 씨 아저씨 키와 비슷해 보이긴 했어요.”

나는 김 씨라는 사람의 키를 보며 물었다.

“덩치는 어땠습니까?”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뚱뚱하진 않았는데 어깨가 김 씨보다 더 넓은 것 같았어요.”

엉거주춤 서서 사태 파악을 하고 있는 김 씨 아저씨. 이 사람은 적어도 100㎏은 넘어 보인다. 이 사람과 비교했을 때 뚱뚱해 보이진 않고 어깨는 더 넓어 보였다. 체격 조건은 지현우와 비슷하다.

“그 사람이 샀다는 칼 좀 볼 수 있을까요?”

“응? 아, 잠깐만요.”

아주머니는 영수증 목록을 두들겨 보다, 김 씨에게 말했다.

“김 씨, 식칼 코너에서 이거, k-48972 제품 좀 보여 드려요.”

김 씨가 날 힐끔 보며 아주머니에게 속삭인다.

“경찰?”

다 들립니다, 아저씨.

나는 김 씨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며 협조를 구했다. 경찰 신분증을 보자마자 살짝 얼어붙는 김 씨. 뭐 죄 안 지은 사람들도 경찰이라면 움찔하고 보니 이젠 이게 익숙하다.

김 씨가 얼른 식칼 코너로 달려가 플라스틱과 종이로 포장된 칼 한 자루를 꺼낸다.

“이 물건입니다.”

김 씨가 전해준 식칼.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요리용 식칼이다. 크기는 수박을 자를 수 있는 정도. 야채 손질용 칼처럼 넓적하지도 않고 끝이 뾰족한, 어느 집에나 하나쯤은 있을 듯한 크기의 평범한 식칼이다.

난 식칼을 들고 다시 카운터로 가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구입 품목은 이것뿐이었습니까?”

아주머니는 영수증이 출력된 화면을 계속 띄워 놓고 있었는지 바로 고개를 젓는다.

“아뇨, 청 테이프 다섯 개도 샀어요.”

칼과 청 테이프.

보통 사람의 눈에 이것은 집에서 사용하는 별것 아닌 도구들이겠지만 경찰의 입장에서 보면 범죄 현장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청 테이프는 일반 스카치 테이프와 달리 쉽게 찢어지지 않아 상대를 구속할 때 종종 사용되기 때문이다.

나는 포장된 칼을 들어 칼의 도면과 칼등을 비교했다. 권진아의 부모님 시신에 남겨진 보통의 식칼과 비슷하게 생긴 칼. 범인은 권진아의 부모님을 살해할 때도 이렇게 평범한 칼을 썼을 것이다.

갑자기 칼을 살펴보기 시작한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주머니와 김 씨.

나는 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수사한 바에 따르면 범인은 쾌락형 살인범이 아니다.

살인을 위해 아무 죄도 없는 자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목적이 있다.

그것이 원한이 되었든 개인의 이득이 되었든 분명한 목적이 있어 움직이는 것이다.

범인은 일가족을 살해하고, 그 앞에서 딸을 강간한 뒤, 또 다른 칼을 구입해 어딘가로 다시 이동 중이다. 연쇄살인범보다는 연속살인범으로 볼 수 있다.

무엇이 그를 움직이고 있을까?

아니, 과연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을 죽일 만큼 미워할 수 있게 하는 걸까? 범인이 원한을 가질 또 다른 목표물은 과연 누구일까? 막아야 한다. 내가 늦으면 또다시 누군가 죽는다.

문득 권진아 생각이 났다.

그녀는 4층에서 추락했다. 내가 그녀의 입장이라면 왜 4층에서 뛰어내렸을까? 뛰어내리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아무리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고 하지만 그런 모험을 해야 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어쩌면 권진아 씨는 자신 때문에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안 순간, 삶의 의욕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이치카와 사건의 피해 여성처럼 그녀는 부모님이 다친 줄로만 알고 시키는 대로 하며 목숨을 구걸하다,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나서 비관해 자살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4층 밖으로 몸을 던진 것은 삶을 향한 몸부림이 아니라 죽기 위해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을 폭행하고, 그의 가장 소중한 가족들을 죽인 범인. 차라리 깨끗하게 죽여 원한을 푸는 것보다 그녀 앞에서 부모의 시신을 보여주며 조롱하는 악독한 선택을 한 자.

권진아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그녀는 꿈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생각이 나선의 고리를 타고 황지영에게 이어진다. 그녀는 성폭행을 당했다. 범인이 부모님을 직접적으로 살해한 것은 아니지만, 범인은 황지영의 가정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평범한 보통의 가정에 닥친 일을 감당하며, 딸을 지키며 살아보려 몸부림쳤던 황지영의 두 부모는 이 사건으로 인해 파생된 삶의 고단함에 사망했다. 직접적으로 살해하지 않았지만 간접살인이나 마찬가지다.

황지영도 알 것이다. 가정이 무너진 것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과장되고, 부풀려져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됐을 것이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그녀는 일곱 개의 인격을 만들어내는 선택을 했다. 가정이 무너진 두 여성의 생각이 떠오르자, 불같은 분노가 뿜어져 나온다. 아마 권진아 씨 사건만 일어났다면 나는 이 정도로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건이 합쳐지자, 나는 범죄로 인해 파생된 두 가정의 파탄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칼을 보며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죽일 기세를 뿜어내자, 살기를 느낀 아주머니와 김 씨 아저씨가 주춤거린다.

아, 여긴 마트였지. 또 지금 나는 두 사람과 대화 중이었지. 정신이 든 나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칼을 살펴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슬슬 부담스러워져 칼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내 눈이 번쩍 떠졌다.

뭘 하는지 몰라 어정쩡한 자세로 날 훑어보고 있는 김 씨와 뭐 더 물어볼 거 없냐는 얼굴로 날 뚫어지게 보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시 기억이 시작되고 있다. 악마의 기억이 다시 눈앞에 펼쳐질 시간이다.

* * *

극심한 어지러움 끝에 눈을 떠 보니 내 앞에 발가벗은 여성이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다.

나는 지금 의자에 앉아 한 손에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여성의 턱을 잡고 있다.

얼마나 맞았는지 코와 입이 다 터져 피를 줄줄 흘리고 머리는 산발을 한 여성이 서럽게 울며 빈다.

‘오빠…… 진짜 이러지 마. 왜 이러는 거야…….’

내 심장이 쿵쿵댄다. 이상하다. 장진수의 기억을 비롯해 다른 살인자들의 기억을 읽었을 때의 감정 변화와 확연히 다른 내 신체 상태.

사람을 죽이며 낄낄거리고, 쾌락에 젖어 기뻐하던 감정들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전혀 다른 감정 상태의 살인자는 또 다른 생소함을 준다. 나는 지금 무척 분노해 있다.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고 있는 사람. 그녀는 권진아였다. 나는 칼끝으로 권진아의 오른쪽 어깨를 슬쩍 찌르며 밀었다. 칼이 피부를 살짝 뚫었지만, 찌를 목적이 아니었기에 생채기만 나는 정도의 힘만 준다.

‘야.’

‘아!’

‘사과해.’

‘…….’

‘사과하라고, 씨X년아.’

‘…….’

권진아가 붉어진 눈으로 날 올려 본다.

‘정신 차려, 오빠. 사람들 잡고 물어봐. 오빠가 잘못한 거야. 제발 정신 차려.’

짜악!

나는 칼을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후려쳤다. 손이 묶인 권진아가 그대로 옆으로 쓰러진다. 나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씨X! 네 친구 년들이 학교에서 시끄럽게 떠벌리고 다녀서 이 난리가 난 거 아냐! 나 씨X, 동아리 연합 회장 잘린 거 알아 몰라?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나는 쓰러진 권진아를 발로 밟고 배를 찼다. 개X끼, 여자 배를 발로 차다니. 넌 엄마도 없냐? 속에서 오만 욕이 나왔지만, 지금 나는 그를 말릴 아무런 힘도 없다.

몇 번을 더 발로 차고, 머리채를 붙잡고 일으켜 세운 후 다시 뺨을 날렸다. 그러자 권진아의 얼굴에서 피가 튀어 내 손에 묻는다.

나는 쓰러져 가늘게 숨을 헐떡이는 권진아를 노려보다 쿵쾅거리며 걸어가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는 권진아의 엄마가 보인다.

바닥을 보니 그녀가 흘린 피가 강처럼 흐르고 있다. 슬리퍼를 신고 다리를 쭉 벌린 채 수도꼭지를 열어 손을 씻었다. 그러다 피 때문에 슬리퍼가 미끄러져 다리가 쭉 찢어진다.

‘아! 씨X!’

나는 사람을 죽여놓고 겨우 피 때문에 발이 미끄러진 것이 짜증 났다. 나는 씩씩거리며 시체를 발로 툭툭 찬 뒤 가방을 뒤져 밀가루를 꺼냈다.

‘진즉 뿌렸어야 되는데.’

나는 밀가루를 뜯어 권진아 어머니의 시신 위에 뿌렸다. 바닥에 흥건한 피 위에도 골고루 밀가루를 뿌리자, 금방 피를 흡수한 하얀 가루들이 붉게 변한다. 슬리퍼를 신고 바닥을 문질러 보자 조금 전보다 미끄러짐이 덜하다.

나는 밀가루 한 포대를 전부 다 화장실에 뿌린 후, 다시 권진아를 가둔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 쓰러져 숨만 겨우 쉬고 있는 권진아를 힐끔 본 뒤 주방을 뒤졌다.

‘뭔 집에 밀가루 하나 없어? 이것도 살림이라고.’

찬장을 다 뒤져 겨우 밀가루 한 포대를 찾아낸 나는 거실 쪽으로 갔다.

현관문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 그 역시 피를 잔뜩 흘리고 있다. 나는 이미 뜯어져 있는 밀가루 포대를 뒤집어 그의 위에 뿌렸다. 나는 방에 있는 권진아가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저씨 선생이었다며? 딴 새끼들만 가르치면 뭐 해, 자식 교육을 잘 시켰어야지. 당신 딸년 때문에 내가 병신 됐거든? 지옥 가서 죗값 잘 치르라고.’

나는 다 쓴 밀가루 포대를 구겨 주머니에 넣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와락 인상을 구겼다.

‘아 씨X! 바지에 다 묻었잖아, 아!!!!!!!! 젠장!’

아까 화장실에서 미끄러지며 피가 묻은 모양이다. 나는 바지 끝에 묻은 피를 털어냈지만 이미 옷감에 묻은 피가 쉽게 지워질 리가 없다.

나는 걸레를 가져와 바지를 닦다가 포기하고 던져 버린다.

‘하, 존나 짜증 나네.’

나는 다시 칼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 권진아의 방으로 간다. 아직 쓰러져 있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끌어 올리자, 울고 있던 권진아가 눈을 가늘게 뜬다.

‘계속 말 안 들으면 네 애비도 엄마 꼴로 만들어준다.’

권진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아빠는…… 아빠는 살아 있는 거지? 진짜 맞지?’

나는 실룩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하게 해.’

권진아가 알겠다는 듯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실실 웃기 시작했다. 현관문 앞에 이미 네 아빠가 죽어 있다는 걸 알면 넌 어떻게 나올까? 네 반응이 궁금해. 정말 통쾌하겠지? 꼭 내 눈으로 보고 말 거야. 그래야 내 뒤집어지는 속이 좀 진정될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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