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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123화 (123/328)

살인의 기억 123화

11. 주유소 습격사건(6)

내가 본 것을 정리해 보자.

일단 나는 범인의 얼굴을 보았다. 정확히는 범인 중 셋의 얼굴이다.

맨 먼저 가장 강렬하게 남은 남자. 그는 손은정의 머리를 삽으로 후려쳤다. 그로 인해 죽었는지, 혹은 기절 후에 생매장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기억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범인은 짧은 머리에 쭉 찢어진 눈. 육식을 좋아하는지 웃을 때 보이는 앞니가 고양이과 동물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편이었다.

피부색은 약간 검은 편에 온몸에 조잡한 문신이 가득했으며 마른 체격. 키는 약 170㎝ 정도 된다.

다음으로 문신.

그는 사이고마데(さいごまで)라는 일본어 문신을 가지고 있다. 또 목 부근에서 시작해 허리까지 오는 뱀 문신과 오른쪽 어깨에 천지신명(天地神明)이라는 한자를 새겨 놓았다.

손은정의 양옆에 있다가 구덩이로 던지거나 때렸던 두 남자. 그들 중 한 명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이다. 얼굴에는 큰 특징이 없었고 붉은색 맨투맨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또 한 명은 삭발을 했다. 원래 대머리는 아니고 반삭발을 한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오른쪽 귀 아래에 작은 문신이 있었는데 어떤 것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 기억 속에서는 손은정을 때리지 않았다. 구덩이에 밀어 넣을 때도 비교적 우악스럽지 않게 팔만 밀어 넣었다.

인상은 평범했는데 생각보다 어려 보였다. 동안인지 진짜 어린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언뜻 십 대 같아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장소.

나는 수첩을 꺼내 내가 보았던 장소를 그려보았다. 그림에 워낙 재주가 없는 터라 삐뚤삐뚤한 그림.

관우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날 이상한 눈으로 보며 물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과장님?”

“…….”

잠깐 방해하지 말아봐, 인마. 지금 중요한 순간이라고. 기억이란 게 시간이 지나면 왜곡되고 틀어지니 온전한 기억일 때 옮겨놔야 된다고.

나는 말없이 그림을 그렸다. 관우는 내 옆으로 붙어 수첩의 그림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린이집입니까?”

“응?”

“미끄럼틀 아닙니까, 이거?”

“어린이집에 이런 게 있어?”

“예, 보통 있죠. 소방 탈출로 만들 때 애들이 겁낸다고 익숙한 미끄럼틀로 만들어두는 곳이 많습니다.”

“소방 탈출로…….”

“근데 이건 좀 이상하네요.”

“뭐가?”

“평범한 소방 탈출로 미끄럼틀이라면 창문에 설치하는 게 보통인데. 이건 천장에 설치되어 있네요.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갔을 때 외부로 연결되어야 소방용 미끄럼틀이라고 볼 텐데. 이건 천장 위에서 누군가 아래로 들어오는 구조로 설치된 거니 그건 아닌 것 같고.”

관우가 그림을 가져가 자세히 본 뒤 말했다.

“어린이집의 경우 위층에서 아래로 애들이 익숙한 미끄럼틀로 연결해 둔 곳이 있지 않을까 해서 여쭌 건데. 좀 애매하네요.”

어린이집은 아니다. 바닥이 흙이었다. 단층인지 아닌지 파악하진 못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창고나 장비를 모두 들어낸 공장 같아 보였다.

“만약 여기가 공장이라면 어때?”

“아무것도 안 그리셨는데. 여기 빈 곳에 기계가 있었어요?”

“아니.”

“그럼 바닥은요?”

“바닥?”

“예, 공장에서 사용하는 기계는 무겁습니다. 바닥이 흙이나 장판이면 눌린 자국이 있을 것이고, 시멘트라면 녹물이 묻은 자국이 남았을 겁니다.”

“음.”

흙바닥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흔적은 없었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 창고에 또 뭐가 있었지?

관우가 수첩을 뚫어지게 보다 물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인데 그러세요?”

“잠깐만 조용히 있어줘.”

“…….”

나는 머릿속에 창고를 다시 그려냈다. 그동안 여러 번 기억을 읽었기에 내 기억 속에 내가 기억 못 하는 무엇인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장발 놈에게 맞아 옆으로 쓰러졌을 때 나는 창고의 전경을 보았다.

맨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당연히 그곳에 있던 구조물 중 가장 큰 미끄럼틀이었다.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문으로 막혀 있어 외부가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단층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뭐가 있었지? 나는 눈을 감고 마치 기억 속의 내가 시선을 돌리듯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보았다.

‘창고 구석에 뭔가 길쭉한 것들이 놓여 있었다. 그게 뭐였지?’

색부터 떠올려 보자. 갈색. 그래, 갈색을 가진 길쭉한 무엇인가가 네다섯 개 누워 있었다. 동그란 물건 같아 보였는데. 그게 뭐였지? 기억을 더듬던 나는 어느 순간 눈썹을 꿈틀거렸다.

‘멍석?’

확실하다. 멍석이었다. 갈색 지푸라기로 엮은 멍석. 바닥에 깔았던 것인지 흙이 잔뜩 묻은 더러운 멍석이었다.

“바닥. 바닥에 멍석이 깔려 있었을 거야.”

관우는 내 말을 듣더니 볼펜으로 그림의 바닥에 멍석이 깔린 것처럼 빗금을 쳐 본다. 그림을 채운 후 수첩을 들고 자세히 바라본 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한 구조이네요.”

관우도 모르는 눈치다. 나는 수첩을 받아 다시 자세히 본 뒤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 무엇인지, 어떤 장소인지 모르지만 이건 손은정의 시신이 매장된 곳일 확률이 높다.

“일단 여주경찰서로 돌아간다. 우진이와 연주 쪽에서 뭔가 나오기를 기다려 보자.”

“어어, 과장님. 그 그림이 뭐냐니까요?”

“일단 가자.”

* * *

늦은 오후.

KCSI에 따라갔던 연주와 이천 대포 업체를 조사하러 갔던 우진이 돌아왔다. 우리는 회의실에 빙 둘러앉아 하루 수사 성과에 대해 브리핑 자리를 가졌다.

나는 먼저 우진에게 물었다.

“성과 좀 있었어?”

최우진이 수첩을 꺼내 넘기며 말했다.

“일단 관우 형님이 보내주신 구형 소나타 넘버를 토대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업주 말로는 3개월 전에 누가 그 차를 사갔답니다.”

잡았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

“자세히 말해봐.”

최우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콩알만 한 동네에서 지들이 뛰어 봤자 벼룩이죠. 두 명이었답니다. 한 놈은 눈 왼쪽 아래에 큰 점이 있었고, 한 놈은 큰 신체적 특징은 없었는데 키가 아주 컸답니다.”

“얼마나?”

“190㎝는 넘어 보였는데 무척 마른 체격이었답니다.”

눈 왼쪽 아래에 큰 점이 있는 놈. 키가 190㎝가 넘고 마른 놈. 거기에 내가 읽어낸 기억 속의 세 놈. 다섯 녀석의 인상착의를 알아냈다.

“결제는 어떻게 했고?”

“현금으로 거래했답니다. 150만 원에 넘겼다고 합니다.”

“음, 좋아. 관우야. 차는 계속 추적하고 있지?”

관우가 거의 누워 있다시피 앉아 있다가 벌떡 허리를 세우며 머리를 긁는다.

“그게…… 놓쳤습니다.”

음? 관우 녀석이 CCTV 추적을 놓쳤다고? 연주가 한숨을 쉬자, 관우가 얼른 말했다.

“하지만 의심 차량 세 대를 추가 추적하고 있습니다.”

연주가 물었다.

“의심 차량? 또 뭐가 나왔어?”

“어, 쫓고 있던 구형 소나타가 상가 건물로 들어간 뒤에 나오질 않았어. 이틀간 다시 나온 차 중에 동일 넘버가 없었거든.”

“그런데?”

“혹시나 해서 이틀간 나온 차량 중에 동일한 기종의 차량을 확인했더니 세 대가 나왔어. 넘버는 다 다르고.”

“넘버를 바꿨다?”

“아마도.”

최우진이 얼른 나서며 말했다.

“업주 말이 서비스로 번호판 여섯 개를 추가로 줬다고 합니다.”

관우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비스 좋네. 요즘은 그런 것도 해주냐?”

나는 우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넘버 알아왔어?”

우진이 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업주가 기억을 못 합니다. 폐차된 차량에서 나온 번호판 중 대충 아무거나 줬답니다.”

제길, 구형 소나타를 쫓는 건 시간이 더 걸리겠다. 하지만 관우 녀석은 찾아낼 거다. 능력 있는 녀석이니까. 일이 조금 복잡해졌을 뿐이다. 일단 지금은 손은정의 시신을 찾아야 된다.

나는 먼저 이 동네를 제일 잘 아는 우진에게 물었다.

“우진아.”

“예, 과장님.”

“여기 문신 새기는 업체들 있지?”

“예, 있습니다.”

“리스트 뽑을 수 있어?”

타투 샵은 보통 불법이 많다. 조폭들과 연계도 있기 때문에 강력계 형사는 문신 업체의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 있습니다.”

“몇 군데야?”

“여주에 한 군데밖에 없습니다.”

“좋아, 업주 데려와.”

“예? 갑자기 문신은 왜…….”

우진이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관우와 연주도 마찬가지다. 난 대충 어물쩍 둘러댔다.

“범죄 단체를 결성할 때는 여러 명이 같은 문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연주가 손가락을 튕긴다.

“아, 그렇죠. 보통 같은 문신을 하면서 결속을 다지니까. 최근에 이쪽 주름잡는 조폭 애들 말고 여러 명이 몰려와 같은 문신을 한 녀석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네요.”

휴, 다행이다. 다들 납득하는 눈치다.

“관우는 구형 소나타 추적은 후로 미루고, 렉서스 차량에 대해서 알아봐.”

“예? 그거 찾았는데 또 뭘…….”

“주유소 사건이 발생하기 전. 손은정 씨가 납치당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모든 동선 다 따.”

“헐…….”

“힘들어?”

“아뇨, 힘든 건…… 힘들죠. 그런데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미안하다. 부탁 좀 하자.”

“그런데 왜 해야 되는지 이유라도 좀 알면…….”

모두가 날 바라본다. 우진을 제외하고 연주와 관우는 의심스러운 눈빛은 아니다. 날 굳건히 믿어주는 눈빛이지만 스스로 납득하고 움직이는 것이 업무 효율이 높기에 물어보는 눈치다.

“나는 손은정 씨가 이미 살해되었다고 생각한다.”

최우진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하지만 과장님. 손은정 씨가 살해되었다는 증거는 없지 않습니까? 연주 누님. KCSI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연주가 KCSI 보고서를 넘기며 말했다.

“트렁크에서 혈흔 발견. 출혈량 20㎖ 이하로 치명상은 없을 것으로 추정. 트렁크에서 발견된 모발 오 점은 모두 손은정 씨의 것으로 확인. 차량 내부에서 지문 확인 불가.”

최우진이 다시 날 보며 물었다.

“이 정도 단서로 손은정 씨가 살해되었다고 보는 건 좀…….”

옳은 소리다. 일에는 방해가 되지만 최우진의 질문은 당연한 의문이다. 나는 대충 둘러대기 위해 입을 뗐다. 하지만 내 말은 관우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막혔다.

“이 새끼가, 합류한 지 얼마나 됐다고 감히 과장님 말씀에 토를 달아?”

최우진이 황당해하면서도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형님도 이유를 알고 싶다고 질문하셨으면서…….”

“내가 인마. 언제 손은정 씨가 살해당했다는 걸 의심했어? 렉서스를 왜 쫓아야 되는지 이유를 알려고 질문한 거지. 그리고, 손은정 씨가 살해되었다는 과장님 답은 내 질문의 답변이나 마찬가지잖아! 대상이 사망했으면 어딘가 시신을 버렸을 거고 차를 쫓아야 어디에 시신을 버렸는지 알지, 인마! 어디서 감히 과장님께! 너 우리 과장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최우진을 노려보는 관우가 말했다.

“너 얼마 전 단양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 알아?”

최우진이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그…… 장진수 사건이요?”

장진수는 자신의 신변이 세상에 알려지길 바랐다. 그래서 지금은 온 국민이 그의 이름 석 자를 안다. 관우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래, 인마. 그거 해결하신 분이 우리 과장님이시다.”

“헉.”

연주가 거든다.

“영덕에서 난 살인사건 알아?”

최우진의 눈이 튀어나오기 직전이다.

“여, 영덕이면 그 노인 살인사건 말입니까?”

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날 눈짓한다. 최우진이 놀라서 물었다.

“그것도 과장님이 하신 겁니까?”

연주와 관우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더 한다.

“종로 경동시장 재벌 존속살인사건도.”

“이중인격을 만들어 사람 목을 자른 애니메이션 킬러 사건도.”

최우진이 침을 꿀꺽 삼키며 날 바라본다. 이 녀석들이 사람 얼굴에 금칠을 해도 정도껏 해야지. 나는 됐다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거기까지. 우진아 난 말이다…….”

최우진이 벌떡 일어나며 내 말을 자른다.

“아닙니다, 과장님! 설명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런 정도의 형사이신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주제넘게…….”

“…….”

응? 뭐야,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최우진이 급히 늘어놓은 수첩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당장 조사하러 가겠습니다, 과장님이 그렇다면 그런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선배님들?”

관우와 연주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인다. 뭐냐, 부담스럽게. 최우진이 테이블 위의 짐들을 챙기며 재촉한다.

“뭣 하십니까, 빨리 움직여야죠! 과장님 지시 떨어졌는데!”

관우와 연주와 키득거리며 함께 일어난다. 난 갑자기 벌어진 이상한 신흥 종교 집회 현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뭐, 다들 지시에 잘 따라주기만 하면 된 것이긴 한데. 기분이 좀 찝찝하네.

그때 최우진이 테이블을 정리 중 내 수첩에 그려진 창고 그림을 힐끔 보더니 말한다.

“소금 창고?”

처음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던 나는 우진의 시선이 내 수첩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우진이 내 수첩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 그림. 소금 창고 그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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