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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113화 (113/328)

살인의 기억 113화

9. 광기(狂氣)(11)

연주는 내 이야기를 듣고 계획을 세우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노트북을 뚫어지게 보기만 하는 연주 앞에 팔짱을 끼고 앉은 지현우가 삐딱한 시선으로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봐요. 사람 패서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를 묻고 있는데 언제까지 시간만 끌 겁니까?

연주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다 노트북 옆에 둔 커피를 붙잡는다. 일부러 손가락을 펴지 않고 친 일회용 커피잔. 그것은 지현우 쪽으로 쓰러지며 검은 액체를 왈칵 쏟는다. 지현우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난다.

-어!

지현우는 옷에 커피가 튀지 않았는지 확인하며 인상을 찡그린다. 그런데 사과를 해야 할 연주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다. 인상을 구긴 지현우가 말했다.

-뭐 하는 겁니까?

연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눈 없어?

-뭐라고?

-커피를 쏟았네. 보이면서 왜 물어?

-…….

커피를 쏟았다는 걸 몰라서 묻냐는 질문. 아는 걸 왜 묻냐 되묻고 있는 것이다. 지현우는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커피를 쏟았으면 사과를 해야 된다는 뜻 아닙니까?

연주가 눈짓하며 물었다.

-옷에 묻었나?

지현우가 자기 옷을 이리저리 확인한 뒤 털어낸다.

-다행히 안 묻었네요.

-그럼 내가 사과해야 할 일이 없지, 커피도 안 묻었는데.

지현우는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머뭇거린다. 하지만 확실히 효과가 있다. 능청스럽게 오리발을 내밀던 원래의 모습을 잃고 흥분하는 모습이 보인다.

-뭐 이런 싸가지 없는 인간이 다 있어? 당연히 이럴 때는 사과를 해야지!

연주가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피해 준 게 뭐 있어야 사과를 하지?

지현우가 거칠게 머리를 긁는다. 확 더 쏘아붙이고 싶은데 그녀 말처럼 피해 입은 사실이 없는 것이다.

지현우는 테이블 위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커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며 인상을 쓴다.

-이거 안 닦을 겁니까?

-난 안 불편해서. 나 원래 커피 자주 쏟아.

-…….

지현우는 발 쪽으로 뚝뚝 떨어지는 커피를 보며 마음에 안 든다는 시선을 던진다.

-휴지라도 주든가. 내가 닦을 테니까.

연주가 노트북 옆에 놓인 티슈 박스를 눈짓한다.

-아까 네 피 닦던 티슈 여기 있네. 쓰든가.

-하, 씨X.

지현우가 한숨을 쉬며 티슈 몇 장을 뽑자, 연주가 말했다.

-스톱.

지현우가 티슈를 뽑다 말고 노려본다.

-또 뭐요?

-경찰서 비품은 다 국민 세금이다. 한 장이면 충분해. 그거 놓고 한 장만 가져가.

-씨X, 별!!!

지현우가 티슈 몇 장을 확 뽑으며 말했다.

-그래, 말 잘했네! 너희 경찰들 우리가 낸 세금으로 먹고살지? 이것도 결국 내가 낸 세금으로 산 거야. 내가 낸 세금으로 산 비품 내가 쓴다는데 뭐!!

연주가 빙긋 웃으며 노트북에 기재된 기본 정보를 눈짓한다.

-지현우, 24세. 군대 가기 전에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한 것을 제외하면 경제활동 없었음.

지현우가 눈살을 찌푸린다.

-그게 뭐? 나 아직 학생인데 당연하지!

연주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 아직 국가에 세금 한 푼 안 내본 학생이지. 그거 네 돈 아니다. 티슈 내려놔.

지현우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입술을 달싹인다. 하지만 연주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다. 아직 자기 손으로 번 돈에 대한 세금을 내본 적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모니터실에서 상황을 지켜본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연주 장난 아닌데?”

관우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원래 연주가 저런 거 잘합니다. 실실 열 받게 하는 거 제대로 하면 부처님도 열 받게 할 수 있는 녀석이거든요.”

헐, 자애의 상징인 부처님을 열 받게 하려면 스킬이 얼마나 좋아야 되는 거야? 아무튼 이 분야는 나보다 연주가 훨씬 낫다는 걸 인정한다. 아주 능청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연주와 지현우의 유치한 말싸움을 지켜보던 관우가 물었다.

“근데, 진짜 이 방법으로 흔들 수 있는 겁니까, 팀장님?”

나는 팔짱을 끼고 취조실을 보며 말했다.

“지현우는 전형적인 분노형 범죄자다.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는 방법을 몰라. 보통 사람은 화가 나더라도 자신이 할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생각해 보고 움직인다. 하지만 지현우는 그렇지 않아. 뒤가 어떻게 되든 일단 내 속의 화를 풀고 본다.”

관우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음, 데이트 폭력으로 안 끝나고, 권진아 씨 부모님을 살해하는 방법까지 쓴 것이 자기 화를 다스리지 못해 그런 것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게다가, 지현우는 권진아에게 지속적인 사과를 요구했어. 폭행을 하는 도중에도 말이야. 자신이 사람을 때려 시작된 일이지만 모든 원망을 상대에게 던지는 습성이 있는 거지. 권진아를 때리고, 조롱하는 내내 사과하라고 강요했으니까.”

“…….”

“모든 것은 너로 인해 생긴 일이다. 세상에 네가 없었다면, 혹은 네가 내게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이런 논리가 바로 지현우가 주장하는 생각이지.”

“…….”

꼬박꼬박 답하던 관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잠깐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건가? 취조실을 보고 있던 내가 관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상한 눈빛을 던지며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관우가 보인다.

“왜?”

“…….”

“뭐?”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응?”

“지현우가 권진아 폭행 시에 지속적으로 사과를 요구했다는 것. 자기 잘못을 상대에게 뒤집어씌워 원망한다는 것 말입니다.”

“…….”

“지현우는 오리발 내밀고 있고, 권진아는 혼수상태인데 팀장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젠장, 실수했다. 우리는 사건의 흐름만 알고 있을 뿐이다. 지현우가 범인이라는 확신이 있지만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는 상태. 게다가 지현우의 자백은커녕 혼수상태인 생존자 덕분에 목격자 진술도 얻어내지 못한 상태다.

모든 것은 내가 읽은 기억에 의존해 알고 있는 것. 즉, 나만 아는 것을 입으로 말해 버린 것이다.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건 이제 지겹다. 언제까지 이럴 때마다 말문이 막히고 싶진 않았던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정명훈 씨.”

“예? 그게 누구였죠?”

“그때 지명 대학교 학생들 왔을 때 내가 진술 땄던 학생 중 하나다.”

“아, 그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요?”

“수업 시간에 권진아 씨가 화장실을 다녀오다 지현우를 마주치고, 거기서 1차 폭행을 당한 뒤 지현우의 집에 끌려가 2차 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다.”

“네, 그건 들었어요. 나중에 친구들이 지현우 자취 집에 가서 권진아 씨를 구했다고.”

“그래, 그때 지현우가 폭행을 하면서 계속 사과를 요구했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다행히 관우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취조실을 본다. 후, 넘어갔구나. 내가 뜨끔한 속을 진정시키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관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현우를 바라본다.

“쓰레기 새끼. 지 잘못을 어디 뒤집어씌울 곳이 없어서 여자 친구한테.”

휴, 다행이다. 의심이 풀렸구나.

연주는 계속해서 이죽거리며 지현우를 열 받게 하고 있다. 내가 저 안에 있었다고 해도 그녀보다 잘할 자신이 없을 정도로 잘해주고 있다. 점점 지현우의 언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들린다.

-경찰이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굴어? 어? 이거 사과하는 게 그렇게 싫어?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 깔끔하게 넘어갈 거 아냐? 내가 씨X, 이거 가만있나 봐! 나가서 기자들 불러서 인터뷰할 거야!

연주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어, 해. 기자들 부르는 건 네 마음이지. 근데 아마 후드 눌러쓰고 손목에 수갑 차고 하게 될 거야.

-뭐? 하! 내가 어이가 없어서! 증거 있냐고, 증거!

음, 그렇지, 증거. 지현우에게 자백을 받는 건 그렇다 치고 물증이 있어야 한다. 나는 관우에게 물었다.

“지현우가 탄 버스가 어느 휴게소에 정차했지?”

“서울에서 대전 가는 버스는 휴게소에 안 들른다고 합니다.”

관우는 이미 조사를 했는지 바로 답한다. 휴게소가 아니라면 결국 버스를 타기 전이나, 내린 후에 흉기를 버렸다는 뜻이다.

“버스 타기 전 CCTV 영상 다시 보자.”

고속버스터미널에 검은 스포츠 가방을 든 지현우가 보인다. 후드와 모자,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지만 우리는 그가 지현우라는 것을 안다. 지금 취조실에 앉아 있는 지현우와 같은 옷차림이기 때문이다.

왼쪽 어깨에 메고 있는 스포츠 가방을 가만히 바라보는 관우가 말했다.

“무게가 가늠이 안 돼요. 벌써 버리고 온 건지, 아닌지 말입니다.”

이미 버리고 탔으면 권진아의 집에서 고속버스터미널까지의 동선을 모두 뒤져야 한다. 음, 어떻게 해야 되지?

관우는 CCTV를 빤히 보다 어느 순간 움찔 놀란다.

“어?”

뭔가 발견해 낸 건가? 관우는 영덕에서 수많은 배 중 단 하나의 배 위치가 바뀐 것도 알아낸 녀석이다. 이번에도 뭔가 발견해 낸 걸까?

관우는 CCTV를 돌렸다 재생했다 여러 번 반복하더니. 급히 권진아의 아파트 CCTV를 틀어본다.

배관 수리공이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계단 쪽으로 올라가는 영상이다. 그리고 하얀 바지로 갈아입은 배관 수리공이 다시 내려오는 영상도 확인한다. 뭘 하는 걸까?

복장이 달라진 건 하얀 바지뿐이다. 검은색 모자, 회색 후드, 검은 마스크에 검은 스포츠 가방을 어깨에 멘 것까지 모든 것이 같다.

하지만 관우는 심각한 얼굴로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나는 관우의 집중력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살짝 물러났다.

하지만 얼굴 상처를 치료받고 들어온 최영현이 잔뜩 열 받은 얼굴로 문을 쾅 열고 들어온다.

“이 씨X놈 어디 있어.”

나는 열 받은 얼굴로 지현우를 찾는 최영현에게 급히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관우가 뭔가 하고 있다는 걸 본 최영현은 날 힐끔 본 뒤 고개를 끄덕인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취조실 안에서 지현우와 말싸움을 하고 있는 연주의 목소리만 들리는 모니터링실.

마침내 관우가 두 가지 화면을 캡처한 뒤 우리를 바라본다. 최영현이 들어온 것을 몰랐는지 그를 보고 눈썹을 꿈틀하는 관우.

“오셨어요?”

최영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인사는 됐고. 뭐 발견했어?”

관우가 바퀴 달린 의자를 쭉 밀며 모니터 앞 자리를 내어준다.

모니터에 두 가지 화면이 떠올라 있다. 하나는 하얀 바지를 입고 급히 1층으로 내려오고 있는 지현우의 모습. 나머지 하나는 터미널에서 찍힌 지현우의 모습이다. 둘 다 확대되어 있다.

최영현과 내가 허리를 숙여 모니터 속의 지현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관우 녀석이 왜 이걸 보여주는 건지 모르겠다.

성격 급한 최영현이 먼저 물었다.

“이게 왜?”

관우가 다시 의자를 끌고 와 지현우의 가방을 손톱으로 툭툭 친다.

“여기 가방 왼쪽 아래 보세요.”

가방 왼쪽 끝에 하얀색 그림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 무슨 그림인지 모르겠지만 가방에 그려진 무늬인 모양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림이 힌트라는 생각에 다른 그림을 보았다. 같은 각도에서 찍힌 가방. 분명 같은 검은색 가방이었지만 하얀 그림이 사라졌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관우를 바라보았다.

관우가 이를 드러내며 엄지를 든다. 최영현도 이를 감지하고 여러 번 사진을 확인한 뒤 이를 갈았다.

“저 씨X 새끼. 가방 바꿨구나.”

비슷한 가방을 계속 들고 다닌 시늉을 한 것이다. 관우는 두 화면을 내린 후 다시 화면 하나를 띄운다.

권진아의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고 있는 지현우의 뒷모습. 주차장 쪽에서 나오는 지현우의 모습을 확대하는 관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빙고.”

지현우가 들고 있는 가방에 하얀 그림이 없다. 이 대단한 자식. 이걸 발견하다니. 나였으면 죽어도 몰랐을 거다. 관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흉기가 든 가방은 아직 권진아 씨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겁니다.”

최영현이 얼른 뛰어나가며 말했다.

“저 씨X 새끼! 내가 꼭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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