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11화
9. 광기(狂氣)(9)
대전복합터미널.
경찰차들의 사이렌 불빛이 가득한 터미널.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정류장 내 행인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는 경찰들을 보고 있다.
나는 신분증을 내밀고 버스 전용 주차장으로 들어간 뒤 대충 차를 세우고 뛰어내렸다.
수사 베이스 캠프로 보이는 천막으로 들어가 대전 현장 책임자로 보이는 이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니, 50대 남자 형사가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허, 그 나이에 벌써 경감? 나도 경감인데.”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계급이 같다고 해도 선배 대우를 해줘야 한다. 더구나 상대는 나보다 스무 살은 많아 보인다. 형사는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대전 광역수사대 오진규 경감입니다.”
“종로경찰서 강력 3팀장, 현도경 경감입니다. 지현우는 어떻게 됐습니까?”
오진규가 상황판을 보여주며 말했다.
“지원 요청을 받고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21시 03분. 지현우가 탔다는 강남고속터미널발 버스가 도착한 시간은 20시 53분. 시간 차가 10분이라 잡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아직 역 내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제길, 손목시계를 보니 현재 시간은 22시 15분이다. 죽도록 액셀을 밟아 내려왔지만 당연하게도 지현우보다 늦어버렸다.
주변을 보니 연주가 관우에게 부탁해 뿌린 지현우의 사진을 든 경찰들이 남자 행인에 한해 전수 검사 중이다.
“역내 화장실이나 계단 쪽도 수색 중입니까?”
“물론입니다, 3인 1조로 수색 중입니다.”
10분 차이. 지현우는 역 밖으로 나가다 경찰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다시 역 안으로 들어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려 72분간의 수색에도 아직 꼬리가 밟히지 않았다면…….
‘이미 나간 거다.’
경찰이 덮치는 걸 봤을 수도, 혹은 그전에 재빨리 택시를 탔을 수도 있다.
나는 오진규에게 양해를 구한 뒤 다시 김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신호가 울리자마자 바로 받는다.
-네, 형사님!
“지혜 씨, 가족들 대피시켰습니까?”
-아래 이웃집에 내려갔어요.
“집이 몇 층 건물입니까?”
-4층이요. 저희 집은 3층이고.
“밖에 형사들이 대기 중입니다. 혹시 소음이 일어나도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세요.”
-네, 형사님. 그런데…… 진짜 우리 가족들 괜찮겠죠?
“믿을 만한 형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옆에 정명훈 씨 계십니까?”
-네, 있어요.
“좀 바꿔주세요.”
김지혜의 목소리가 멀어지며 정명훈을 찾는 소리가 들린 후,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예, 형사님.
“정명훈 씨. 실례지만 가족들과 함께 사십니까?”
-아뇨, 자취합니다.
휴, 그건 다행이다.
“가족들은 어디 삽니까?”
-부산이요.
됐다. 타겟이 좁혀졌다. 지현우는 대전에서 내렸다. 정명훈이 아니라 김지혜의 가족이 타겟이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형사님, 조심하세요.
전화를 끊은 나는 즉시 오진규 경감에게 말했다.
“범인이 노리는 집이 있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병력의 반은 남겨두시고, 나머지는 이 주소로 출동 바랍니다.”
오진규는 내 핸드폰에 기재된 주소를 메모한 뒤 물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범인이 다음 살해할 사람 주소입니다.”
오진규의 눈이 커진다.
“예?”
“빨리 출동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천막을 벗어나 차로 뛰어가 김지혜의 집으로 향했다.
초행이라 약간 걱정되었지만 대전은 의외로 왕복 16차선의 큰 도로가 뻥뻥 뚫려 있는 지역이 많은 대도시였다. 난생처음 와본 곳이었지만 여느 대도시 못지않게 크고, 오히려 차만 많은 서울보다 쾌적하다.
신호가 걸린 틈을 타 핸드폰을 확인하자, 지현우의 동선을 역추적 중인 관우에게서 문자가 왔다.
[팀장님, 지현우가 21시 58분에 대전복합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탔습니다. 넘버는 156 바 8729. 법인택시고, 택시 회사에 연락해 기사 전화 번호를 확인했습니다. 전화번호 보내 드립니다.]
역시 이 자식. 일 진짜 잘한다. 나는 관우가 보내준 택시 기사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예,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경찰입니다.”
-아, 예. 회사에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터미널 앞에서 태운 남자 손님 이야기 맞습니까?
운전 중일 텐데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이미 지현우가 내린 모양이다.
“맞습니다, 어디 내려주셨습니까?”
-음, 젊은 사람 같은데 앱도 안 쓰고, 결제도 현금으로 하고. 말본새가 거친 게 이상하다 했더니……. 중앙동에서 내렸습니다.
중앙동? 김지혜의 집은 신안동인데.
“확실합니까? 신안동이 아니라 중앙동 맞습니까?”
-예, 맞아요. 확실히 기억합니다. 조금 전이었으니까.
왜 신안동에 바로 가지 않고 중앙동에 내린 걸까?
“중앙동에서 신안동이 가깝습니까?”
-바로 옆 동네이니 가깝죠. 걸어가도 됩니다.
나는 대전의 지리를 모른다. 김지혜의 주소지가 신안동과 중앙동이 인접해 있는 곳에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건 지도를 확인해 보면 될 것이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뭐 나랏일 하시는 분인데 당연히 협조해야죠. 그런데 그 사람 나쁜 사람인가 봅니다?
“…….”
-하하, 답해주시기 어렵겠다. 괜히 물었네. 난 또 내가 도움이 될까 해서 물었죠.
“무슨 도움 말씀입니까?”
-아, 그 사람. 중앙동 공구시장에서 내렸거든요. 혹시 뭐 나쁜 짓 할 거 사려고 내렸나 해서. 거기 없는 게 없거든요. 거기서 파는 공구라면 아파트 현관문도 딸 수 있으니. 도둑놈이면 아주 위험할 거 같아서.
눈이 번쩍 뜨였다. 내린 곳이 공구상가라고? 번개처럼 머리에 내리꽂히는 생각. 그건 권진아 부모님을 살해한 도구였다.
식칼로 여러 번 자상을 냈지만 치명상을 입힌 건 둔기로 두부에 입힌 타박상이었다. 두개골이 부서질 정도로 과잉 폭행한 도구는 스패너. 지현우는 식칼에 이어 스패너까지 다시 구입하기 위해 거기서 내린 것이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액셀을 더욱 강하게 밟았다. 다행이라고 할까? 지현우가 스스로 시간을 지연시키고 있다. 스스로 인정할 만한 완벽한 복수의 시나리오를 꾸미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하기 위해서다.
나는 다시 신호가 걸렸을 때 연주와 최영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간단히 통화를 하면 되지만 지금 두 사람은 잠복 중이고 타이밍상 지현우를 마주쳤을 수도 있기에 한 선택이다.
[지현우가 바로 옆 동네인 중앙동 공구상가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 스패너 소지 가능성 농후. 곧 김지혜 씨 댁으로 진입할 것으로 보임. 흉기에 대비 바람.]
문자를 보내자마자 타이밍 좋게 신호가 바뀌고 내 차는 급발진을 일으킨 차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간다.
* * *
최영현과 김연주는 믿을 만한 형사지만 상대는 칼과 스패너를 가졌다. 그래도 두 사람은 그를 잡을 것이다.
하지만 체포 중에 두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 나는 룸 미러로 자꾸만 뒤를 확인했다. 오진규 경감에게 요청한 지원 병력이 뒤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꽤 능력 있는 사람인지 사이렌을 끄고, 소리 없이 따라오는 경찰들. 나는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주는 김지혜의 빌라 두 채 건너에 차를 대고 내렸다.
총을 꺼내자마자 뒤따르는 봉고차와 순찰차에서 형사들과 제복 경찰들이 따라 내린다.
오진규가 작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들린다.
“집 주변 500미터 전방위를 포위한다. 담당 형사들이 있는 사건이니 후방지원만 해.”
이런 사건은 오진규 입장에서 참 귀찮을 것이다. 잡아도 자기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것 하나 없고, 놓치면 욕을 먹는 사건. 하지만 그는 꽤 능숙하고 눈치 빠르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나는 경찰들이 흩어지는 것을 힐끔 본 뒤 총을 들고 빌라로 접근했다.
빌라의 맞은편 주택에 최영현의 차가 주차되어 있다. 나는 차 안에 두 사람이 없는 것을 본 뒤 직감적으로 지현우가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빌라 계단을 뛰어올라 갔다. 아니나 다를까 위에서 최영현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온다.
“저 새끼 잡아!”
나는 얼른 위로 총을 겨눴다. 급박한 발소리가 났지만 아래로 내려오는 발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위로 올라가고 있다. 판단을 내리자마자 총을 내리고 계단을 타고 올라 3층으로 올라서자, 얼굴이 칼에 긁혀 피를 흘리고 있는 최영현이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대신 지구력이 모자란 최영현은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다 따라 올라오는 날 보고 위를 눈짓한다.
“옥상으로 갔습니다!”
그를 스치며 올라가는 도중 상태를 보니 턱과 뺨을 살짝 스친 정도인 것 같다. 하긴 아무리 해병대 출신이라도 현직 형사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건 무리일 거다. 잠깐만, 그럼 누가 쫓는 거야? 설마 연주 혼자 뒤따라 올라간 거야?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물론 그건 연주가 여자라서가 아니다. 연주는 충분히 남자 형사 한 명 몫을 해내는 형사다.
하지만 혼자 흉기를 든 범인을 상대하는 건 위험하다. 4층을 거쳐 5층으로 올라가자, 문이 반쯤 열린 옥상 문이 보인다. 날듯이 옥상 문을 발로 차고 총을 겨눈 나는 곧 황당한 얼굴이 되어 멈칫했다.
옥상 구석에 몰려 있는 지현우.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스패너와 칼, 가방이 바닥에 흩어져 있고 지현우는 연주에게 신나게 처맞고 있는 중이다.
“이 개X끼가, 어디서 형사한테 칼을 휘두르고 지랄이야, 이 씨X 새끼야! 네가 씨X, 염라대왕이랑 하이 파이브를 하고 와야 정신을 차리지, 이 육시랄 새끼가!”
헐, 연주가 욕을 저렇게 잘하는 사람이었나? 지현우는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연주의 주먹과 발을 피해내려 애쓰고 있지만 열 발 중에 여덟 발 이상 목적지에 꽂아 넣는 연주의 주먹이 너무 아픈지 연신 끅끅 신음을 흘리고 있다.
연주는 방어에 치중하고 있는 지현우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후 그의 가슴 위에 올라타 핸드폰을 꺼내 주먹에 쥔다. 헐, 그걸로 때리면 진짜 죽는다고.
나는 빠르게 달려가 연주의 팔을 잡았다.
“연주야!”
“이이! 놔요, 놔!”
“진정해! 김연주!”
“놔! 이 인간 같지 않은 새끼 죽여 버릴 거야!”
내가 누워서 헐떡거리는 지현우를 감시하며 연주를 떼어내자, 그녀는 발버둥을 치며 발악한다.
“아악! 놔! 여자 강간하고, 사람 죽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개까지 죽이는 저런 악마는 죽여야 돼!”
나는 상황에 맞지 않게 헛웃음을 흘렸다. 매번 흥분하거나, 지나치게 몰입하는 날 깨우쳐 주던 연주의 상반된 모습이 생소하면서 재미있기도 하다.
지혜로워 보이던 연주도 보통 사람이구나. 이렇게 흥분할 때도 있고. 하긴, 연주는 상대가 성폭행범이었다는 걸 알고부터 화가 나 있긴 했지. 그래도 지나친 폭행은 징계 사유다.
“자자, 연주야. 일단 진정해.”
“헉! 헉!”
연주가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다. 나는 그녀의 등 뒤에서 팔을 꽉 잡은 채 말했다.
“저런 놈 때리다 징계당하면 너만 손해다, 알지?”
“헉, 헉…….”
휴, 겨우 진정하는 눈치다. 응? 그런데 이 소리는 또 뭐야? 어딘가 퍽퍽 하는 게 떡메 내리치는 소리가 나는데?
연주를 붙잡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뒤늦게 올라온 최영현이 누워 있는 지현우를 두들겨 패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형외과 갈 병원비 내놔, 이 개X끼야! 소중한 얼굴인데! 아오!”
지현우의 싸대기를 날리고 있는 최영현. 우락부락하게 생긴 양반이 생각보다 외모에 신경 쓰는 타입이었던 모양이다.
연주는 지현우가 최영현에게 맞는 걸 보고는 마음이 후련해졌는지 점점 안정을 찾는다. 나는 연주를 내려놓고 최영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만하세요, 경위님.”
“…….”
최영현은 날 힐끔 본 뒤 지현우의 멱살을 잡고 한 방을 더 먹인 후 손을 턴다. 연주를 보며 눈짓으로 안부를 묻는 최영현.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연주에게 눈짓했다.
“잡은 사람이 수갑 채워.”
연주가 움찔 놀라며 얼른 달려와 지현우에게 수갑을 채운다. 수갑부터 채우지 않고 범죄자를 두들겨 팬 것이 뒤늦게 창피했는지 얼굴이 붉어진 연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현우, 체포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