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75화
14. 목격자(11)
달려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뒷문을 열어보는 것이었다. 만약 범인이 우리 예상과 달리 민지를 데리고 뒷문으로 빠져나갔다면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뒷문을 지나 나온 것은 테니스장. 작은 테니스장이 아니다. 네 개의 코트가 붙어 있는 커다란 운동장이다.
사람을 끌고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범인은 아직 건물 안에 있다.
나는 빠르게 건물 외관을 살폈다. 4층 건물. 건물 규모는 건평 120평이 조금 넘는 것 같다.
나는 다시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오진규는 이미 2층으로 올라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잠겨 있는 방문들 앞에 서서 최대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가 없다.
그렇다고 1층에 없다고 확신할 순 없다. 잠겨 있는 방 중 하나에 범인이 민지의 입을 막고 숨을 죽이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정이와 현지를 죽일 때처럼.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문고리를 조용히 돌리면 스르르 열리는 문도 있고 굳게 잠긴 문도 있다. 나는 잠겨 있는 문의 위치 몇 개를 파악 후 만약 범인이 갑자기 밖으로 나오면 대응할 수 있도록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바로 그때 위에서 오진규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야!!”
뇌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나는 재빨리 계단 난간을 붙잡고 위로 뛰어 올라갔다. 오진규는 일부러 내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를 친다.
“진정해!”
2층이 아니다. 이 소리는 3층에서 들리고 있다. 나는 다시 한 층을 올라갔다. 다시 오진규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 물러나면 정상참작 해줄 수 있어. 진정하고 그거 내려놔. 애는 풀어주고 이야기하자.”
3층 복도 끝방에서 울리는 소리. 나는 빠르게 걸어 방문 앞에 섰다. 오진규의 등 너머로 울고 있는 민지를 뒤에서 붙잡은 범인이 보인다.
손에 칼이 들려 있고, 그 칼은 민지의 목을 겨누고 있다. 마스크와 모자, 선글라스 때문에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안다. 그가 진영월이라는 것을.
오진규가 손바닥을 보여주며 진영월을 진정시킨다.
“대화로 하자, 대화로. 그 학생이 무슨 죄가 있다고.”
진영월이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다.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칼을 앞으로 겨누고 마구 내지르며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 씨X 새끼들아!”
오진규는 경험 많은 형사답게 절대 다가가지 않고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지금 진영월의 손에 민지 목숨이 달려 있기에 범인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농후하다.
“날 봐, 나 한 발자국도 안 다가가고 있어. 보이지? 너 진정할 때까지 여기 그대로 있을 거다. 그러니 칼부터 내려놔.”
“꺼져! 다 안 꺼지면 이년 바로 죽일 거야!”
“야야,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일단 애는 놔주고 우리끼리 이야기하자.”
“개소리하지 마!”
진영월이 다시 칼을 휘두른다. 민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구해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진영월에게 입이 막혀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민지의 목에 벌써 붉은 선이 그어져 있다. 오진규가 조금만 늦게 발견했으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만히 오진규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가 뒤를 돌아본다.
“제가 하겠습니다.”
“…….”
오진규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발자국 물러나며 속삭였다.
“다가가시면 안 됩니다. 수칙 아시죠?”
“…….”
나는 고개만 끄덕인 후 오진규가 섰던 자리에 서서 팔짱을 꼈다. 진영월은 새로 등장한 날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나는 민지 상태를 확인한 뒤 말했다.
“어이.”
내 얼굴을 보고도 반응이 없었던 민지가 눈썹을 꿈틀거린다.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지만 내가 왔다는 것을 안 민지는 눈물을 줄줄 흘린다.
진영월이 칼로 날 겨누며 말했다.
“다 꺼져! 꺼지라고!”
나는 흥분한 진영월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네가 인질로 삼고 있는 그 아이 말인데.”
진영월이 칼을 민지 목에 겨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민지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민지를 죽이려는 목적은 중국으로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민지를 죽이고 여기서 잡힐 생각이 아니니, 지금 민지는 그에게 중요한 인질이다.
민지가 자기 목에 들어오는 칼을 보며 눈을 질끈 감는 것이 보인다. 나는 차분한 얼굴로 진영월의 행동을 지켜보다 말했다.
“그 아이. 안면인식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다.”
“그게 뭔데, 씨X!”
“사람 얼굴 못 알아본다고.”
“…….”
민지의 목에 겨누고 있던 칼이 순간적으로 힘을 잃는다.
얼마나 황당할까? 목격자를 제거하고자 위험을 감수했는데 그 목격자가 사람 얼굴을 못 알아보는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헛수고였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진영월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칼을 고쳐 잡는다.
“지랄하지 마!”
나는 민지에게 물었다.
“민지야. 아저씨 목소리 기억해?”
범인에게 꼼짝없이 잡혀 있던 민지가 눈을 뜬다. 진영월이 민지 반응을 살피고 있다.
나는 민지 눈을 보며 말했다.
“아저씨 얼굴은 기억 못 해도, 목소리는 기억하지?”
민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선글라스 위로 드러난 진영월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와 민지를 믿을 수 없다. 당연하다. 나 같아도 안 믿을 것이다.
진영월이 다시 민지 목에 칼을 들이밀며 외쳤다.
“헛소리하지 말고 다 꺼져! 안 그럼 이 자리에서 이년 죽는다!”
오진규가 뒤에서 속삭인다.
“지나치게 흥분했습니다. 일단 물러나시죠.”
나는 오진규를 힐끔 본 뒤 눈짓했다. 날 믿으라는 신호. 오진규는 내 눈을 바라보다 슬쩍 물러난다.
나는 다시 진영월을 보며 말했다.
“연정이, 현지 말이다.”
칼을 쥔 진영월의 손이 순간적으로 힘을 잃는다.
“뭐……?”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이건 갑자기 공격하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일종의 신호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 아니었던 거 안다.”
“…….”
진영월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는 가만히 그를 보며 말했다.
“그냥 귀여워서 놀아주고 싶었던 거 안다. 그러다 실수를 했고. 넌 아이들에게 무척 미안해하고 있다는 거 잘 안다.”
진영월의 목젖이 꿀렁거린다. 칼을 고쳐 쥐며 서서히 물러나는 놈. 나는 그가 물러나도 더 다가가지 않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안다. 네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진영월이 멈칫한다. 선글라스로 가려져 눈이 보이지 않지만 그의 눈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민지를 눈짓하며 말했다.
“아까 내가 말했던 안면인식장애는 진짜다. 네가 아이들을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진영월은 한참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민지 귀에 대고 뭔가 속삭인다. 멀어서 들리지 않지만 민지는 범인의 숨결이 느껴지자 몸을 움츠렸다가 급히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인다.
그러자 진영월이 민지의 등을 확 밀치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버린다.
“악!”
밀려난 민지가 내 쪽으로 쓰러진다.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 민지를 부축했다.
오진규가 달려가 창문 밖을 확인하곤 밖으로 달려나간다.
“제가 추적하겠습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민지를 받친 채 오진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지가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흑흑, 으어…… 으아아아앙…….”
일단 민지 목부터 살폈다. 날카로운 예기에 베이긴 했지만 상처는 깊지 않다. 피부가 베인 정도이다. 물론 감염 방지를 위해 치료를 하긴 해야 한다.
“민지야.”
“으아앙…… 엄마…….”
“괜찮아, 아저씨야.”
민지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날 바라본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만져본다.
“진짜 형사 아저씨 맞아요? 끅, 끅…….”
“그래, 이제 안심해. 네가 아는 그 사람 맞아.”
“화, 확실…… 끅, 하죠?”
“그래, 우리 학교 앞에서 만났었잖아.
민지는 계속 내 얼굴을 만지며 확인 중이다. 나는 긴장으로 차가워진 민지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학교 나와서 아파트 단지 공터에서 이야기했잖아. 케이크 상자 들고 가던 현지 이야기, 범인과 눈 마주쳤던 이야기. 내게 해줬던 거 기억나지?”
우리만 했던 대화. 민지는 범인과 눈을 마주쳤다는 이야기를 나 외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민지는 그제야 안심하며 숨을 크게 내쉰다.
“하…….”
“상처 좀 보자. 여기 말고 다른 데 다친 곳은 없어?”
민지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다른 데는 괜찮아요.”
나는 일어나려는 민지를 부축했다. 아이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비틀거린다. 겨드랑이 밑에 팔을 끼고 부축을 한 나는 아이 움직임을 살폈다.
민지는 마른세수를 한번 한 후 물었다.
“경찰 언니 어떻게 됐어요?”
“응?”
“범인이 나 납치할 때 경찰 언니가 벽돌에 맞았어요.”
안다. 정말 착한 아이구나. 정신 차리자마자 자신보다 남의 안위를 묻다니.
“같이 온 형사들이 119 불렀을 거야.”
“괜찮을까요? 나 때문에 다친 건데.”
민지는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경황이 없어 곁눈질로만 봤는데 후두부에 출혈량이 꽤 있었다.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지 못했으니 나가서 물어야 할 것 같다. 지금쯤 119가 도착했을 시간이다.
나는 민지를 끌며 말했다.
“일단 나가자. 구급대원들 왔을 테니 네 상처 치료도 받고. 나가면 여경 상태도 알 수 있을 거야.”
힘들어 보였지만 자기를 지키다 다친 여경 소식이 궁금했던 민지는 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천천히 걸었다.
힘겹게 계단을 내려와 1층에 도착했다. 오진규는 진영월을 검거했을까? 일단 민지와 여경을 병원으로 보내는 쪽이 먼저다.
나는 민지를 데리고 건물 정문으로 나왔다. 저 멀리 사람들이 몰려 있고, 119 차량이 와 있는 것이 보인다. 일단 민지를 차에 태우고 그다음에 움직이자.
그때 건물 저편을 빙 돌아 뛰어오는 오진규가 보인다. 표정을 보니 놓친 모양이다. 오진규가 내 쪽으로 뛰어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테니스장 뒤에 사방이 산입니다. 산 쪽으로 도주한 것 같은데 일단 지원 요청해서 학교 주변 봉쇄하겠습니다.”
“예, 선배님.”
오진규가 민지를 보며 물었다.
“너 괜찮아?”
민지는 마른 입술로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이니 기억을 하는 모양이다.
“저…… 경찰 언니. 어떻게 됐어요?”
오진규가 멀리 구급대원들에게 처치를 받고 있는 여경을 보며 말했다.
“일단 생명에는 지장 없지만 몇 달 요양은 해야 될 거야.”
“아…….”
“괜찮아. 우린 이게 직업이다. 네 탓 아니니 걱정하지 마.”
“그래도…….”
민지는 아무래도 미안한 표정이다.
그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곳을 힐끔거리며 우리 옆을 지나가는 몇몇의 남자가 보였다. 다들 커다란 박스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여고에 남자가 있는 것은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라 오진규가 그들 중 맨 앞에 있던 60대 남자를 붙잡았다.
“뭡니까?”
“예?”
“뭐 하는 분들이냐고요.”
남자는 황당한 얼굴로 오진규를 위아래로 본다. 오진규가 신분증을 보여주자 약간 겁먹은 얼굴이 된 남자가 우리가 민지를 구해낸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급식 차로 배달 왔는데요. 여기가 테니스부 부설 건물이라 부식 놓고 가려고.”
오진규가 그의 뒤에 있는 남자들을 보았다. 아르바이트생들인지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박스를 들고 있다.
아까 정문을 지키고 있던 형사들에게서 급식 차가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오진규는 알았다는 듯 물러났다.
“사건 현장이니 안에 들어가지 마시고, 밖에 쌓아두고 돌아가세요.”
“아, 예…….”
남자가 주섬주섬 돌아서 아르바이트생들을 독려한다.
“자자, 뭔 일 난 모양이니 빨리하고 가자.”
“예, 사장님.”
민지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남자가 모자 쓴 아르바이트생 한 명의 등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빨리 좀 움직이라고.”
“아!”
아르바이트생의 짧은 신음.
바로 그때 내 몸을 꼭 붙들고 있던 민지의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민지의 반응을 느끼자마자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내 곁을 스치는 아르바이트생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앞으로 전진하려던 아르바이트생이 내게 뒷덜미를 잡히고 비틀거린다.
민지가 순간적으로 소리를 지른다.
“저 사람!! 저 사람이 범인이에요!”