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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163화 (162/328)

살인의 기억 163화

13. Spree killer(연속살인자)(12)

정병선은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는 내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그대로 뛰어 내 뒤로 돌아간다. 책상 위에 꽂힌 칼을 잡아가는 그의 손길. 하지만 칼은 이미 날이 반이나 책상으로 들어간 상태이다.

저렇게 연약한 정병선이 뽑아낼 수 없다 판단한 나는 한숨을 쉬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만 포기…… 아! 안 돼!”

나는 정병선이 마지막까지 반항을 하기 위해 칼을 뽑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한 안일한 생각이 위기를 만들었다.

테이블로 뛴 정병선은 꽂힌 칼을 뽑는 대신 남은 날에 자기 목을 들이밀고 있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나는 정병선의 상체가 테이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가 무엇을 할지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머리보다 몸이 더 빨리 움직였다.

“차앗!”

어깨로 그를 들이받고자 날았지만 그랬다면 늦었을 것이다. 나는 날아올라 그의 등을 차버렸다. 눈앞에 칼날이 있었지만 다행히 칼날의 옆면이다. 정병선은 칼 옆면에 얼굴이 부딪히며 쓰러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벌떡 일어나 칼에 목을 들이민다.

“으아아아!!”

“그만! 그만하라고!”

나는 달려오는 정병선의 옆구리를 다시 발로 차버렸다. 몸무게가 어찌나 가벼운지 내 발길질에 열린 문까지 날아가 버린 정병선.

범죄자를 검거하며 반항을 하지 못하게 수갑을 채운 적은 있었지만, 자살을 막기 위해 수갑을 채우는 건 처음이다.

나는 쓰러진 정병선을 엎어놓은 후 팔을 꺾어 수갑을 채웠다. 아래에서 상황을 보던 오진규와 연주가 뛰어올라 오는 것이 보인다.

오진규는 달려오며 나와 정병선의 상태를 뚫어지게 본다. 격투 상황이 맞는지 확인하는 모양이다. 그때 정병선이 수갑에 묶인 채 소리를 지른다.

“제발 죽게 해줘! 제발!”

그의 목소리를 들은 오진규가 달려오며 슬라이딩을 한다. 언제 꺼냈는지 손수건을 뭉쳐 손에 쥔 오진규는 쓰러진 정병선의 머리를 붙잡고 입에 손수건을 쑤셔 넣어 버린다.

연주가 달려와 수갑이 잘 채워졌는지 확인 후 날 살핀다.

“과장님, 괜찮아요?”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퍼덕거리는 정병선을 내려보았다. 입에 쑤셔 넣은 손수건을 빼기 위해 턱관절을 움직이는 정병선.

오진규가 엄지로 턱을 붙잡고 손수건을 더 안쪽으로 쑤셔 넣는 것이 보인다.

“오 선배님. 뭐 하시는 겁니까?”

오진규는 정병선의 턱을 붙잡고 입 안쪽을 보며 말했다.

“손 묶였다고 못 죽는 거 아닙니다.”

아, 이제 알겠다. 노련한 오진규는 달려오며 현 상황이 정병선이 자살을 시도하는 중이고, 내가 그걸 말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손이 결박된 정병선이 혀를 깨물까 싶어 빠르게 조치를 취한 것이다. 후, 이 사람이 없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구나.

따라 올라온 형사들에 의해 일으켜 세워진 정병선. 눈이 벌겋게 충혈된 정병선의 몰골은 사람의 꼴이 아니었다. 경찰에 쫓기며 자지도 먹지도 못한 그는 며칠 굶은 짐승 같아 보인다.

“읍!! 으읍!”

형사들에 의해 끌려가는 정병선. 그의 뒷모습을 보던 연주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후, 취조가 쉽지 않겠네요. 의료팀 불러놓고 진행해야 될 것 같죠?”

언제 자살을 시도할지 모른다. 취조를 해야 하니 입에 물린 손수건을 빼야 하는데 진술 내내 혀를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 의료팀 대기시켜 줘.”

“네, 과장님.”

그때 오진규가 나선다.

“한 시간만 주시면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응? 뭘 해결한다는 거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배님?”

오진규가 히죽 웃으며 엄지를 든다.

“과장님께서 이런 능력을 보여주셨는데. 저라고 가만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동할 테니 구금 후에 제가 돌아올 때까지 잠시만 취조를 늦춰주십시오.”

“…….”

뭘 하려는 걸까? 일단 정병선은 검거했다. 이제 취조만 남은 상황이라 오진규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건 문제가 되지 않기에 나는 그의 부탁을 허락했다.

오진규가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나가는 모습을 우두커니 보던 나는 전화를 들어 본부장님께 보고를 드렸다.

“예, 본부장님. 정병선 검거 완료했습니다. 지금 복귀합니다.”

* * *

스스로 죽으려는 자를 막는 방법.

오진규가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온갖 방법을 떠올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이란 건 온갖 변태 같은 방법이었다. 고문 도구 중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기구를 턱에 고정하면 어떨까? 치과에서 사용하는 개구기를 물려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들.

하지만 오진규가 돌아오고 나서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그와 함께 온 사람을 보고 바로 상황을 알아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조한 얼굴로 오진규의 뒤에 서 있는 중년 여성. 그녀는 바로 정병선의 누나였다.

나는 한 번도 그녀를 만나본 적이 없지만 이 타이밍에 나타날 여성은 그녀밖에 없다. 게다가 보는 순간 남매지간이란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정병선과 꼭 닮았다.

오진규가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정병선의 누나분이신 정여선 씨입니다.”

정여선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인다. 나는 다시 한번 마주 고개를 숙인 후 오진규를 바라보았다. 그 짧은 찰나에 이런 걸 생각해 내다니. 아니, 이것도 지금껏 쌓인 경험에서 나오는 내공이겠지.

“아직 취조 전입니다. 먼저 면담시키시겠습니까?”

“그러는 편이 좋겠죠.”

“좋습니다. 바로 준비시키죠.”

오진규가 정여선을 취조실로 데려가고, 나는 유치장에 수감 중인 정병선을 데리러 갔다.

유치장 구석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정병선은 여전히 등 뒤로 수갑이 묶여 있고, 입에 손수건이 물려 있다. 보통 유치장에 온 뒤에는 수갑을 풀어주는데 그는 자살 위험 때문에 이리 둔 것이다.

나는 유치장을 지키고 있는 순경에게 눈짓했다.

“정병선, 취조하겠습니다. 내보내세요.”

“예, 과장님.”

순경이 유치장 문을 열고 들어가 정병선을 끌고 나온다. 복수에 온 힘을 쏟아낸 후 몸에 힘이 다 풀린 정병선은 비틀거리며 순경에게 끌려 나온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수갑을 풀어준 뒤 팔을 앞으로 하고 다시 채웠다. 그리고 순경과 함께 취조실 앞으로 왔다. 닫힌 문 앞에 선 나는 손수건을 물고 있는 정병선을 힐끔 바라본 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제부터 당신 재갈을 풀어줄 겁니다.”

정병선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리고는 날 바라본다. 빨리 죽을 수 있게 재갈을 풀어달라는 눈빛이다. 나는 닫힌 취조실 문을 눈짓하며 말했다.

“저 문 안에 당신 누나가 와 있습니다.”

정병선의 눈이 커지며 취조실 문을 바라본다. 나는 그의 입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주며 말했다.

“당신이 지금 혀를 깨물면 난리가 날 것이고, 문 안에 있던 누나가 그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

정병선은 입이 말라 입술이 갈라져 있다. 하지만 혀를 깨물지는 않고 있다. 나는 순경에게 그만 가 보라는 눈짓을 보낸 후 말했다.

“직접 문 열고 들어가세요. 저는 따라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모니터링실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또 돌발상황은 없을지 확인해야 하니까. 정병선은 살인자이다. 자기 누나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지켜봐야 한다.

정병선이 문과 나를 번갈아 보다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간다. 그가 문을 열자, 안에 있던 정여선 씨가 눈물을 글썽이며 일어난다.

“병선아…….”

“…….”

정병선이 열고 들어간 문. 어깨를 들썩거리며 자기 누나를 바라보는 정병선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은 후 한숨을 쉬었다. 눈치 빠른 관우 녀석이 정병선이 들어가자마자 복도 모서리에서 고개를 내민다. 주변을 살핀 관우가 다가와 속삭인다.

“여긴 제가 지키겠습니다. 유사시에 바로 들어갈 수 있게 준비할 테니 과장님은 모니터링실로 가세요.”

“고맙다, 부탁한다.”

모니터링실에서 상황이 터진 걸 인지하고 움직이면 늦을 수도 있기에 문 앞에 사람을 두어야 한다. 물론 이것도 오진규가 관우에게 지시한 것일 거다.

나는 관우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준 뒤 모니터링실로 갔다.

연주가 노트북을 펼치고 대화를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고, 오진규가 팔짱을 끼고 유리 앞에 서 있다 자리를 내어준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눈빛으로 수만 마디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병선과 정여선이 보인다.

나는 오진규 옆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역시 선배님 경험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정여선을 데려올 거란 생각은 못 했습니다. 대질 신문도 아니고 자살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할 생각은 더더욱 못 했고요.”

“…….”

오진규는 말없이 날 바라보다 실소를 짓는다.

“황당한 말씀이군요.”

응? 무슨 말이지?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내가 오진규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말했다.

“저는 정병선이 조치원 공장으로 올 거란 과장님 말씀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입니다. 결과적으로 과장님이 옳았고 저는 틀렸습니다. 그런 분이 이리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

그건 나는 기억을 읽을 수 있고, 당신은 못 하니까 그런 것뿐입니다. 경찰로서의 능력은 당신이 더 뛰어날 겁니다.

오진규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이번에 정말 놀랐습니다. 관우와 연주가 맹목적으로 과장님을 따르는 이유도 알 수 있었고.”

“그게…….”

“저는 아직도 멀었나 봅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

오진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저는 말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이 먹고 도전하는 늙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보다 어린 사람이지만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볼 때 쓸 수도 있는 말이란 걸 이 나이 먹고 깨닫고 말았군요, 하하.”

오진규는 나보다 열 살은 많은 선배이다. 그런 선배가 얼굴에 금칠을 해주니 얼굴이 붉어진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실 건…….”

오진규가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 요만큼 정도. 운이 없어 좌천되었다는 생각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내가 더 나은 형사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전부 달아나는군요. 과장님은 제가 올려 볼 수 없는 분입니다.”

“…….”

“많이 알려주세요. 나이 많다 타박하지 마시고. 저는 아직 많이 배워야 할 사람입니다.”

하, 이 아저씨. 왠지 나중에 강혁 아저씨처럼 늙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뭐, 좋은 어른이 된다는 의미이니 욕은 아니다.

괜히 무슨 말을 더 했다가 또 금칠만 당할 것 같아 슬쩍 눈을 피한 나는 취조실 안의 남매를 보았다.

눈물을 글썽이는 정병선의 얼굴.

그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누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가뜩이나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이었던 정여선이 동생의 말에 오열하며 안긴다.

“미안해! 미안해, 내 동생! 내가 너무 늦게 왔어! 정말 미안해!”

보육원에서 아이들의 괴롭힘을 견디며 하염없이 누나를 기다리던 어린 정병선.

광기에 찼던 그가 그때의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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