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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160화 (160/328)

살인의 기억 160화

13. Spree killer(연속살인자)(9)

세상이 뒤집어지고, 깨어지고, 다시 합쳐진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흩어져 가루가 되었다가 순식간에 서로 뭉쳐 세상이 만들어진다.

온통 흑백뿐인 세상이 제 색을 찾아가고, 나는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작은 몸. 나는 지금 무척 어린아이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지만 나는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의 기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어두운 방에 불까지 끄고 있었지만 완벽한 어둠은 아니다. 문이 조금 열려 있는 틈에서 밝은 빛이 들어오고 있고, 문 앞에 누군가 쪼그리고 앉아 밖을 살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그림자가 고개를 돌리며 검지를 입 위에 올린다.

‘쉿, 큰아빠 아직 안 갔어.’

나는 움찔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떤다. 나는 큰아빠라는 사람을 매우 두려워했던 모양이다. 그때 밖에서 접시 깨지는 소리가 나며 고함 소리가 들린다.

‘이 한심한 새끼야! 언제까지 부모님과 내가 네 밑이나 닦고 다녀야 돼!’

‘아니, 형!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새끼야. 도대체 이게 몇 번째야. 사업한다고 여기저기서 돈 끌어모아 말아먹고. 부모님이 먹고는 살라고 집 팔아서 해준 돈까지 다 날리고. 작년에 찾아와 하도 빌어서 해준 돈도 이번에 다 말아먹었지!’

‘형…… 나도 열심히 해보려고 했는데.’

‘열심히 하긴 뭘 해, 이 한심한 놈아!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사업한다고 돌아다닐 때부터 내가 이 난리가 날 줄 알았다, 빚쟁이들 등쌀에 내가 살 수가 없다! 어제 네놈 돈 대신 갚으라는 사채업자 새끼들이 내 공장까지 찾아와 난동을 피웠다. 내가 네 형수 볼 낯이 없다고, 이 한심한 놈아!’

‘미안해, 형.’

‘네가 이러고 다니니까 제수씨가 화병이 나서 죽은 거 아냐, 이 병신 같은 놈아!’

‘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애들도 듣는데 너무한 거 아냐, 형?’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네놈이 그러고 다니니 주변인들이 다 힘든 거 아니냐, 제수씨만 그래? 지금 나도 화병이 나서 드러눕게 생겼다, 이 미친놈아!’

어른들이 외치는 벼락같은 고함 소리. 나는 무서움에 몸을 떨었다. 그때 문틈으로 밖을 살피던 누나가 깜짝 놀라더니 후다닥 뒤로 물러난다.

고개를 들자, 문이 스르르 열리며 작은 그림자 하나가 방으로 들어온다. 누나가 뒤로 물러나며 침을 꿀꺽 삼킨다.

‘주원아…….’

누나가 부르는 이름에 나는 문을 연 그림자를 보았다.

‘주원이 형?’

누나와 키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아이가 인상을 쓰며 누나를 째려본다.

‘너 내가 너보다 생일 빠르니까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지.’

누나가 고개를 숙인다.

‘아니, 우리 동갑인데…… 왜.’

주원이 들어와 누나 가슴팍을 발로 차버린다.

‘우리 아버지가 네 아빠보다 형이잖아! 그러니까 나도 오빠라고 부르는 게 당연하다고 몇 번을 말해!’

‘악!’

누나가 맞는 걸 본 나는 주원에게 달려들었다.

‘하지 마! 누나 때리지 마!’

주원은 등에 엉겨 붙은 날 떼어내느라 안간힘을 쓴다. 나도 어리지만 상대도 어려 보인다.

내가 사력을 다해 엉기자, 주원이 뒷걸음질을 쳐 벽에 등을 부딪힌다. 그 바람에 나는 손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주원은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너무 어린 내가 등과 가슴에 큰 충격을 받아 숨을 헐떡이자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했다.

‘괜찮냐?’

‘헉, 헉…… 누나 때리지 마. 형.’

‘이씨, 그러니까 오빠라고 부르라고 할 때 부르지. 자꾸 말 안 들으니 그렇잖아.’

그냥 애들 싸움인가 보다. 주원이란 녀석의 표정을 보니 그렇게 나쁜 애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내 속에 알 수 없는 미움과 원망이 꿈틀거린다.

나는 아빠를 구박하는 큰아빠에 대한 미움을 주원이 형에게 쏟아내고 있는 모양이다.

‘큰아빠 언제 집에 가, 형?’

주원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나도 몰라, 아빠 엄청 화나서 금방 끝나진 않을 것 같아.’

‘왜 화났는데?’

‘오늘 공장에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기계 하나 부쉈거든. 삼촌이 진 빚 대신 갚으라고 협박하면서.’

‘…….’

왜 아빠 빚을 큰아빠에게 갚으라고 한 걸까? 어린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빚이란 단어도 잘 모르는 나는 다시 물었다.

‘빚이 뭐야? 나쁜 거야, 형? 우리 아빠 나쁜 짓 했어?’

주원이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삼촌이 진짜 나쁜 짓 했다. 그것 때문에 우리 가족들 전부 힘들어졌고. 전부 네 아빠 탓이야. 덕분에 우리 아빠는 맨날 화만 내. 나도 힘들다고. 내가 무슨 잘못한 것도 아니고 왜 맨날 눈치 보고 살아야 돼? 이게 다 너희 가족들 때문이라고.’

‘…….’

그때 밖에서 우당탕하며 뭔가 쓰러지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리 그래도 씨X! 내 마누라 죽음까지 내 탓이란 거야? 암이었다고, 암! 형이 내 속을 알아?’

‘어, 그래. 네놈이 드디어 형 멱살까지 잡는구나. 이 개차반 같은 새끼야. 오늘 어디 한번 죽어보자.’

‘취소해! 그 말 취소하라고!’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어디서 형한테!’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들. 주원과 누나가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뛰어나간다.

‘아빠 그만해!’

‘아빠!!’

나는 무서움에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몸을 떨었다. 형과 누나가 나갔지만 밖에서는 아직도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아무리 나보다 나이 많은 형, 누나라고 해도 어른들 싸움을 말리기는 힘들 것이다. 괜히 옆에 있다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때, 누나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악!”

나는 누나 비명 소리에 움찔 놀라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겨우 문밖을 나섰다.

‘누나…….?’

바닥에 쓰러져 있는 누나. 입에서 피가 나고 있다. 아빠와 멱살잡이를 하던 큰아빠는 몸싸움을 하던 중에 누나가 다치자 거칠게 아빠 멱살을 놓으며 말했다.

‘이것 봐라! 결국 네 옆에 있으면 자식까지 저 꼴이 되는 거다!’

아빠는 얼른 달려와 누나를 붙잡고 물었다.

‘괜찮아? 아빠가 미안하다. 너 있는 거 못 보고.’

‘아빠……. 으아아앙…….’

아빠는 누나를 다독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큰아빠에게 맞았는지 입술이 터져 있다.

‘아빠…….’

‘병선아, 누나 데리고 방에 들어가 있어.’

‘아빠…… 맞았어?’

‘아냐, 이거. 아까 일하다 다친 거야. 얼른 들어가.’

나는 아빠 말을 듣고 누나를 부축하려 했지만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누나는 너무 무겁다. 낑낑대고 있는 나를 한심한 눈으로 보던 큰아빠가 혀를 차며 아빠에게 말했다.

‘하여간 너 이 새끼. 빚쟁이들 한 번만 더 공장에 오게 하면 그땐 내 손에 죽는다, 알았냐?’

‘…….’

아빠는 자신 때문에 누나까지 다치자 더는 덤벼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는지 말이 없다. 큰아빠는 나와 누나를 째려본 뒤 주원이 형에게 말했다.

‘가자! 에이, 재수 없는 집구석!’

큰아빠가 신발을 구겨 신고 현관문을 발로 차버리며 나간다. 주원이 형은 날 힐끔 본 뒤 한숨을 쉰다.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주원이 형의 눈빛을 보고 화가 났다. 방금 큰아빠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눈으로 하고 있는 듯한 주원이 형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누나의 팔을 붙잡은 채 큰아빠를 따라가는 주원이 형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마음속 분노를 삭이며 조그만 주먹을 꽉 쥐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꼭 갚아줄 거야.’

누나를 살피고 있는 아빠의 얼굴도, 입술이 터져 울고 있는 누나의 얼굴도 산산이 조각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상하다. 세상의 색이 아직 제 색을 갖고 있다. 현실로 돌아갈 때는 항상 흑백으로 세상이 물들었는데 이번에는 깨진 세상이 모두 제 색을 가지며 부서지고 있다.

흩어진 세상의 유리 조각이 다시 한데 뭉치기 시작한다. 나는 어지러웠지만 끝까지 세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처음 겪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다른 기억 속으로 간다.’

한 번에 한 시점이 아니라 두 번의 기억을 읽게 되는 경험. 나는 어지러워 구토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끝까지 다시 뭉쳐지고 있는 세상을 노려보았다.

가장 먼저 느낀 건 코끝을 강하게 찌르는 향 내음이다.

단 하나의 화환도 없는 초라한 장례식. 나는 상복을 입은 누나 옆에 앉아 멍하게 사진만 남은 아빠 얼굴을 보았다.

제일 싼 장례식장을 빌려 꽃장식도 없이 기본 재단에 사진만 올라가 있는 아빠의 장례식.

나는 상복을 입고 머리를 싸맨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내 세 번째 엄마다. 엄마는 내게 꽤 잘해줬다. 남들은 계모 밑에서 자라 고생하겠다고 말하곤 했지만 사실 두 번째 엄마도, 세 번째 엄마도 누나와 내게 잘해줬다.

그런 엄마가 장례식장에 찾아온 자기 친구들과 말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이고 있긴 하지만 다 들린다.

‘아니, 재혼한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남편이 죽었어? 지지리도 복도 없는 년.’

‘돈이 없어도 최소한 전 남편 새끼보다는 나은 사람 같아서 축하해 줬는데 이걸 어쩌니.’

‘그나저나 애들은 어쩔 거야? 설마 일 년 산 남편 자식들 때문에 네 인생 망칠 건 아니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내 말 들어. 시설로 보내는 편이 좋아.’

새엄마는 나와 누나를 힐끔거린다.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누나는 엄마를 보지 않고 입술을 꼭 깨물며 아빠 사진을 본다. 그때 누군가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나는 절을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 사람을 보고 인상을 썼다.

‘큰아빠.’

큰아빠가 주원이 형과 함께 들어오고 있다. 큰엄마는 보이지 않는다. 큰아빠는 일단 아빠 재단 앞에서 절을 한 뒤 인상을 썼다.

‘아니, 내 동생이 죽었는데 꽃도 하나 없어?’

큰아빠는 애꿎은 새엄마를 노려본다. 새엄마는 허리가 아픈지 비틀거리며 일어난 뒤 허리를 숙인다.

‘오셨어요.’

‘아무리 삼혼이라고 해도 이거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돈이 없는데 어쩌겠어요. 이것도 겨우 마련한 거예요.’

‘허! 평생 한심하게 살았다고 해도 갈 때까지 이런 대접이라니. 에이 씨X.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챙겨!’

큰아빠는 버럭 고함을 지른 후 장례식장 사무실로 향한다. 정장을 입고 온 주원이 형이 눈치를 보다 내 옆으로 와 선다.

‘병선아.’

‘어.’

‘너네 고아원 간다며?’

‘고아원이 뭐야?’

‘뭐긴 뭐야, 부모 없는 애들 가는 곳이지.’

‘부모가 없어? 왜? 나 엄마 있는데?’

‘지랄, 저 아줌마가 왜 네 엄마야, 숙모 죽은 지가 언젠데. 새 숙모도 죽고 이번이 세 번째 엄마 아냐? 우리 아빠 말처럼 진짜 삼촌이 재수가 없나 보다.’

누나가 주원이 형을 노려본다. 주원이 형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뭘 그렇게 봐? 우리 엄마가 한 말이야. 삼촌이 여자 둘 잡아먹고 이제 자기가 갔다고. 재수 없다고 장례식장에도 안 온다고 했어.’

그때, 내 속에서 무언가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쳐 있던 무엇인가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남보다 못한 삼촌과 그의 가족들. 나는 한심한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보던 큰아빠의 눈빛을 떠올렸다. 옆에서 히죽거리고 있는 주원이 형을 노려본 나는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큰아빠가 예전에 아빠를 때리고 구박해서. 아빠는 그래서 죽은 거야. 내가…… 내가 크면 꼭…….’

잠시 후, 큰아빠가 주문한 꽃들이 도착한다. 큰아빠는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복잡한 눈빛으로 나와 누나를 보고 있다.

큰아빠를 노려보고 있는 나. 어린아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악독한 표정으로 큰아빠를 노려보던 나의 시야가 서서히 깨지며 흑백으로 물든다.

* * *

극심한 어지러움 속에서 비틀거리며 깨어난 나는 쪽문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처음 두 시점의 기억을 읽은 것이 몸에 무리가 된 모양이다. 다른 때보다 훨씬 어지러움이 크다.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문득 지금 내 몸 상태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허리를 펴지도 못한 상태에서 무전기를 들었다.

“오 선배님! 여기가 아니라 조치원입니다! 사촌 형이 운영하고 있는 조치원 원단공장! 정병선은 거기 나타날 겁니다!”

그리고 그 무전을 마지막으로 나는 흙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머리통을 붙잡고 한 시간은 흔들어 댄 기분이다.

“으…… 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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