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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110화 (110/328)

살인의 기억 110화

9. 광기(狂氣)(8)

너 때문에 학교 동아리 연합 회장에서 잘렸다.

너와 네 친구들이 헛소리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너는 내게 사과를 해야 한다.

조금 전 대화를 복기하니 확신이 든다. 나는 지금 지현우의 기억 속에 들어와 있다. 이 사건의 범인은 지현우다.

나는 머리채를 잡고 있던 권진아를 확 팽개쳤다.

‘안 되겠네. 이년 이거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

권진아가 몸부림을 치며 기어온다.

‘아니야, 오빠! 진짜야, 다 진짜라고! 나 아무것도 몰라, 진짜! 학교에도 말 안 했고, 나 멍 때문에 학교 못 나가고 있었던 거 오빠도 알고 있잖아.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어, 응? 아빠 좀 살려줘, 오빠.’

나는 기어와서 내 발목에 얼굴을 문지르며 비는 권진아를 보며 내심 십 년 묵은 체증이 풀리는 기분이 든다.

진즉 이렇게 빌었으면 지금처럼 되진 않았을 텐데. 그러니까 처음부터 싹싹 빌지, 자꾸 사람 열 받게 해.

권진아가 몸을 버둥거리며 상체를 일으킨다. 발목과 손목이 모두 묶여 있어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을 텐데 억지로 일어나 무릎을 꿇는 권진아.

‘내가 이렇게 빌게.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우리 아빠 살려줘, 오빠.’

‘킬킬. 더 해봐.’

권진아가 머리를 땅에 쿵쿵 박는다.

‘내가 잘못했어, 다 내 잘못이야. 오빠. 흐흐흑! 우리 아빠만이라도 살려줘, 제발!’

하, 속 시원해. 학교 새끼들이 이년이 이렇게 바닥 기어 다니며 비는 꼴을 봤어야 되는데. 날 병신 취급하던 년이 이렇게 된 걸 다들 직접 봐야 딴 새끼들도 날 무서워할 거 아냐.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이년만 조진다고 끝이 아니네. 나만 보면 벌레 보듯 하던 년들도 싹 다 이 꼴로 만들자. 동영상 찍어놓고 학교에 다 퍼뜨려 버리자, 그럼 씨X 그년들 인생도 내 꼴 나겠지, 킬킬.

기분이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아직 모자라다. 나를 아프게 한 놈들은 백 배 더 아프게 해줘야 한다.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비는 권진아를 내려 보며,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근데 어쩌냐? 네 꼰대 이미 죽였는데?’

내 발목에 얼굴을 비비며 빌던 권진아가 움찔한다. 몸을 버둥거리며 상체를 세워 날 올려 보는 권진아.

‘아…… 아니지? 아니지, 오빠?’

‘킬킬, 야, 생각을 해봐라. 네 애미부터 죽였는데 가만있었겠냐? 당연히 덤비지. 너 대가리 꼴통이냐? 아직 살아 있을 거란 걸 믿은 게 병신이지.’

권진아의 눈이 질끈 감긴다. 나는 권진아의 앞에 앉은 후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러니까 사과해.’

‘…….’

‘진심을 다해 사과하라고, 이년아. 너 때문에 두 사람이 죽었으니까. 반성하고.’

권진아의 눈이 떠진다. 표독스러운 눈.

‘으아아아아아!!!!!!’

권진아가 사력을 다해 내 얼굴에 박치기를 먹였다.

‘윽!!!!’

나는 코를 부여잡고 뒤로 쓰러졌다. 권진아는 내가 쓰러진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묶인 다리로 깡총깡총 뛰어가 거실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 부르짖었다.

‘야이 개새끼야아아아!!!!!!!’

‘저 씨X년이!’

이제 죽여야 할 때다. 이 사달을 내고 반성도 안 하는 년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나는 떨군 칼을 찾았다. 침대 밑으로 들어간 칼을 찾기 위해 몸을 숙였을 때 밖에서 창문 깨지는 소리가 난다. 놀란 내가 거실로 달려나가자, 거실에 난 베란다 창문이 깨져 있고, 권진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재빨리 베란다 창문 옆에 몸을 숨기고 밖을 보자, 주차장에 떨어져 있는 권진아의 모습이 보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 빗자루를 쥐고 있는 경비 아저씨가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씨X, X됐네.’

나는 재빨리 가방과 내가 가져온 물건들을 챙겼다. 그러다 바짓단에 묻은 피를 보고 코를 살짝 찡그렸다.

가방을 뒤져 바지를 갈아입은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쓴 후, 내 물건들과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챙겼다. 칼과 스패너는 가방에 넣고 밀가루 포대는 후드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빠르게 집을 벗어났다.

일부러 지하 주차장에 내려 자동차가 지나는 길로 나오자, 멀리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그쪽을 힐끔 보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래, 너 같은 년은 스스로 죽는 쪽이 더 어울리지. 그게 네 반성이라고 생각해라.’

나는 빠르게 발을 놀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 * *

마트에서 칼을 쥔 채로 비틀거리며 깨어난 나. 내 옆에 있던 김 씨가 반사적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나는 자기보호 본능대로 순식간에 김 씨의 팔을 꺾었다. 조금 전에 너무 충격적인 장면을 봤기에 온몸이 긴장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김 씨가 카운터 위에 팔이 꺾인 채 엎어져 신음한다.

“어억!!!”

“어머! 뭐 하는 거예요!”

뾰족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는 완전히 깨어났다. 김 씨 팔을 꺾고 있던 손을 얼른 빼고 사과부터 건넸다.

“정말 죄송합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반사적으로 그만.”

김 씨는 인상을 잔뜩 쓰고 팔을 흔든다. 그리 세게 꺾진 않아서 다치진 않았을 것이지만 기분이 무척 나쁠 것이다.

“하…… 이게 뭔…….”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어지러움을 간신히 참은 내가 진심을 담아 허리를 숙이자, 김 씨는 날 한 번 째려본 뒤 자기 일을 하러 가버린다. 기분이 상하고 팔이 아픈지 팔꿈치를 자꾸 만지면서.

나는 김 씨 방향으로 허리를 숙인 채 방금 읽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김지혜 그 씨X년 말고 또 나불대고 다닌 새끼 누구 있는지 말해.’

‘모, 몰라. 지혜 말고는.’

‘명훈이 새끼 동아리 모임 안 나오던데. 그 새끼도 한패 아냐?’

‘모른다고. 진짜 몰라, 오빠. 믿어줘.’

‘학생회실 가서 화장실 사건 일러바친 년은 어떤 년이야?’

‘나도 몰라, 오빠. 소문 나서 그런 거야. 누가 이른 거 아니야.’

‘그걸 믿으라고? 씨X, 학교에서 우리 꼰대한테 전화까지 했다고! 내가 집에 끌려가서 씨X 꼰대 새끼한테 무슨 소리 들었는지 알아?’

‘진짜야, 오빠 믿어줘.’

지현우의 말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관우야!”

-예, 팀장님.

“아까 대학생들 연락처 기록해 놓은 거 찾아서 김지혜 씨 연락처 빨리 보내줘!”

-예? 아, 예. 문자 보내 드리겠습니다.

“최영현 경위한테 연락 없어?”

-아직 없습니다. 지현우 자취 집 근처에서 잠복 중인 거 같던데.

“지현우 대전에 없다! 배관 수리공이 지현우야!”

-헉? 어, 어떻게 아십니까? 마트 직원이 얼굴 봤어요?

보긴 했지. 확신은 못 가졌지만. 나는 미친 사람 보듯 바라보는 마트 아주머니를 힐끔 본 뒤 말했다.

“어, 목격자가 있다. 배관 수리공 동선은?”

-두 시간 반 전에 동묘 앞 역에서 6호선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 역에서 내렸습니다.

관우의 말을 듣는 순간 감이 왔다. 이 자식은 지금 권진아와 함께 자신을 욕한 김지혜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김지혜 연락처 빨리 보내줘!”

전화를 끊고 달려 나와 차에 오르자마자 관우가 문자로 연락처를 보내준다. 김지혜에게 전화를 걸자,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밖에 있는 모양이다.

-여보세요?

“김지혜 씨! 아까 경찰서에서 만났던 현도경 경감입니다!”

-아? 네. 형사님.

다행이다, 아직 김지혜가 살아있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집으로 가고 계십니까?”

-…….

“현재 위치 알려주세요!”

-왜 그러시는지.

“김지혜 씨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혼자 사십니까?”

-저기, 형사님. 저 아직 서울인데.

“서울 어디에 계십니까?”

-여기 진아 병원인데. 중환자실에 있어서 면회가 안 된다고 해서 그냥 로비에 있어요.

하, 다행이다.

“거기 그대로 계세요. 지원 요청해서 경호 인력 보내겠습니다.”

-아……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

괜히 불안감을 조성할 필요는 없다.

“노파심 때문입니다. 김지혜 씨는 혼자 사십니까?”

-아뇨? 가족들과 같이 살아요.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다시 불안감에 휩싸였다.

“가족들이 어디 삽니까?”

-학교 근처에 사는데…….

“…….”

그때 관우에게서 문자가 온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김지혜와 통화 중에 문자를 확인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팀장님, 지현우가 고속터미널에서 대전 방향 버스를 탔습니다. 두 시간 전입니다.

제길! 이 자식이 김지혜의 집으로 가고 있는 거였다. 나는 재빨리 전화를 받고 소리쳤다.

“김지혜 씨! 빨리 집으로 전화해서 가족들 전부 대피시키세요. 그리고 바로 문자로 집 주소 찍어주세요!”

-네? 혀, 형사님…… 무섭게 왜 그러세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다. 사태의 위급함을 알려야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다.

“지현우가 김지혜 씨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

“조금 전 마트에서 칼을 샀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서, 설마.

“빨리 집에 전화하고 주소 보내주세요.”

-네, 네!!!!

나는 차를 출발시키며 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현우가 탑승한 고속버스 넘버 알아내고, 도로교통순찰대에 지원 요청해. 아니, 잠깐만. 지현우가 대전 방향 버스를 탄 게 두 시간 전이라고?”

-예, 팀장님.

제길, 벌써 대전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나는 관우에게 대전 경찰서에 협조 요청해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지현우 체포 작전을 시행하라는 지시 후 다시 최영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위님. 접니다.”

-예, 팀장님. 아직 지현우는 안 왔습니다만.

나는 김지혜에게 온 문자를 확인 후 말했다.

“바로 동구 신인동으로 가세요. 상세 주소는 문자로 보내겠습니다.”

-예? 갑자기 무슨.

“배관 수리공이 지현우 본인이었습니다. 지금 권진아 씨 친구 김지혜 씨의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요?

“빨리 움직여 주세요! 일단 김지혜 씨는 서울에 있고, 가족들은 대피시켰습니다만, 경위님이 직접 전원 대피했는지 확인해 주시고 거기서 잠복해 주세요. 대전 경찰서에 협조 요청해 주시고!”

경험 많은 최영현은 더 묻지 않고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차를 급히 출발시키고 고속도로 톨 게이트를 통과해 대전으로 향했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베스트 시나리오는 대전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지현우를 붙잡는 것.

만약 그렇게 된다면 추가 희생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후에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새 칼을 구입한 것으로 보아 범행에 쓰였던 흉기는 이미 버렸을 확률이 높다. KCSI가 범행 현장에서 지현우의 DNA를 발견하거나, 혹은 체포된 지현우의 가방에서 피 묻은 바지가 나올 수도 있다.

만약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체포하지 못한다고 해도 김지혜의 집에 최영현과 연주가 잠복해 있다. 거기서 체포하면 현행범으로 체포가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그의 목적이 김지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혹시 함께 병원에 있는 정명훈의 가족이 다음 범행 대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운전대를 잡은 반대 손의 손톱을 물어뜯으며, 차는 고속도로로 빨려 들어간다.

부디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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