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37화
12. 지하철 괴담(3)
쿠쿵, 쿠쿵…… 쿠쿵, 쿠쿵…….
익숙한 지하철 소음.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아무도 없는 지하철의 문 옆 끝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있었다.
자꾸만 감기는 눈. 회식 때 마신 술 때문인지 매일 강행하는 야근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무척 피곤하다. 빨리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뿐이다.
손목을 여러 번 돌려 손목 안쪽으로 돌아간 시계를 제 위치로 만든 후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13분.’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시 주변을 보았다. 저 멀리 닫혀 있는 문 창문으로 사람들이 몇 보이지만, 내가 탄 열차 칸에는 나뿐이다. 사람이 없어 좋긴 하지만 막차라 그런지 분위기가 좀 을씨년스럽다.
그때 지하철이 서서히 서는 느낌이 든다. 내가 내릴 역인가 싶어 지하철 중앙 상단에 설치된 화면을 보았다. 동시에 지하철 안내 방송이 들린다.
-이번 역은 양원, 양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This stop is Yangwon, Yangwon Station. The doors are on your right.
나는 고개를 돌려 문 위에 붙어 있는 노선표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다음이네. 피곤해 죽을 지경이다. 오늘따라 ITX 경춘선도 다니지 않는 밤늦은 시간에 화물열차를 먼저 보내느라 양정역에서 한참을 기다리게 했던 지하철은 평소보다 더 느리게 가는 듯하다.
사람이 타지 않으면 정류장을 그냥 스쳐 가는 버스와 달리 지하철은 모든 역에 정차한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술에 잔뜩 취해 남자 둘에게 부축을 받고 들어오는 여자가 보인다. 남자들은 문이 열리기 전부터 지하철 내부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끙끙대며 여자를 끌고 온다.
‘와, 씨. 더럽게 무겁네.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 야, 얘 집 어디라고 했지?’
‘몰라, 집 전화번호 아니까 전화해서 물어보자.’
남자들은 날 힐끔 바라보다, 문에서 제일 가까운 내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자리도 많은데 굳이 왜 내 앞에 앉는지 궁금하진 않다. 척 보니 여자가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멀리 가서 앉긴 좀 그렇겠지. 저기가 문 바로 옆자리니까.
남자들은 여자를 가운데 앉히고 양옆에 자리한다. 여자는 몸을 축 늘어뜨리고 한쪽 남자의 어깨에 기대 있다.
나는 여자를 자세히 바라보다 쿡쿡 웃었다. 도대체 얼마나 술을 마시면 저 꼴이 되는 걸까? 보통 저 정도로 취하면 잠이 들 텐데 저 여자는 눈을 뜨고 있다.
물론 초점도 없고 한 곳만 뚫어지게 보고 있긴 하지만 꼭 눈 뜨고 자는 사람 같아 보인다. 실소를 짓다 남자들과 눈을 마주친 나는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와 씨, 더럽게 무섭게 생겼네.
한 사람은 왼쪽 눈에 칼자국이 있다. 이마부터 볼까지 사선으로 난 칼자국. 깍두기 머리에 거뭇한 수염 자국으로 보아 꽤 거친 일을 하는 사람 같다.
반대편에 있는 남자는 날렵하게 생겼다. 하지만 눈이 쭉 찢어지고 전체적으로 뾰족한 인상이라 역시 거부감이 들게 생겼다.
나는 괜히 아직 닫히지 않은 문을 보며 인상을 썼다. 중앙선은 이게 문제다. 타는 사람도 없는데 한참이나 열려 있는 문. 빨리빨리 좀 가지, 왜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화물열차도 다니고 ITX도 같은 철도를 사용하는 중앙선은 이렇게 예기치 못한 상황 때문에 지연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막차 시간에는 보통 쌩쌩 달려가던데. 오늘따라 늦다.
내릴 곳이 다음 역이니 잠들면 큰일이다. 괜히 역을 지나치면 야밤에 할증료가 비싼 택시를 타야 한다.
눈을 크게 뜨고 몰려오는 졸음을 내쫓고 있던 바로 그때, 열려 있는 문으로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크로스 백을 메고 뛰어들어 오는 것이 보인다. 저 양반도 참. 막차 놓쳤으면 어쩌려고.
물끄러미 남자를 보자, 그는 날 힐끔 보고 어디 앉을지 자리를 찾는 시늉을 한다. 그러다 내 맞은편에 앉은 세 명을 보더니 멈칫하는 것이 보인다.
당신도 저렇게 술 취한 사람 처음 보는구나? 이해한다. 나도 술 먹고 필름 끊겨본 적이 여러 번 있지만 저 꼴이 된 적은 없으니까, 킬킬.
남자는 여자를 한참 바라보다 갑자기 아직 열려 있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나가려고 하는 듯하다. 술집에 지갑이라도 놓고 온 걸까? 지금 가면 택시 타야 될 텐데.
남자는 문 쪽으로 황급히 걸어가다 말고 움찔하더니 날 바라본다. 왜 보는 거지?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뚜벅뚜벅 걸어와 내 옆에 털썩 앉는다. 나는 이렇게 많은 자리가 비어 있는데 굳이 내 옆에 바싹 앉는 남자를 보며 인상을 썼다.
‘뭐…….’
‘야.’
‘……?’
‘내가 잘못했다, 인마 남자끼리 술 마시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그냥 가버리면 내가 뭐가 되냐?’
‘뭐……라고요?’
‘가자, 애들 기다려. 너 데리고 온다고 약속했어.’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남자는 다짜고짜 내 손을 덥석 붙잡고 일으켜 세운다.
‘아니…… 이게 무슨.’
나는 일어나지 않으려고 버텼다. 그와 동시에 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철 문이 닫힌다는 신호가 들려온다.
남자는 다급한 얼굴로 맞은편 세 사람을 등지고 서서는 나만 보이게 빨리 내리라는 표정을 보내온다. 이 사람 미친 건가?
‘놔요, 왜 이래요?’
‘아, 진짜 이럴 거냐? 애들 다 기다린다고. 그냥 좀 가자.’
‘아니, 무슨.’
남자가 힘으로 날 밀어낸다. 나는 문 옆 손잡이를 잡고 버티다 결국 밀려나 문밖으로 튕겨 나갔다.
‘헉!’
날 따라 그 남자가 내린다. 그리고 곧바로 문이 닫혔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문 닫힌 지하철을 바라보았다. 저거 놓치면 택시비가 얼마인데. 나는 지하철 안전 창문에 붙어 불쌍한 얼굴로 소리쳤다.
‘기장님! 스톱! 저 이거 타야 돼요!’
하지만 야속한 지하철은 그대로 천천히 출발하고 있다. 나는 서서히 움직이는 지하철을 따라 몇 걸음을 걸었다.
하지만 지하철은 멈추지 않았다. 지하철 내에 있던 세 사람 중 남자 두 명이 날 뚫어지게 보고 있다. 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와락 인상을 구기며 날 강제로 내리게 한 남자를 노려보곤 버럭 고함을 쳤다.
‘아니,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남자는 떠나가는 지하철을 바라보며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게 서 있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 어깨를 밀쳤다.
‘이거 막차인 거 알아요, 몰라요? 택시비 줄 겁니까, 예? 당신 나 알아요? 뭔데 친한 척을 하고.’
‘…….’
남자는 내가 밀치는 힘을 버티지 않고 비틀거리며 물러난다. 화가 난 나는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든가! 아무 말도 안 하면 어쩌자는 거요?’
남자는 멱살을 잡은 날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손을 들어 내 손을 잡았다. 남자의 손에 하얀 약 봉투가 들려 있다. 진짜 정신병자 아냐, 이거?
남자는 내 손을 가만히 붙잡고 고개를 떨궜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갑자기 점잖은 사과가 나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잡았던 멱살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뭐…… 뭐요?’
남자는 떠나 버린 지하철을 힐끔 본 뒤 말했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니니 안심하시고 들어주세요.’
지금도 충분히 이상한 사람이다. 멀쩡한 사람을 지하철에서 강제로 내리게 한 것도 문제인데 저건 막차였단 말이다. 나는 인상을 쓰고 말했다.
‘설명해 봐요. 내가 이해 못 하면 나랑 이대로 경찰서 가는 겁니다.’
‘…….’
남자는 다시 한번 떠난 열차 쪽을 바라보다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저는 의사입니다.’
응? 환자가 아니고 의사라고? 아무리 봐도 환자에 가까운데.
‘의사요? 무슨 의사요.’
‘신경외과 전문의입니다.’
‘…….’
진짜 미친놈인가 보다.
‘하? 그래서 뭐요?’
나는 문득 남자의 손을 보았다. 약봉지를 꽉 쥐고 있는 남자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안색도 좋지 않다. 진짜 어디 아픈 사람인가?
남자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제 직업이 의사다 보니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뭘 말입니까? 제대로 설명을 하세요.’
남자는 다시 떠난 지하철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당신 앞에 있었던 여자 기억하십니까?’
‘취객이요?’
‘취객이 아닙니다.’
‘하…… 그럼 뭔데요. 아니, 애당초! 그 여자가 취객이든 아니든 관심이 없다고요!’
내가 화를 내자, 남자는 긴 한숨을 쉰 후 다시 내 어깨를 잡는다.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이 새끼가 지금 날 놀리는 거 맞지? 그래, 어디 들어나 보자. 그 여자는 전생에 네 마누라였다, 같이 가서 사당에서 제 올리고 돈 내라고 하면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나는 남자를 노려보며 말해보라 눈짓했다. 그러자 남자가 침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방금 그 여자.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예상과 다른 말에 순간 말을 잃었다.
‘……?’
신종 사기 수법인가? 나는 뉴스에서 보았던 사기 수법 중 비슷한 것이 있는지 떠올렸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본다.
‘그럼 죽은 사람이란 말입니까?’
설마 그게 귀신이었단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진짜 죽여 버린다? 남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신입니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차라리 귀신이라고 했으면 미친놈이라고 욕이나 해주고 똥 밟았다고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시신이라고?
‘시, 시, 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여자.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
망연자실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떠나버린 열차 쪽을 보았다.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는 지하철. 방금 그 초점 없이 한곳만 뚫어지게 보던 여자가 시신이었다고? 남자는 내 옆에 서서 함께 지상철이라 바깥과 연결된 통로를 보며 말했다.
‘여자 옆에 있던 남자들이 시신을 옮기고 있던 겁니다. 혼자 도망치려고 하다 아무래도 당신도 해칠 것 같아 그대로 둘 수가 없어 끌고 내린 겁니다. 사전 설명 없이 다짜고짜 내리게 한 점은 사과드립니다.’
나는 멍하게 지하철 철로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자는 한참 내 옆에 서 있다 말했다.
‘오래 서 계시진 마세요.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남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서 황급히 지하철을 벗어났다. 혼자 남은 나는 멍하게 선로를 보며 중얼거렸다.
‘시신……이었다고? 그 여자가?’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잃었던 색을 찾아가던 사물들이 마침내 제 색을 되찾고 나는 원래 앉아 있던 카페에서 정신을 차렸다.
극심한 어지러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테이블 위에 엎드리자 옆에 있던 유재영의 목소리가 들린다.
“형사님? 형사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
나는 엎드린 채 구토가 나올 것 같은 어지러움이 해소되기를 기다리며 생각에 빠졌다.
‘진짜라고?’
나는 경찰이다. 나는 많은 시신을 보았다. 유재영은 누군가에게 들어 그 여자가 시신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고 지금에 와서는 어쩌면 진짜 시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분명히 시신이었다.
나는 엎드린 채 고개만 돌리고 물었다.
“당신이 본 여자. 붉은색 원피스 위에 단추를 푼 체크무늬 셔츠를 걸친 여자 맞습니까?”
유재영의 눈이 동그래진다.
“예? 그걸 어떻게.”
“…….”
진짜다. 단순히 지하철 괴담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진짜 자신이 본 것을 글로 옮긴 것이다. 어지러움이 간신히 가신 나는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빨간 하이힐에, 안에 검은 스타킹을 신은 여자 맞습니까?”
유재영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마, 맞아요. 머리는 갈색 머리에 히피 펌을 했고요.”
“남자들 인상착의는 어땠습니까?”
“어…… 한 명은 왼쪽 눈에 칼자국이 있었고, 깡패같이 짧은 머리에 위아래 다 검은색 옷이었고, 한 명은 좀 날카로운 인상에 얼굴이 하얗고 마른 체격이었습니다. 갈색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고.”
제길, 전부 맞다.
다 큰 어른이 어린애처럼 장난을 친다 생각했는데 전부 진짜였다. 나는 수첩을 열며 말했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진술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