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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114화 (114/328)

살인의 기억 114화

9. 광기(狂氣)(12)

나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관우를 보며 말했다.

“너 이쪽 분야에선 천재구나?”

관우는 씩 웃다가 말했다.

“팀장님 발끝도 못 따라가죠. 저도 팀장님처럼 진술이나 현장 상황 보고 딱딱 퍼즐 맞춰 범죄자가 어떤 놈인지 추측하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잔기술밖에 없어서 아쉽습니다.”

음, 그건 내 능력이 아니야. 내 진짜 능력은 기억을 읽는 거다. 그게 없었으면 난 너보다 못한 형사였을 거야. 그만큼 넌 대단한 능력을 가진 거다, 녀석아.

우쭐해질 만도 한데 관우는 흉기가 든 가방을 찾으러 간 최영현을 돕기 위해 권진아의 아파트 내에서 잡힌 지현우 영상 분석을 시작한다. 여러모로 참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이제 흉기가 든 가방이 나오고, 피 묻은 흉기가 나오면 증거 확보가 가능하다. 물론 최영현이 그걸 찾아온다는 가정하에.

나는 최영현을 돕기 위해 관할 파출소에 지원을 요청해 수색 인력을 파견했다. 그러다 지현우가 남긴 증거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스패너, 칼, 청 테이프.’

아무리 씻어냈다고 해도 DNA는 남는다. 특수약물로 꼼꼼하게 씻지 않는 이상 루미놀 반응이 나올 것이고, 혈흔에서 피해자들의 DNA가 나오면 끝이다. 하지만 만약 못 찾는다면? 또 뭐가 있었지?

지현우가 현장에 남긴 것들.

두 구의 시신. 그리고 밀가루. 잠깐만 밀가루?

나는 미간을 좁히고 시신에 밀가루를 뿌리던 지현우를 떠올렸다.

‘자기가 가져온 밀가루가 모자랐다.’

한 구의 시신 분량밖에 안 되는 밀가루. 그는 어머니의 시신이 있던 화장실에 밀가루를 뿌린 뒤, 주방을 뒤져 다른 밀가루를 찾았다.

그때 살림하는 집에 밀가루가 없다고 권진아 어머니 욕을 했었다. 주방에서 찾은 밀가루를 아버지 쪽 시신에 뿌린 후…… 빈 밀가루 봉투를…….

나는 눈을 감고 다시 기억을 떠올렸다. 지현우는 밀가루를 뿌린 후 바지에 묻은 피를 확인하고 화를 냈었다. 그리고 바지를 갈아입은 후에…….

생각을 떠올린 나는 얼른 지현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바지.

나는 재빨리 취조실로 넘어가 문을 벌컥 열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연주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던 지현우가 날 보며 으르렁거린다.

“당신은 또 뭐야?”

나는 지현우의 바지를 가만히 바라보다 연주에게 물었다.

“KCSI로 소지품 보낼 때 몸수색했어?”

“네, 팀장님.”

당연히 했을 것이다. 주머니도 다 뒤졌을 것이다. 나는 다시 지현우를 바라보았다. 뭘 보냐는 얼굴로 당장 시비를 걸 것 같은 표정의 지현우. 연주 때문에 한참 열이 받아 더 그런 모양이다.

나는 그를 위아래로 본 뒤 말했다.

“지현우 씨.”

“뭐?”

“바지 벗어요.”

“……?”

지현우는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뭐? 미친 건가, 이 경찰서는 도대체 제대로 된 인간이 한 명이 없어? 방금 뭐라고 했어, 바지를 벗어? 여기가 무슨 유태인 학살했던 가스실이야? 인권도 없어, 여긴?”

연주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 팀장님 그건 좀…….”

나는 말없이 지현우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가 가까워지자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한다.

나는 눈으로 그의 바지를 보았다. 권진아의 집으로 들어갈 때는 몸에 딱 맞는 검은색 바지를 입었었지만 지금은 펑퍼짐한 하얀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내가 바지춤으로 손을 가져가자, 지현우가 신경질적으로 내 손을 쳐낸다.

“만지지 마, 씨X 새끼야!”

지현우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금세 한 방 날릴 기세로 으르렁거린다.

“아무리 대한민국 인권이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취조실에서 바지를 벗겨? 제정신이야, 너? 서장 나오라 그래, 이 새끼야!”

나는 연주가 반쯤 쏟은 커피잔을 보았다. 아직도 반 정도 남은 커피. 나는 잔을 들고 그대로 지현우의 바지에 뿌렸다.

“야이!!!”

지현우는 피하려고 했지만 내 쪽이 빨랐다. 하얀 바지가 금세 검은 커피로 물든다. 연주가 놀라 소리친다.

“티, 팀장님!”

지현우가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

“너 이 개X끼! 형사면 이래도 돼? 나 이거 고소할 거야, 씨X놈아!”

나는 가만히 지현우를 바라보다 말했다.

“연주야.”

“네?”

“숙직실 가서 아무 바지 하나 가져와. 내가 실수를 했네. 옷 갈아입혀 드려야지. 인권이 있는데.”

“…….”

지현우가 바지를 털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한다.

“아, 씨X!!!!!!!!”

나는 연주에게 얼른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연주가 마지못해 바지를 가지러 나가자, 지현우가 눈을 부라리며 내 이마를 검지로 민다.

“제정신 아니지, 너? 어? 미친 새끼 아냐, 이거?”

나보다 한참 어린놈이 내 이마를 검지로 밀며 욕을 한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말을 해, 말을 이 새끼야. 벙어리야? 사과를 하라고, 이 씨X놈아!”

“…….”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물론 매우 냉소적인 표정으로 썩은 미소를 지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표정을 본 지현우의 얼굴에 분노의 불길이 피어오른다.

“이 개X끼가!”

일부러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지현우가 주먹을 날린다. 아무리 해병대 출신이라도 일반인이다. 특전사도 아닌 일반 병 출신의 남자 주먹을 못 피할 내가 아니지만 나는 그대로 그의 주먹을 맞았다.

퍼억!!

일부러 뒤로 과장되게 튕겨져 나갔다. 지현우는 자기 주먹을 바라보며 씩 웃는다. 역시 자기 주먹은 형사에게도 통한다고 생각하고 우쭐해진 모양이다.

나는 소매로 입가를 훔치며 다시 몸을 바로 세웠다. 지현우는 달려와 내 멱살을 잡고 말했다.

“어때, 내 주먹맛이? 한번 맞아보니 정신이 드냐?”

나는 피식 웃었다. 실제로 별로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웃음을 본 지현우가 다시 와락 인상을 구기며 멱살을 쥔 채로 주먹을 날린다.

“이 개X끼가 얼마나 처맞아야 정신을 차리려고!”

주먹이 또 날아온다. 슬쩍 힘을 흘려 과장되게 고개를 획 돌리며 맞아줬다. 이번에는 연속으로 주먹이 날아온다. 두 번째 주먹도 힘을 흘리되 과장된 몸짓으로 세게 맞은 척 옆으로 비틀거린 나.

지현우가 다시 달려와 내 멱살을 붙잡고 일으킨다.

확실히 분노 조절에 문제가 있다. 여기가 경찰서 취조실이라는 건 이미 잊어버린 모양이다. 화가 이성을 잡아먹어 버린 것이다. 지현우가 내 멱살을 잡고 다시 주먹을 쥐며 말했다.

“형사라는 새끼가 싸움을 이렇게 못해?”

나는 다시 피식 웃었다. 지현우는 다시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자꾸 처웃어? 이빨 다 부숴줄까?”

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어이.”

“뭐, 새끼야.”

“대가리에 똥만 찬 새끼야. 상황 파악이 안 되냐?”

“뭐……?”

나는 모니터링실과 연결된 거울을 눈짓했다.

“영화나 드라마 봐서 알지? 저 뒤에 형사들 있는 거.”

지현우가 거울을 본 뒤 다시 날 보며 으르렁거린다.

“그래서 뭐!!!”

내 멱살을 단단히 쥐는 지현우. 나는 내 목을 움켜쥔 지현우의 손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취조실에서 형사가 처맞고 있는데 왜 저기 있는 형사들이 안 움직이는지 모르겠냐?”

지현우가 움찔거린다. 화가 나서 앞뒤 안 가리고 행동했지만 내 말을 듣고 보니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나는 지현우가 멱살을 잡은 손목을 움켜쥐고 말했다.

“지금부터 정당방위다.”

“어억!!”

나는 지현우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왼쪽 발목을 찼다. 손이 잡힌 상태에서 몸의 균형을 잃은 지현우가 비틀거리는 힘을 이용해 손목을 빙글 돌리자,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고 바닥에 쓰러지는 지현우.

나는 일부러 그런 지현우와 함께 바닥에 쓰러지고 틈을 내줬다. 지현우는 당황했지만 내가 우물쭈물하는 틈에 내 위로 타고 오른다.

“이 개X끼가!”

지현우가 내 위에서 주먹을 내지른다. 나는 그의 주먹을 가볍게 피한 후, 그의 겨드랑이로 머리를 밀어 넣은 후 자세를 반전시켰다. 이제 내가 그의 위에 있다. 몸이 깔린 지현우가 몸을 버둥거리며 난동을 부린다.

“놔! 이 새끼야, 비켜, 비키라고!”

“가만있어!”

나는 CCTV를 힐끔 본 뒤, 최대한 그를 진정시키려는 목적임을 보였다. 아래에 깔린 지현우가 주먹을 날렸지만 나는 주먹질을 하지 않고 그의 옷을 붙잡으며 말렸다.

그리고 매우 고의적으로 그의 바지를 붙잡았다. 지현우가 그런 내 가슴을 발로 차며 뒤로 확 밀어내자, 나는 그 힘을 버티지 않고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지현우가 상체를 벌떡 세우며 외쳤다.

“넌 죽었다, 이 새끼…….”

지현우가 말을 하다 말고 넘어진 날 본다. 내 웃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현우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자신의 하반신을 본다. 날 밀어 넘어뜨릴 때 바지 옆을 붙잡고 있던 나는 그의 힘을 이용해 트레이닝복 바지를 찢어버렸다. 내 손에 찢어진 바짓단이 들려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지현우가 허둥지둥 남은 바지로 속옷이 드러난 부분을 감춘다. 하지만 나는 봤다. 그의 바지 속에 있던 비닐 봉투를.

나는 천천히 일어나 찢어진 바지 옷감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CCTV를 힐끔 봤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압하는 과정에서 옷이 찢어졌네요. 사과드립니다.”

지현우는 앉은 자세로 인상을 구긴다.

“뭐?”

나는 지현우의 가랑이 쪽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바지 속에 뭐가 있네요?”

“…….”

“몸수색 시에 거긴 안 봤던 모양입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라텍스 장갑을 꺼내 손에 착용한 뒤 지현우에게 다가갔다. 그는 사력을 다해 발버둥 치며 뒤로 물러난다.

“내 몸 만지지 마, 이 변태 새끼야!”

“하하, 저 변태 아닙니다. 걱정 마세요.”

나는 방의 모서리까지 물러난 지현우의 앞에 섰다. 이 각도에선 CCTV로 내 뒷모습만 보일 것이다. 나는 지현우의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속삭였다.

“그거 권진아 씨 댁에서 가져온 밀가루 봉투 맞지?”

“…….”

나는 순간적으로 지현우의 무릎을 잡고 번개처럼 봉투를 낚아챘다. 지현우가 재빨리 손을 내밀어 봉투를 빼앗으려 했지만 나는 발로 그의 가슴을 밀어 다시 넘어뜨렸다.

내 손에 들어온 밀가루 봉투. 보통의 마트에서 살 수 있는 밀가루 봉투였다.

나는 구겨진 봉투를 바로 편 뒤 웃었다.

“종이 봉투가 아니라 비닐 봉투구나.”

나는 증거물 봉투를 꺼내 밀가루 비닐을 넣은 후 지현우 앞에서 흔들었다.

“이런 봉투에는 지문이 잘 남지. 권진아 씨 어머니 지문이 분명히 남아 있을 거야. 그렇지?”

지현우는 눈을 크게 뜨고 증거물 봉투를 노려보고 있다. 나는 증거물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후에 말했다.

“흉기가 든 가방도 어디 있는지 알아. 지금 다른 형사가 찾으러 나갔고.”

지현우가 으르렁거린다.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몰라, 난.”

“권진아 씨 아파트 단지, 새끼야.”

지현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진다. 씩 웃은 나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넌 끝났다, 지현우.”

지현우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른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덤벼든다.

“이이이이!! 개새끼야아아아!!!!!!”

나는 몸으로 덤비는 그를 살짝 피한 후, CCTV를 보며 말했다.

“지현우 씨. 계속 난동을 피우시면 제압하겠습니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이미 흥분해 이성을 잃은 지현우가 다시 온몸으로 태클을 하려 한다. 나는 멧돼지처럼 돌진하는 지현우를 보며 손가락을 풀었다. 그리고 어깨로 내 복부를 들이받는 지현우를 보며 씩 웃었다.

“자, 이제부터는 합법입니다.”

잠시 후 모니터링실.

지시대로 숙직실에 돌아다니는 트레이닝복을 가져온 연주가 취조실 안 상황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친다.

“저, 저게 뭐야! 관우야! 뭐 했어, 당장 말려야지!”

UFC 경기를 관람하듯 테이블에 발까지 올리고 구경하던 관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라, CCTV 봐도 절대 팀장님 징계 못 때린다. 저거 다 합법적 자기방어야.”

“어……?”

“너도 와서 구경해, 지현우 걸레 되는 거. 킬킬. 와…… 우리 팀장님 진짜 무섭다. 계산된 도발. 크…….”

처음부터 끝까지 상황을 지켜본 관우와 달리 상황을 모르는 연주는 그저 걱정스럽게 취조실을 바라본다. 그 안에서 점점 걸레로 변하고 있는 지현우를 보며.

물론 그녀의 걱정은 지현우의 안위가 아닌 혹시나 도경이 징계를 받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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