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122화 (122/328)

살인의 기억 122화

11. 주유소 습격사건(5)

사실 꽤 오래전부터 고민하던 일이 있다.

내가 남의 기억을 보는 것의 매개는 바로 악의(惡意)다. 이제는 나도 그것을 안다.

사건을 배당받은 직후 누구인지 모르는 범인에 대한 막연한 악의를 가져본 적이 있다. 속으로 오만 쌍욕을 퍼붓고,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을 읽는 데 실패했다. 나는 아마 사건을 수사하며 진정으로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악의를 느낄 때만 능력이 발동되는 모양이다. 신은 마치 내가 억지로 떠올리는 악의를 간파하고 있다는 듯 가식적인 악의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빙글빙글 도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땅을 파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스스로 몸을 들썩거리며 울고 있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눈을 뜨자마자 속으로 엄청 놀랐다. 내 눈에 보이는 스스로의 몸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다.

그리고 나는 알몸이다.

손은 뒤로 묶여 있고, 발목도 묶여 무릎을 꿇고 있다.

‘읍…… 읍읍…….’

내 입에 재갈이 물려져 있다.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며 재갈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어찌나 꽉 묶었는지 재갈은 풀리지 않는다.

한쪽 시야가 붉게 물들어 있고, 머리는 축축하다.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곧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다.

나는 죽음의 순간에 놓인 손은정 씨 몸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내 양옆에 두 명의 남자가 서 있다. 그리고 저 멀리 누군가가 삽으로 땅을 파고 있다. 나는 떨리는 몸을 버둥거리며 사정을 했다.

‘읍!! 읍읍읍!!!’

하지만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알 수 없는 신음일 뿐이다. 내 옆에 서 있던 둘 중 하나가 내 머리채를 붙잡고 바닥에 팽개친다.

‘시끄러! 개도 아니고 다 큰 년이 낑낑대고 있어?’

나는 옆으로 엎어져 눈물을 흘렸다. 도저히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은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어찌 삶에 대한 미련을 놓겠는가? 알몸으로 모로 쓰러진 내 눈앞에 부모님과 다친 동생이 보였다. 어린 시절, 가난했지만 행복한 웃음을 놓지 않았던 우리 가족들 생각이 난다.

나는 지금 엄마가 무척 보고 싶다.

내 눈에 들어온 전경. 나는 지금 실내에 있다. 바닥은 흙이고, 꼭 공장이나 무언가를 저장하는 공간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안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보이는 건 천장에서 내려오는 미끄럼틀 같은 물건. 도대체 어디 쓰는 물건인지 모르지만 미끄럼틀은 천장에 연결되어 있다.

알 수 없는 하얀 가루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물건들이 없어 뭣 하는 곳인지 전혀 모르겠다.

모로 쓰러진 내 눈에 멀리서 땅을 파고 있던 남자가 보인다. 꽤 깊이 팠는지 남자의 하반신이 보이지 않는다. 땀을 뻘뻘 흘리던 남자가 삽을 바닥에 꽂은 후 말했다.

‘이 정도면 됐다.’

더웠는지 웃통을 벗은 남자. 그의 몸에 문신들이 가득하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뱀 문신이다. 왼쪽 목에서부터 뱀의 머리가 시작되고 몸통을 빙빙 둘러 허리까지 내려온 뱀의 꼬리.

하지만 문신은 하다 만 것처럼 속이 텅 비어 있고 겉의 테두리만 남아 있는 조잡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 정중앙에 일본어로 된 문신이 있다.

‘さいごまで.’

황지영 사건에 이어 두 번째로 보이는 일본어다. 나는 사력을 다해 문신을 머릿속에 밀어 넣었다. 글자와 의미를 알지 못하니 그림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다.

나는 바들바들 떨며 내게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팔뚝에도 문신이 있다. 반팔을 입으면 보이지 않는 선까지 내려온 문신에도 알 수 없는 그림들이 잔뜩 그려져 있다. 언뜻 해골 같기도 하고, 가시가 잔뜩 있는 가지들 같아 보이기도 하는 문신들.

남자는 약간 마른 체형이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몸으로 내 앞에 쪼그리고 앉은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가자.’

‘읍읍!! 으으으!! 읍읍!!!’

나는 빌고 싶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빌어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내 손은 등 뒤로 묶여 있어 어깨만 들썩일 수밖에 없다.

남자는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자기 귀에 손을 대며 말했다.

‘뭐? 뭐라고 하는 거야?’

‘읍!! 으읍!!’

‘에이씨, 야, 재갈 잠깐 풀어줘 봐.’

옆에 있던 남자들이 재갈을 풀어준다. 나는 턱으로 내려온 더러운 수건을 몸으로 털어내며 울부짖었다.

‘아저씨! 아저씨 죄송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돈 더 드릴 테니 제발 살려주세요!’

마른 문신 남자는 겨우 그 말이었냐는 듯 어이없게 웃으며 말했다.

‘일찍 말하지 그랬냐? 이제 늦었어.’

‘아저씨, 제발!’

‘돈 더 있어?’

‘가, 가게 정리하면 더 구할 수 있어요.’

‘지랄, 언제 가게 팔릴 때까지 기다려? 현금 더 있냐고.’

‘지난번에 드렸잖아요!’

‘뭐, 구백만 원?’

‘네, 그거 이달이랑 다음 달에 집에 보내야 되는 돈이었어요. 그게 전부예요, 정말이에요!’

‘진짜야?’

‘네! 진짜예요!’

‘응, 믿어줄게.’

남자는 일어난 후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후 말했다.

‘야, 이년 끌고 와.’

내 옆에 있던 남자가 내 머리채를 꽉 붙잡고 질질 끈다. 끌려가던 나는 머리가 통째로 뽑혀 나가는 아픔에도 일단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아저씨! 믿어준다면서요! 아악!!!’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낸 남자가 불을 붙이며 씩 웃는다.

‘어, 믿어. 그러니까 이제 갈 때야. 더 뽑아 먹을 게 없는데 왜 살려둬?’

‘아악!!!’

‘야, 잘 밀어 넣어. 눕히지 말고 새끼야. 꼿꼿하게 세워봐.’

나는 날 묻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 안으로 내던져졌다. 내가 쓰러지자 두 남자가 구덩이 안으로 들어와 날 일으켜 세운다.

문신 남자는 구덩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씨X, 더 파야 돼? 이년은 여자가 왜 이렇게 키가 크고 지랄이야, 힘들게.’

나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게 내 마지막 순간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저씨…… 흑흑, 아저씨……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문신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히죽 웃는다.

‘뭘 잘못했는데?’

‘다요, 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흑흑…….’

‘너 잘못한 거 없을걸? 야, 이년 잘못한 거 있냐?’

주변에 있던 녀석들이 킬킬거리는 것이 들렸지만 난 지금 그런 조롱 따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다.

‘아저씨, 아저씨…… 제발 살려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 할게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네?’

문신 남자는 씩 웃더니 말했다.

‘야, 이년 이거 일단 무릎까지 묻어봐.’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내 발 쪽으로 흙을 쓸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발로, 나중에는 삽으로 파냈던 흙을 끌고 내려와 묻는다. 차가운 모래가 내 발부터 시작해 무릎까지 차오른다.

나는 발버둥을 치다 또 한 대를 맞았다. 쓰러지고 싶었지만 한 명이 등 뒤로 묶인 내 팔을 붙잡고 강제로 일어선 채로 버티게 한다.

남자들이 내 무릎이 닿는 곳까지 흙으로 덮은 후 발로 꾹꾹 누르는 것이 느껴진다. 문신 남자는 주변을 돌며 높이를 가늠해 본 뒤 욕을 뱉는다.

‘씨X, 안 되겠네. 더 파기는 귀찮고. 야 삽 줘봐.’

한 명이 삽을 가지고 오며 물었다.

‘어쩌게?’

‘뭘 어째, 모가지 꺾어서 밀어 넣으면 되지.’

삽을 든 문신 남자가 구덩이 아래로 뛰어내린다. 나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뒷걸음질을 치려 했지만 단단히 묻힌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 아아!!!’

절규하고 울었지만 남자는 삽을 단단히 쥔 뒤 말했다.

‘한 방에 안 가면 존나 아프다?’

나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남자 손에 든 삽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리고 그 삽이 휘둘러지는 동시에 내 기억은 끊어졌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세상이 다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과장님, 왜 그러세요?”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날 부르는 소리. 하지만 나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마지막 순간을 보던 손은정의 기억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운전대에 머리를 박았다. 극심한 두통에 눈을 질끈 감은 나는 신음을 흘렸다.

“으으……. 젠장.”

밖에서 연주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나는 연주를 안심시키는 것보다 급하게 할 일이 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수첩을 꺼낸 후 글을 썼다. 아니 글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그림을 그렸다는 쪽이 옳다.

극심한 두통 때문에 삐뚤삐뚤하긴 했지만 기억 속에 있던 글자와 최대한 비슷하게 그림을 그린 후에 겨우 숨을 몰아쉰다.

“헉, 헉헉…….”

허리를 펴고 숨을 토해냈을 때가 되어서야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연주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차 문을 열고 손을 들었다.

“나 괜찮다.”

연주가 차 문을 벌컥 열며 날 살핀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멍하게 초점 없이 먼 곳만 바라보다 몸을 덜덜 떨고 손바닥을 막 비비고 그러시던데.”

제길, 손은정의 기억을 보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살려달라고 빌었던 모양이다. 연주가 내가 손에 꼭 쥐고 있던 펜던트를 힐끔 보며 말했다.

“그거 증거물이에요?”

나는 손을 펴 펜던트를 물끄러미 보았다. 증거물이었으면 KCSI가 걷어갔을 것이다. 지문을 떠도 아무것도 안 나온 물건이라 그냥 뒀겠지.

“아니.”

연주는 날 한참 관찰하다 말했다.

“KCSI 준비가 끝나서 저도 따라간다고 보고하려고 왔어요.”

“…….”

“과장님?”

나는 연주를 올려 보며 말했다.

“연주야.”

“네, 과장님.”

“현 시간부로 실종사건을 살인사건으로 전환한다.”

연주의 눈이 커진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손은정은 이미 죽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창고 안에서. 우리는 이제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는 강도 집단을 수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악독한 범죄 단체를 수사해야 한다.

“KCSI로 가서 일단 단서 다 긁어와. 관우한테 연락해서 CCTV 받은 후에 즉시 내게 오라고 해.”

연주는 놀란 얼굴로 날 멍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사, 살인사건이라고요?”

그녀 입장에서는 갑자기 무슨 이야기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보았을 때 납치된 손은정이 사망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그녀 스스로도 할 수 있다.

연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사건 전환하겠습니다.”

연주가 허리를 숙여 보인 후 KCSI와 떠난 후 난 한참 차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손은정의 마지막 기억. 나는 기억 그 자체보다 그녀가 느꼈던 죽음의 공포를 무방비 상태로 느끼고 아직도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다.

남자인 나도 이렇게 겁이 나는데 혼자 있었을 그녀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차 주변에 있던 바위에 앉아 잠시 그녀 생각을 하다 보니 산 아래에서 관우가 뛰어올라 오는 것이 보인다. 가방에 뭔가 한가득 지고 올라오는 걸 보니 CCTV를 몽땅 긁어온 모양이다.

“과장님! 살인사건 전환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예요?”

나는 바윗돌에서 일어나며 바지를 털었다. 헐레벌떡 뛰어온 관우를 본 나는 먼저 수첩을 내밀었다.

“이거 읽어봐.”

관우는 영문 모를 얼굴을 하면서도 내 수첩을 받아 든 후 내용을 확인한다. 삐뚤삐뚤한 글씨라 한참을 본 관우가 날 보며 물었다.

“이게……?”

“읽을 수 있겠어?”

관우는 나와 수첩을 번갈아 보다 수첩을 내민다.

“사이고마데(さいごまで)라고 써 있습니다.”

역시 일본어 능력자다.

“무슨 뜻이지?”

관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최후까지, 마지막까지 뭐 대충 이런 뜻입니다.”

마지막까지. 최후까지. 그 단어를 가슴에 새긴 놈이 범인이다. 그래, 너 이 새끼 말 잘했다. 최후까지, 마지막까지 널 쫓아 반드시 잡아준다, 이 짐승 새끼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