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170화 (169/328)

살인의 기억 170화

14. 목격자(6)

나는 눈을 감고 있지만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다.

처음이다. 갑자기 찾아오는 기억이 아닌, 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명령하듯 기억을 읽기를 원했고, 이 기억이 나의 지시에 반응한 것은.

주변의 공기가 변하고 있다.

나는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었지만, 오후의 선선한 공기가 느껴진다.

천천히 눈을 뜬 나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내 정신은 몽롱한 상태이다. 술인가? 아니다, 술을 마신다고 이런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나는 비틀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쉬어야 할 것 같다. 몸이 무척 힘들다.

나는 전봇대에 등을 기대고 허리를 굽혔다. 숨이 가빠오고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 하아…….’

숨을 몰아쉬며 폐부 깊숙한 곳에 있던 썩은 숨을 내뿜었다. 그때, 내 코로 익숙한 냄새가 스친다.

본드 냄새.

이건 분명히 본드 냄새다. 청소년 시기에 이런 걸 부는 애들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본드를 부는 놈이 있을 줄이야.

잠깐…… 민지는 범인이 십 대 후반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설마 진짜 어린놈이 범인인 거 아냐?

민지가 사람 얼굴을 제대로 인식할 리는 없다. 하지만 본드 냄새를 맡고 보니 어쩌면 민지가 만분의 일 확률로 범인 얼굴을 제대로 인식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고 다시 전봇대에 등을 기댔다.

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오후의 주택가 모습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어쩌면 나는 기억으로 빠져들 때 느끼는 어지러움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이것이 범인의 일그러진 기억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자식은 지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정신으로 돌아다니면서도 CCTV를 힐끔거린다. 본능적으로 CCTV 사각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잇길. CCTV가 없는 지역으로 들어와 빌라 사이의 골목으로 향한다.

비틀거리며 벽을 잡기도 하고, 허리를 숙여 숨을 헐떡이기도 하는 나.

빌라 사잇길로 나와 고개를 내밀고 다음 골목의 CCTV를 확인한 나는 천천히 걸었다. 여기는 사람이 좀 있다.

나는 최대한 멀쩡하게 보이려 허리를 곧추세우고 걸었다. 일부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강제로 몸을 편 나는 휘적휘적 걸으며 멀쩡한 표정으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내 눈에 깡총깡총 뛰며 이쪽으로 오는 아이가 보인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방긋방긋 웃으며 하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는 예쁜 아이.

무척 귀엽다. 당장 저 아이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저 아이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의 부모가 무척 부럽다. 저 아이는 신이 주신 선물이 분명하다.

나는 가만히 멈추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깡총깡총 뛰던 아이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손을 흔든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다른 아이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아이 팔짱을 낀다.

‘언니!’

‘헤헤.’

‘그거 뭐야? 케이크야?’

‘어!’

아이가 케이크를 들어 보이며 방긋 웃는다.

‘내 용돈으로 샀다?’

‘와, 맛있겠다. 나도 줘.’

‘안 돼.’

‘왜?’

‘아빠 생일 케이크야. 선물 줄 거야.’

‘잉, 나도 먹고 싶은데.’

‘음, 그럼 우리 집 갈래? 아빠 곧 올 건데 나랑 놀다가 촛불 불고 같이 먹자. 엄마도 너 오면 좋아할 거야.’

‘진짜? 그래도 돼?’

‘어.’

‘웅…… 근데 엄마가 여기 있으라고 했는데.’

‘엄마 어디 갔는데?’

‘시장.’

‘그럼 이따 우리 집에 놀러 와. 케이크 남겨놓을게.’

‘진짜? 진짜 다 먹으면 안 돼, 언니?’

‘응, 알았어. 꼭꼭 남겨둘게. 약속.’

‘약속.’

귀엽다. 너무 귀엽다. 당장에라도 저 하얀 목을 깨물어 주고 싶다. 아이들 피부는 어찌 저리 좋은 걸까? 나는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현지 안녕?’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다 방긋 웃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응, 신나는 일 있나 봐?’

‘헤헤.’

현지가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음, 오늘 아빠 생일인데요. 용돈 모아서 케이크 샀어요. 아빠가 좋아하겠죠?’

‘와, 진짜? 아빠가 너무 행복해하시겠다.’

‘헤헤.’

나는 현지보다 어린 연정이를 바라보았다. 연정이는 현지보다 더 어려 그런지 피부가 더 곱다.

‘연정이 안녕?’

‘…….’

연정이는 낯을 가리는지 현지 뒤에 숨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안녕…….’

현지가 연정이를 밀치며 말했다.

‘존댓말로 해, 연정아.’

‘응…… 아저씨 안녕하세요…….’

고작 열 살 먹은 현지. 두 살 많다고 언니 노릇을 하는 아이가 너무 귀엽다. 나는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욕정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지는 내가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떨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저씨, 어디 아파요?’

연정이가 현지 뒤에서 고개를 내민다. 동그란 눈매가 어찌 저리 예쁜 걸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난 안 아픈데. 우리 집에 아픈 애가 좀 있어서.’

현지 눈이 동그래진다. 아이는 뒤편에 있는 약국을 가리킨다.

‘약국 가는 거예요?’

나는 멀리 있는 약국 간판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람 먹는 약 먹으면 안 되는 아이라서.’

현지와 연정이 눈이 동그래진다.

‘강아지? 아저씨 강아지 키워요?’

‘진짜요? 우리도 보여주세요!’

개를 좋아하는 아이들. 무척 키우고 싶은 모양이다.

‘아직 엄마가 강아지 못 키우게 하셔?’

현지와 연정이 얼굴이 동시에 시무룩하게 변한다. 현지가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나 중학교 가면 사준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안 가요.’

연정이는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울 엄마는 개 싫어해요. 절대 안 키울 거래요. 난 너무 키우고 싶은데.’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이 하고 싶다는 걸 못 하게 하다니. 이 집 부모들은 악마들이다. 내게 이런 아이들이 있었다면 온 세상 개를 다 사줄 텐데.

현지가 물었다.

‘아저씨 무슨 개 키워요?’

연정이도 눈을 반짝이며 답을 기다린다. 나는 두 아이를 보며 웃었다.

‘푸들.’

연정이는 평소 푸들을 제일 좋아하는지 깡총깡총 뛴다.

‘와! 푸들! 갈색 푸들이에요? 난 초콜릿 색이 좋은데!’

나는 귀여운 연정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콜릿색이야. 이름은 쪼꼬미라고 하고.’

‘악! 이름도 귀여워!’

연정이는 생각만 해도 좋은 모양새로 제자리 뛰기를 한다. 어깨까지 오는 긴 생머리가 찰랑거리며 샴푸 냄새에 섞인 아기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한다. 현지도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쪼꼬미 어디 있어요? 우리도 보여주세요!’

나는 슬픈 얼굴을 연기하며 말했다.

‘지금 애가 아파서 못 나와.’

현지와 연정이는 금방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많이 아파요? 병원 안 가도 돼요?’

‘얼마나 아파요? 많이 아야 해요?’

두 아이의 순수한 걱정들. 이렇게 순진한 천사들이 그렇게 키우고 싶다는 강아지도 안 사주다니. 부모가 미친 게 틀림없다.

‘응, 많이 아파.’

연정이가 울음을 터뜨린다.

‘흐에에에에…….’

두 살 많은 현지도 눈물을 글썽인다.

‘간호해 주고 싶다.’

아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간호해 주고 싶다고?

사실 내게는 개가 없다. 혼자 밥을 먹길 하나, 물을 마시길 하나. 산책도 귀찮고 목욕시키긴 더 귀찮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판국에 개를 키우기는 개뿔.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아이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 했던 거짓말이 천우신조가 되었다.

‘간호해 주고 싶어?’

현지와 연정이가 동시에 예쁘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작고 귀여운 아이들. 동그란 눈망울에 눈물을 걸고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 나는 이 아이들이 귀여워 죽을 것 같다.

‘아저씨가 서툴러서 쪼꼬미가 더 아픈 걸까?’

현지가 날 올려 보며 물었다.

‘어떻게 했는데요?’

‘어…… 그냥 목욕시키고 이불 깔아줬는데.’

‘앗! 아픈 애 목욕시키면 안 돼요.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줘야 해요!’

연정이는 개에 대해 모르는 눈치다. 현지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 나는 걱정으로 물든 현지의 귀여운 눈동자를 보며 물었다.

‘그래? 현지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학교에 멍멍이 키우는 애가 말해줬어요.’

‘와, 진짜? 직접 할 수도 있어?’

‘음…… 안 해봤는데. 그래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아저씨 좀 도와줄래?’

현지는 잠시 머뭇거리며 자기 손에 들린 케이크를 바라보다 물었다.

‘아저씨 시계 있어요?’

‘응? 시계는 왜?’

‘아빠 오기 전에 돌아가야 되거든요.’

‘아, 그래? 지금 4시 반이네.’

‘그럼 좀 더 있다 가도 돼요! 아저씨 집 여기서 멀어요?’

‘아니, 가까워.’

‘그럼 빨리 가요! 멍멍이 아파요!’

‘그럴까?’

나는 멀뚱히 서 있는 연정이를 보았다. 무척 따라가고 싶은 모양이지만 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머뭇거리는 얼굴이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연정이도 갈래?’

연정이는 자기 티셔츠 배 부분을 쭉 늘리며 주위를 본다.

‘엄마가…… 여기 있으라고 했는데.’

나는 연정이 머리를 만져주며 말했다.

‘아저씨 집 안 멀어. 멍멍이만 보고 가. 현지 언니 혼자 힘들 수도 있는데. 좀 도와주면 좋겠다.’

연정이는 현지를 바라보다, 다시 엄마가 간 시장 방향을 본다. 잠시 고민하던 연정이가 현지 손을 잡는다.

‘멍멍이 보러 갈래요, 언니가 같이 있으면 엄마한테 안 혼나겠지?’

현지가 밝게 웃으며 케이크 상자를 흔든다.

‘응! 멍멍이 구경하고 빨리 집에 가자.’

두 아이가 먼저 길을 걷는다. 나더러 빨리 오라는 듯 손짓하는 아이들. 나는 천사 같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내 시야 왼편 바깥쪽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걸린다. 눈동자를 돌려보니 약 삼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있는 것이 보인다.

날 본 건가? 별문제는 없었을 텐데. 의심할 바 없이 행동했다. 그저 동네 아저씨와 아이들의 대화일 뿐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여고생 쪽을 보았다. 하얀 얼굴에 긴 생머리. 키가 아주 크고 날씬해서 인기 많게 생겼다. 하지만 전혀 내 취향은 아니다. 난 키가 작을수록 좋은데 저 여자는 너무 크다.

여고생과 눈이 마주쳤다.

뭐지? 왜 저렇게 사람을 빤히 봐? 비록 개가 있다는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나는 애들에게 나쁜 짓을 할 생각이 없다. 강아지가 없다는 것을 알면 실망하겠지만 난 최선을 다해 재미있게 놀아줄 거니까.

나는 여고생을 가만히 바라보다 금세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나에겐 예쁜 천사가 둘이나 있으니까. 저런 내 스타일도 아닌 여고생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나는 빨리 오라 손짓하는 나의 천사들에게 뛰어갔다.

손을 잡고 손짓하는 두 아이의 모습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온 세상이 제빛을 찾아가고 나는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문구점 맞은편에 있는 담벼락을 붙잡은 나는 한쪽 눈을 가리고 문구점을 노려보았다.

잊기 전에 기억해 둬야 한다. 내가 읽어낸 모든 것을.

‘범인이 두 아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범인은 현지, 연정이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범인은 면식범이다.

‘범인은 처음부터 아이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강아지가 있다는 거짓말로 아이들을 꾀어 집에 데리고 간 뒤 놀아주려 했던 것이다. 물론 놀아준다는 것이 보통 어른이 아이들과 놀아주는 방식인지는 알 수 없다.

뒤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KCSI 검사 결과 아이들 시신에서 유사 성행위 흔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인은 주민지가 자신을 보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범인은 온정신이 아니다. 속에서 강한 본드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마약을 흡입할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 민지의 목격담과 다르다. 십 대 목소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사십 대 이상의 걸걸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직 어지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문구점을 노려보았다.

아이들의 순수한 걱정을 미끼로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던진 범죄자. 순수함과 착함을 범죄 도구로 이용한 악마. 나는 이놈을 반드시 잡을 거다.

“기다려라, 짐승 같은 새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